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의 역사적 개요(Historical Overview of Existentialism)
실존주의는 20세기 전반(前半)에 합리주의(合理主義)와 실증주의(實證主義) 사상에 대한 반동으로서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 사상으로 실존이라는 것이 현대적인 의미로서 다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42세)에서부터이다.
키에르케고르는 힘겨운 기독교(基督敎)와의 논쟁(論爭)으로 자신의 삶을 마감했으며 “자신은 신보다는 인간의 양심을 믿는다.” 라고 했지만 그는 유신론적(有神論的)인 실존주의자(實存主義者)로 말하여 진다.
야스퍼스((Karl Jaspers, Karl Theodor Jaspers, 1883∼1969.86세)도 유신론(有神論)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실은 야스퍼스도 평생(平生)을 거쳐 신(神)이라는 것을 말한 적이 거의 없으며 가장 기독교적(基督敎的)인 실존주의자였던 키에르케고르 자신도 자신을 기독교(基督敎) 주의(主義)라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실존주의는 유신론적인 것이 한 면으로 구분(區分)되어지긴 하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 무신론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실존철학(實存哲學)의 무신론적(無神論的)인 것은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56세)에 의해서부터 이다.
그 이후 금세기(今世紀)의 실존주의 철학은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나뉘어졌는데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 카뮈(Albert Camus, 1913∼1960,47세)는 20세기의 대표적인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이다.
사르트르는 그의 이상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되었으며 막스(Marx, Karl, 1818~1883)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사르트르와 카뮈는 모두 프랑스 실존주의자들로 20세기 중반(中盤)에 커다란 존재들이었으며 소설가이며 비평가(批評家)로도 유명하다.
하이데거(1889∼1976)는 무신론적인 실존주의라고 구분되며 사르트르는 자신을 포함한 프랑스 실존주의자(實存主義者)들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년)를 지지한다고 했다.
야스퍼스와 하이데거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시기도 비슷했으며 둘 다 아카데믹(Academic)한 논문(論文)과 강의(講義)로 일관했다는 점. 그리고 그 둘은 50대에 들어 서부터 니체에 대해서 생의 마지막까지 자주 이야기했으며 또한 위에 언급한 다른 실존주의 철학자들 만큼의 강렬(强烈)한 철학(哲學)과 인상(印象)을 주지는 못했다.
낭만주의(浪漫主義) 철학의 과도(過度)한 반항에서 그것을 넘겨 니체에 이르러 세련되고 심오해졌다.
니체는 막스와 함께 20세기를 뒤흔든 두 명의 철학자(哲學者)이다.
니체의 실존주의 철학은 현대 정신문명(精神文明)의 거대한 기반(基盤)이며 굳이 실존주의라고 말하여 지지 않는 문학작품(文學作品) 속에서도 실존주의(實存主義)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20세기에 미친 실존주의의 영향, 그 근본(根本)을 관철(貫徹)하는 삶에 대한 깊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는 이미 많은 것을 니체 위에서 살고 있으며, 실존주의는 20세기 사유의 세계에서는 유일한 안식처(安息處)이자 보편적(普遍的)인 것이 되었다.
21세기의 철학 역시 니체의 20세기 혁명 아래로, 혹은 위로 가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 실존주의(Christian existentialism)
기독교 실존주의는 그리스도교 신학에 실존주의적 접근(接近)을 하는 이론 철학적 운동이다.
학문(學問)의 시작(始作)은 종종 덴마크 철학자(哲學者)이자 신학자(神學者)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의 연구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도교 신학에 대한 실존적 접근은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354-430),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 파스칼((Pascal, 1623-1662), 마리틴(Maritain) 등 길고 다양(多樣)한 역사(歷史)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基督敎) 실존주의(實存主義)는 키에르케고르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해에 달려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우주는 근본적(根本的)으로 역설적(逆說的)이며, 가장 큰 역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人格)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탁월(卓越)한 결합(結合)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사회 협약이 본질적으로 개인에 의한 개인적인 미적(美的) 선택(選擇)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모든 규정(規定) 된 도덕성(道德性), 사회구조(社會構造) 및 공동(公同) 규범(規範)을 대신하는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키에르케고르는 각 개인이 독립적이고 개별적으로 실존적인 선택(選擇)을 해야만 자신의 존재를 구성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각 사람은 생존의 길에 대해 특별(特別)한 선택을 할 때까지는 (고의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우유부단(優柔不斷)의 고뇌를 겪는다.
키에르케고르는 또한 뚜렷한 삶의 선택에서 나오는 조건(條件), 즉 미학(美學), 윤리(倫理), 종교(宗敎)를 이해하기 위해 세 가지 루브릭(Rubric, 강조를 위한 빨간 글 부분)을 제안했다.
키에르케고르 이론가(理論家)들의 기독교 실존주의의 주요 전제 중 하나는 대중을 더 진정한 형태의 기독교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 형태(形態)는 종종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처음 3 세기 동안 존재했던 초기 기독교의 개념(槪念)으로 밝혀졌다. AD 313 년에 로마 황제 콘스탄틴 1 세에 의해 발행 된 밀라노 칙령(勅令, Edict of Milano)으로 시작하여 기독교는 로마인들 사이에서 인기(人氣)를 얻었고 나중에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도 인기(人氣)를 누렸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19세기까지 신약 성서의 궁극적(窮極的)인 의미 (사랑, 아가페, 자비, 사랑스러움)가 음란(淫亂)해지고 기독교가 은혜(恩惠)와 겸손(謙遜)과 사랑의 원래의 세 가지 메시지에서 크게 벗어났다 고 주장(主張)했다.
키에르케고르 이론가들의 기독교 실존주의의 또 다른 주요 전제(前提)는 키에르케고르의 하나님과 사랑에 대한 개념을 포함한다.
대부분의 경우, 키르케고르는 하나님을 사랑과 동일시한다.
따라서 한 사람이 사랑의 행동(行動)에 참여하면 그는 하나님의 측면(側面)을 성취한다.
키에르케고르는 개인을 유한(有限)성과 무한(無限) 요소의 필수 합성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개인이 무한한 면을 완전히 깨닫지 못하면 그는 절망(絶望)에 빠져 있다고 한다.
그는 절망이 얼마나 유해(有害)한지를 지적(指摘)하며 ‘절망은 죄’ 그리고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Despair is sin and Despair is a disease that leads to death)이라고 까지 표현했다.
현대의 많은 보편적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절망(絶望)의 개념(槪念)은 죄(罪)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에게는 인간(人間) 실존(實存)을 행하지 않은 것이 죄이다.
원죄(原罪)의 개념을 유전적(遺傳的)인 측면으로 다루지 않고 인간의 '실존(實存)'에서 다루고 있다.
키에르케고르의 기독교 실존주의의 마지막 주요 전제는 사악(邪惡)한 행위의 체계적 실행 취소를 수반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일단 행동(行動)이 완료(完了)되면 하나님의 면전(Coram Deo, God's presence)에서 평가(評價)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신의 감시에 자신을 붙잡는 것이 행동을 판단하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행동은 무엇이 좋거나 나쁘다고 여겨지는 방식을 구성하기 때문에, 그의 행동의 잠재적(潛在的) 결과를 끊임없이 의식해야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선(善)의 선택(選擇)이 각 개인에게 다가 왔다고 믿었다. 그리고 절망에 빠진 개인의 선택의 잠재적(潛在的) 제한을 예견했다.
기독교 실존주의 이론은 흔히 그리스도 사역의 독특(獨特)하고 중요한 측면으로 여겨지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간접적(間接的)인 스타일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리킨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각 개인이 그 자신의 진리(眞理)에 맞설 수 있도록 특별(特別)한 비유(比喩)나 말에 요점을 종종 언급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마18:21-35)에 나와 있다.
구약에서의 간접적인 의사소통(意思疏通)의 좋은 본보기는 사무엘하(12장 1-14절)에 나오는 다윗과 나단의 이야기이다.
성경을 실존주의적으로 읽는 것은 독자(讀者)가 자신(自身)이 실존적 주관이며 하나님이 그에게 개인적으로 전달하는 말을 공부한다는 것을 인식(認識)하도록 요구한다.
이것은 독자와 관련이 없으며 독자와 관련이 없는 "진리(眞理)"의 모음을 보는 몇몇 다른 사상(思想)들과는 대조적이다.
이러한 독자는 외부에서 그에게 강요하는 것처럼 계명(誡命)을 따라야 하는 의무 같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 내부에서 그를 안내하는 것처럼 읽어야 한다.
실존주의적(實存主義的)으로 말하면, 성경은 성경이 개인적 권위(權威)가 될 때까지는 사람의 삶에서 권위가 되지 않는다.
불트만(Rudolf Bultmann, 1905~1990)은 신과 인간의 진실(眞實)된 만남을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현존재 분석(分析)을 시도한다.
이를테면 오늘날의 인간은 무엇이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현대인(現代人)은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어떤 상황(狀況) 속에 처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불트만은 성서의 신화론(神話論)을 현대에 그대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며, 성서에서 말한 인간의 실존(實存) 이해(理解)를 자기의 실존(實存) 가능성(可能性)으로 받아들이는 성서의 실존주의적 해석에 기초한, 이른바 비(非)신화화(神話化)를 주장. 나아가 1950년대에 '역사적 예수의 문제'의 동기(動機)를 만들고, '역사적 예수의 재건'(복음서에서 예수의 상像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不可能)에 가깝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 케제만(E. Kasemann, 1906~1998)과 보른캄(G. Bornkamm, 1905~1990)은 불트만을 극복하고, 예수를 재건하고자 하였다.
불트만의 역사 이해는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에 영향을 받아, 역사(歷史)를 실존(實存)사로만 해소하려 한 점이 강한 비판(批判)을 받았다.
불트만은 바로 이 하나님 말씀의 내용과 그 말씀의 표현(表現) 수단(手段)의 분리(分離) 과정(過程)을 비신화화(非神話化)라고 부른다.
이렇게 현존재(現存在) 분석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비신화화 작업이 이룩된 후 비로소 불트만은 하나님의 말씀의 재해석(再解釋)이다.
따라서 불트만 신학의 구도는 세가지 측면, 즉 현존재(現存在) 분석(分析)과 비신화화(非神話化), 그리고 말씀의 재해석(再解釋)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
볼트만은 변증법적(辨證法的) 신학자(神學者) 답게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타락(墮落)한 존재(存在)이기 때문에 스스로는 본래적(本來的)인 실존을 성취(成就)할 수 있는 능력(能力)이 없다고 본다.
어째든 볼트만은 본래적(本來的) 실존의 성취(成就)는 오로지 하나님의 도움만으로 가능(可能)하다고 보았다.
급진 실존주의적 기독교(Radical existentialist Christianity)
급진적(急進的) 실존주의 기독교(基督敎)인의 신앙은 인간의 조건에 내주하는 하나님에 대한 현명(賢明)하고 즉각적(卽刻的)이고 직접적(直接的)인 경험(經驗)에 근거(根據)한다고 주장(主張)되어왔다.
개인은 자신의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만들거나 창조하지 않을 것을 제안한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한 결정의 결과로 오지 않는다.
예를 들어 퀘이커 교도(Quaker)와 같은 17세기의 급진적(急進的)인 개신교인들은 철학적(哲學的)으로 급진적인 실존적 기독교와 일종(一種)의 공감(共感)대를 유지해왔다.
퀘이커란 종교친우회(영어: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또는 퀘이커(영어: Quaker)는 17세기에 조지 폭스가 창시한 기독교 교파다.
퀘이커라는 이름은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떤다"라는 조지 폭스의 말에서 유래했다.
퀘이커는 1650년대에 영국의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가 제창한 명상운동으로 시작하였다.
올리버 크롬웰의 종교적 관용정책으로 크게 확산하였으나 이후 찰스 2세가 국가교회 정책을 펴면서 정부로부터 탄압받았다.
퀘이커 신앙은 윌리엄 펜이 불하받은 북아메리카 식민지(植民地) 영토에 도시(현 미국 펜실베이니아)를 세움으로써 종교(宗敎)의 자유(自由)를 허용받았다.
퀘이커란 하나님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의미에서 스스로 '친우회'라고 칭했다. 한국에서는 '종교친우회'라고 명명하고 있다.
퀘이커 교도들은 청교도(淸敎徒)와 다르게 칼빈주의의 예정설(豫定說)과 원죄 개념을 부인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안에 신성(神性)곧 하나님의 성품이 있으므로 이를 기르는 법을 배우면 되고, 그렇게 신성(神聖)만 기른다면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퀘이커의 예배특징은 침묵의 예배로써, 퀘이커 각자는 침묵(沈黙)을 통해 내면의 빛을 볼 수 있도록 한다.
장소는 특정한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으며, 예배를 이끌어가는 별도의 성직자(聖職者)나 목사(牧師)를 두지 않는다.
영국에서 많은 지지를 받지 못했던 퀘이커 교도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그들의 피난처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극히 일부는 뉴잉글랜드나 캐롤라이나로 이주했으나 대부분의 퀘이커 교도(敎徒)들은 자기들만의 식민지를 원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경멸섞인 눈초리를 받아온 종파(宗派)였기 때문에, 궁정에서 영향력(影響力) 있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왕으로부터 식민지(植民地) 건설에 필요한 특허장(特許狀)을 얻어내기란 불가능(不可能)한 일이었다.
미국의 제 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퀘이커 교도이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유명한 퀘이커 교도로는 함석헌(咸錫憲) 선생,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박성준 교수(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남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