“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 골로새서 2:8절 -
현대신학의 태동의 학문적, 사회적 배경을 설명하시오.
답) 신학에게 여왕의 자리를 내주었던 철학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성주의적 인본주의적인 철학이 하나님 중심주의(God-centered)를 지향하는 삶의 체계의 신학을 집어 삼키고 현대신학이라는 철학적 사고의 가면을 쓰고 기독교에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현대신학의 태동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문예부흥(文藝復興)이다. 13-14세기 문예 부흥 때(The period of the renaissance) 충격을 받게 되었다. 문예부흥이란 중세의 모든 학문으로부터 히브리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헬라적인 요소를 회복시키고자 한 운동이었다. 그리하여 문예부흥은 신학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하였고 그 결과 견고했던 신학의 지위가 그 때 한 번 기우뚱하게 되었다.
둘째, 신학은 자연과학(自然科學, Natural Science)의 발전에 철퇴를 얻어맞았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16,17세기 갈리레오 사건이다. 그 때 자연 과학이 신학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부터 갈릴레오는 자신의 천문관측 결과에 의거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地動說)에 대한 믿음을 굳혔는데, 이것이 로마교황청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셋째, 이 자연과학과 신학이 대결함으로써 그 결과로 생겨난 것이 18세기의 계몽주의 운동(啓蒙主義運動, A campaign for enlightenment)이다. 계몽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반기독교적 사상(Anti-Christian thought)이다. 특히 프랑스에서 많은 계몽주의 학자들이 일어났다. 볼테르, 다름벨트, 엘벨티우스 같은 사람들은 거의 무신론자(無神論者)들이었다. 볼테르는 무실론자였지만 ‘도덕을 위해 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신이란 도덕을 위한 관념적(觀念的, Ideological)인 신’이었고 ‘그 아들 예수에 대하여는 우리가 알바가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상이 바로 계몽주의의 정신이었다. 이 정신을 이어 받은 것이 포이에르바하(Feuerbach)의 무신론이고, 그의 무신론을 이어 받은 사람이 공산주의 이론을 확립한 칼 막스(Carl Marx)이다. 지성인들을 매료시킨 계몽사상과 자연과학이 그렇게도 존중하는 이성적(理性的) 합리주의(合理主義)의 결과는 반기독교적(Anti-Christian)이다.
계몽주의는 인간의 것이 들어갈 여지가 없었던 교회(구·신교)의 통치(統治)와 권위(權威)로부터 나와 인간의 것으로 깨우쳐진(Enlightened)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중심이었던 세계관(世界觀)이 인간 중심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계몽주의(啓蒙主義, Enlightenment)시대는 인간의 지적(知的), 도덕적(道德的) 능력이 높게 평가되기 시작했고, 상대적(相對的)으로 교회의 권위(權威)가 축소(縮小)되기 시작했다. 이것을 달리 표현(表現)하면 인간의 ‘이성(理性)’이 ‘계시(啓示)’를 대신하였고 자연주의(自然主義, Naturalism)가 초자연주의(超自然主義, Supernaturalism)를 대신(代身)했다는 것이며, 교회의 가르침이나 성경(聖經)이 인간(人間)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이성(理性)이 종교적(宗敎的) 교리(敎理)나 계시(啓示)를 살피고 검증(檢證)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계몽주의(啓蒙主義)가 전적으로 반(反)기독교적(基督敎的) 혹은 반(反)유신론적(有神論的)으로 시작했으며 진행(進行)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기독교적(基督敎的)이었으며 유신론적(有神論的)이었다. 하나님을 인정(認定)하되 더 이상 인간의 이성(理性)을 다스리는 신이 아니라, 인간(人間)의 이성과 그 이성이 다스릴 세계(世界)를 허락(許諾)하고 이제 더 이상 상관(相關)하지도 상관할 수도 없는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계시(啓示)보다 이성(理性)이 우월(優越)한 위치를 차지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자연신론(自然神論)을 기독교내에 존재하면서 초자연적(超自然的)인 것을 부인(否認)하고 계시(啓示)를 부정하는 현대 신학자들의 모태(母胎)적 양상(樣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초 현대신학(現代神學)이 태동(胎動)하기에 아주 적합한 환경(環境) 두 가지를 설명하시오.
답) 첫째, ‘자율성(自律性, Autonomy)’이다.
인간 외에 어떠한 외부의 권위(權威)나 기준에도 순복(順服)하지 않고 인간 스스로가 법이 되었다는 것이다. 진리(眞理)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인간을 자유케 할 것으로 착각(錯覺)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이 최종(最終) 준거점(準據點, Reference-point)이 되었다는 것이다. Theonomy(God-law)가 아니라 Autonomy(self-law)가 된 것이다.
둘째로 ‘이성(理性, Rationalism)’이다.
헬라 철학(哲學) 이후부터 시작해서 이성이 중세시대(中世時代)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계몽주의(啓蒙主義)의 이성은 주어진 질서(秩序)와 원리(原理)에 부합(附合)하는 이성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분별하고 판단(判斷)하는 이성이었다. 즉, 하나님의 계시의 자리를 차지한 이성(理性)이었다. 자연과 인간의 세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도 다스리는 이성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자율성(自律性)과 이성은 바로 현대신학(現代神學)이 태동하기에 아주 적당한 온도와 습도가 된 것이다.
현대신학(現代神學)을 잘 살펴보아야 할 두 가지 큰이유는 무엇인가요?
첫째, 소위 ‘자유신학(自由神學)’ 이라고 명명되는 ‘현대신학(現代神學)’이 어떻게 성경적(聖經的) 정통(正統)에서 벗어난 지를 발견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 현대신학(現代神學)이 어떻게 그 당시 처해 있던 상황에 대한 물음에 (현대 신학자(神學者)들 자신이 가졌던 물음들을 포함하여) 답하려 했는가를 살핌으로 그 오류(誤謬)에 빠지지 않고 우리들의 물음에 관한 답을 성경(聖經) 안에서 찾고자 하는 데 있다.
현대신학에 관심을 두어야하는 이유들을 열거하여 보시오.
첫째, 현대 신학은 우리 기독교(基督敎)가 지켜왔던 정통신학(正統神學)에 큰 도전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신학을 부정하고 우리가 지니고 있는 신앙을 부인한다는 것은 보수신학(保守神學)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첫 번째와 비슷한 이유로, 현대신학(現代神學)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방해(妨害)하고 신앙의 순수성(純粹性)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현대신학(現代神學)은 사탄적 요소가 있기 때문에 성도들을 혼란(混亂)케 하며 그들의 믿음을 흔들 것이다.
셋째, 우리의 성숙(成熟)된 신학과 신앙의 테스트가 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평신도(平信徒)들은 현대신학을 대함에 있어서 조심(操心)해야 한다는 의미이며, 현대신학에 관심을 둠으로써 우리들의 신학과 신앙을 재점검(再點檢)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 보수진영(保守陣營)이 자유진영(自由陣營)으로부터 많이 받는 비판(批判)으로서 마치 우리가 지적능력(知的能力)이 부족해 현대 신학을 이해 못한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이다. 어려운 철학(哲學)이나 사상을 논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성경만을 이야기하고 영성(靈性)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자(保守主義者)들을 마치 지적 수준이 낮아 그런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서라도 현대신학(現代神學)에 관심을 갖고 비판(批判)할 줄 알아야 한다.
다섯째, 현대신학으로 인해 성도(聖徒)들 (특히 지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성도들)이 혹 가질 수 있는 보수신학(保守神學)과 신앙에 관한 도전(挑戰)과 의문을 치유(治癒)하기 위해서이다. 여섯째, 현대신학은 보수주의(保守主義) 보다 우리가 처해 있는 현 상황(狀況)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우리는 현 상황의 신학적(神學的) 문제가 무엇이고 고민(苦悶)이 무엇인지를 현대신학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물론 현대신학의 답은 틀린 답이다. 그러나 우리도 문제를 알아야 대안을 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신학은 우리의 신학적(神學的) 관점(觀點)을 깊게 만들어 준다고 하겠다.
일곱째, 현대-자유주의(自由主義)자들도 우리의 전도(傳道) 대상(對象)이 된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指摘)해 주며 그들에게 올바른 신학(神學)과 신앙(信仰)의 길을 제시(提示)해야 의무(義務)와 책임(責任)이 우리에게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현대신학(現代神學)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신학은 학문의 체계를 뛰어넘는 삶의 체계의 그자체라는 사실에 대하여 논하여 보시오.
신학은 학문의 체계가 아니고 아니고 삶의 체계이다. 반(反)성공회적 청교도 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 1576-1633)는 <신학의 정수>(Medulla Theologiae, 1623)책에서 신학은 “자연이나 인간적 탐구에서 나오는 하나의 ‘학문’(science)이 아니라 계시로 나오는 하나의 ‘교의’(doctrine)”라고 보아 “신학은 하나님에 대해 사는 것에 대한 교리요 가르침이다”라고 했다. 에임스는 신학적인 지식(교의)과 실제적인 삶(윤리)을 분리시키기를 원치 않았다. 신학은 헬라의 아리스토텔레스적 학문의 체계로 존재하지 않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딛 2:12) 길을 가르쳐주는 삶의 교리”이다.
독일 베르린대학의 교회사 교수였던 니안더(August Neander, 1789~1850)는 1813년 “신학자를 만드는 것은 가슴(영혼)이다”(Pectus est, quod theologum facit)하면서 소위 ‘영혼의 신학’을 제창했는데, 그는 신학은 거룩한 경건이라고 주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