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개혁주의(改革主義, Reformed theology)

 

개혁주의(改革主義, Reformism)는 종교개혁(宗敎改革)가들의 개혁 정신을 철저히 따르자는 개신교의 신학적(神學的) 사조(思潮)를 일컫는 말이다. 문자(文字) 그대로 '늘 새롭게 고쳐나간다(Always refreshing)'는 개혁사상(改革思想)을 가리킨다. , 성경(聖經)에 비추어 바르지 못한 것들을 늘 개혁(改革)해 나가며,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개혁주의(改革主義)이다.

개혁(改革, Reform)이라는 말은 본래 16세기 로마 카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의 오류(誤謬)와 폐단(弊端)에 대항(對抗)하여 일어난 교회들의 성격(性格)을 묘사(描寫)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이다. 개혁주의(改革主義)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십자고상, 고해성사, 성변화(화체설), 제단 위에 촛불 놓기, 성상(성모 마리아상 포함), 성화 등의 잔례들을 비성경적(非聖經的)이고 인습적(因襲的)인 것으로 바라보아 철폐(撤廢)하였다. 반대로 당시의 과학기술(科學技術)과 학문(學問)에는 매우 긍정적(肯定的)인 편이었다. 그러나 진화론(進化論)을 비롯한 실존주의(實存主義) 계몽주의(啓蒙主義) 인본주의(人本主義) 다원주의(多元主義)를 위시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으로 인해 무조건(無條件) 긍정적(肯定的)이기보다는 신앙을 부정(否定)하려는 용도로 과학을 사용하는 것에 한해서 비판(批判)하는 시각이 개혁주의(改革主義)의 주류가 되었다.

개혁(改革)이라는 말은 더 넓은 의미에서 종교개혁(宗敎改革)의 모든 개신교회(Protestant Church)에 적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교회생활(敎會生活)과 개인생활(個人生活)에서 한결같이(Consistently)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 것을 고백(告白)했기 때문이다. 흔히,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宗敎改革)을 배경으로 신교(新敎)가 시작되었다고 보는데, 신교(新敎)'종교개혁(宗敎改革)'을 배경(背景)으로 출발(出發)하였기에 신교(新敎)를 통틀어서(장로교(長老敎), 감리교(監理敎), 성결교(聖潔敎) 등 모든 개신교 교파(敎派) 포함) '개혁주의(改革主義)'라고 칭한다. 이는 광의(廣義)적인 의미에서의 개혁주의(改革主義)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매우 제한(制限)된 의미를 갖는다. 이 루터(Martin Luther)의 사상에서 그 자체를 구별 짓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협의(狹義)적인 의미(意味)에서의 '개혁주의(改革主義)'는 종교개혁자(宗敎改革者)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사상(思想)을 이어받은 프로테스탄트주의(Protestantism)의 개혁사상(改革思想)을 의미하고, 교회적(敎會的)으로는 개혁파(改革派) 또는 장로파(長老派)라고 하는 교회조직(敎會組織)의 신앙(信仰)과 신학(新學)을 가리킨다. 이런 맥락(脈絡)에서 '개혁주의(改革主義)'를 일명 '칼빈주의(Calvinism)'라고도 한다. 협의적(協議的)인 의미(意味)의 개혁주의(改革主義)가 지닌 특징(特徵)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주권(主權) 중시, 성경(聖經) 중심주의(中心主義), 하나님의 은혜(恩惠)에 의한 신앙(信仰), 오직 믿음으로 구원(救援)받는다는 신앙(信仰) 및 의인(義認)과 성화(聖化) 등을 신조(信條)로 삼고 있으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위해(Only for the glory of God)' 존재(存在)하는 것을 신앙(信仰)의 목표(目標)로 삼고 있다.

개혁주의(改革主義) 5대 강령(綱領)(Five Solas)을 보면, 종교개혁(宗敎改革) 당시 처음 등장(登場)한 기독교(基督敎)의 다섯 가지 (라틴어) 표어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진리(眞理)를 판단(判斷)하는 최종(最終) 권위(權威)는 교회가 아니라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며, 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오직 은혜(Sola Gratia)'에 근거한 것으로 '오직 믿음(Sola Fide)'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고 설파했다. 칼빈(John Calvin)은 루터(Martin Luther)의 세 강령에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을 더해 종교개혁 5대 강령을 완성하였다.

1)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권위 있는 말씀이며 기독교 교리의 유일한 원천(源泉)이다. 따라서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최종 권위(權威)이며, 가톨릭교회(Catholic church)의 교리나 교부들의 가르침보다 우선한다. 성경은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문체가 명료하며, 자기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존 맥아더(John MacArthur) 목사는 다음과 같이 성경(聖經)의 중요성(重要性)을 강조한다. "가톨릭 변증(辨證)학자(Catholic dialectician)들이 5대 강령 중 '오직 성경'을 거칠게 공격하는 이유는 이 교리만 무너뜨리면 종교개혁자(宗敎改革者)들의 다른 원칙들도 쉽게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2) Sola Gratia (오직 은혜) / 구원(救援)과 관련해 본질(本質)상 죄인(罪人)인 인간이 하나님께 요구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계획, 노력, 열심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으며,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膳物)이다. 이것을 은혜라고 부른다.

3) Sola Fide (오직 믿음) /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恩惠)는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이것을 신학적(神學的)으로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라는 의미의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로 표현한다. 원래 칭의(稱義)란 판사가 기소된 사람에게 무죄(無罪)를 선언하는 행위를 말한다. 복음 안에서 칭의(稱義)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의롭다고 선언(宣言)하시는 것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You are saved by faith by grace, which is not of you, but of the gift of God. It is not from works, that no one can boast(2:8-9)."

4)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 인간은 완전히 타락한 존재로 모두 영벌을 받고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인간이 천국(天國)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함께 죽었다 그의 부활하심과 연합하여 다시 사는 것뿐이다. 예수 이외의 그 어떤 신이나 성자도 구원에 도움을 줄 수 없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14:6)."

5)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 구원(救援)은 오직 하나님만이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는 일이며 거기에 인간이 참여(參與)할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다. 따라서 모든 영광(榮光)은 성직자나 사람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1536년 칼빈(John Calvin)에 의해 작성된 제네바 요리문답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目的)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창조(創造)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광(榮光)을 받으시기 위해서 우리를 창조(創造)하셨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改革主義)는 인간의 삶에 충실(充實)하는 것을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바라본다. 인간의 삶을 하나님과 분리(分離)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그렇기에 돈에 관련된 경제활동(經濟活動)을 정죄하던 당시 가톨릭(Catholic)에 염증(厭症)을 느끼던 중상주의(重商主義), 자본주의(資本主義)에게 큰 호응을 얻게 된다. 베버(Maximilian Carl Emil Weber, 1864~1920, 독일의 사회학자, 철학자, 정치학, 법학자)가 칼빈(John Calvin)을 초기 자본주의(資本主義)의 시초로 바라본 이유가 이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삶을 강조(强調)한 칼빈(John Calvin)이 자본주의(資本主義)를 주장한 것이라고 보면 위험하다. 칼빈(John Calvin)은 삶에 충실(充實)하라고 했지 빈부격차(貧富隔差)를 비롯한 악()을 방관(傍觀)하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혁주의(改革主義)의 사상적(思想的) 특징(特徵)(Thoughtful features of Reformation)

개혁주의(改革主義)는 칼빈(John Calvin)으로부터 전해진 사상체계(思想體系)이다. 창시(創始)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 사상체계(思想體系)의 중요(重要)한 해설가(解說家)이다. 칼빈(John Calvin)의 신학사상(神學思想)은 개혁운동(改革運動)에 이바지한 다른 위대(偉大)한 지도자(指導者)들의 사상(思想)과 함께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430) 사상의 부흥(復興)이요, 어거스틴(Augustinus)의 사상(思想)은 그보다 몇 세기 전의 바울(Paulos, Paul)사상의 부흥(復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사상들을 조직적(組織的)으로 설명하고, 특수(特殊)하게 적용하여 현대를 위하여 제시한 사람이 바로 칼빈(John Calvin)이다. 이때부터 이 사상체계(思想體系)를 칼빈주의(Calvinism) 혹은 개혁주의(改革主義)라 부른다. 개혁주의(改革主義)는 신학(神學)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사상체계이다. 여기에는 신학(神學)과 함께 정치(政治), 사회(社會), 과학(科學), 예술(藝術) 등에 대한 사상(思想)도 포함되어 있다. 이 사상체계(思想體系)는 인생관(人生觀), 우주관(宇宙觀), 세계관(世界觀)을 제공(提栱)한다. 개혁주의(改革主義)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상적(思想的) 특징(特徵)을 가진다.

 

1) 성경관(聖經觀, Bible Perspective)

개혁주의(改革主義)에 가장 기본적(基本的)인 특징은 성경관(聖經觀)이다. 미국 칼빈신학교의 클로스터 교수(Fred H. Klooster)는 그의 논문에서 개혁주의의 독특성을 성경관(Sola and tota scriptura)에서 찾았다(The Uniqueness of Reformed Theology:A Preliminary Attempt at Description, Grand Rapids:The Reformed Ecumenical Synod, 1979).

종교개혁(宗敎改革)은 성경(聖經)의 권위(權威)를 재발견(再發見)하고, 그것을 새롭게 강조(强調)하였다. 종교개혁은 부패(腐敗)한 교권제도(敎權制度)의 횡포(橫暴)를 버리고, 그 자체의 기초를 하나님의 말씀 위에 두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同等)하게 취급(取扱)되었던 교회전통(敎會傳統)의 권위(權威)를 거절(拒絶)하였다. 그리고 새로 발견(發見)한 진리에서 활기를 찾아,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敎會)의 주인(主人)이라는 것, 그는 말씀을 통하여 자기 백성(百姓)에게 말씀하신다는 것, 그 말씀이 죄인(罪人)을 부르시는 수단(手段)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自身)의 권위(權威)로 그들을 다스리시며 순종(順從)케 하신다는 것을 강조(强調)하였다.

오늘날 성경의 영감(靈感)과 무오(無誤)에 관한 문제로 광범위(廣範圍)한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말씀을 주셨는지는 정확(正確)하고 상세(詳細)하게 알지 못한다. 사실 하나님은 성경의 어떤 부분을 우리에게 주시되, 다른 부분과는 다르게 주셨다. 예를 들면, 십계명(十誡命)은 하나님 자신(自身)의 손으로 쓰시는 방법으로 주셨는가하면, 복음서(福音書)들은 목격자(目擊者)들을 사용하여 영감(靈感)으로 회상(回想)케하여 쓰도록 하였다. 누가는 역사(歷史)를 조사하는 특별(特別)한 방법(方法)으로 누가복음을 기록하였다. 성경(聖經) 저자(著者)의 인간성(人間性)과 개성(個性)이 영감(靈感)의 과정(過程)에서 성령(聖靈)에 의하여 충분히 인정(認定)되고 고려(考慮)되었다는 것도 완전히 명백하다.

그러나 이사야와 아모스는 전혀 다른 문체(文體)와 다른 배경(背景)에서 각각 다른 책들을 썼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과 요한은 비슷하게 그들 자신의 마음의 특성(特性)들을 보여 주었으며, 진리(眞理)를 각각 다른 견지(見地)에서 표현(表現)하였다. 그들은 놀랍도록 서로 다른 문체로 쓰고, 예리하고 고상(高尙)하게 나타내면서도 다 같이 그들 자신의 독특(獨特)한 지성(知性)과 경험(經驗)을 가지고 기록하였던 것이다.

개혁파(改革派) 전통(傳統)에서는 영감의 방법이나, 성경의 여러가지 특성의 의미에 관한 기술적인 정의(定義)보다는 오히려 성경의 권위(權威)에 대하여 더 많이 강조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성경에 접근하면, 성경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다양한 형용사(形容詞)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성경은 권위(權威)가 있으되, 궁극적(窮極的)이며 절대적(絶對的)인 권위를 가진 책이다. 우리는 성경의 교훈(敎訓)을 의지(依支)하고, 전적(全的)으로 신뢰(信賴)하며, 우리가 행복하게 살고 죽기 위하여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을 바로 이 성경에서 찾는다(Inst. I. 7, 8, 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信仰告白, Westminster Confession)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榮光), 인간의 구원(救援), 신앙(信仰),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하나님의 모든 계획(計劃)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필요한 중요성에 따라 그것들을 성경에서 추론할 수 있다. 성령(聖靈)의 새로운 계시(啓示)나 인간의 전통(傳統)이나를 불문(不問)하고, 성경에는 어떤 것이라도 다른 무엇을 첨가해서는 안된다"(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I/6). 그러므로 성경이 말할 때 우리는 이에 순종(順從)하고 성경이 진리를 증언할 때,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그 진리에 굴복(屈伏)한다.

그러나 어떤 근거에서 우리는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성령(聖靈)의 신학자(神學者)라 일컫는 칼빈(John Calvin)은 이에 대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도움을 우리에게 주었다. 칼빈(John Calvin) 의 열차(列車)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信仰告白)서가 담겨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특수한 책이라고 믿으며, 여기서 감동을 받는다. 여러 세기를 걸쳐서 기록되었으나, 그 비상한 통일성(統一性), 위엄(威嚴)있는 문체, 영광(榮光)스러운 내용, 놀랄만한 일관성(一貫性), 예언(豫言)의 놀라운 기록(記錄)과 그 성취(成就),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속에서 경건한 감탄(感歎)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우리를 확신시키고 설득하며 순종하게 하는 것은 그 중의 하나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그 전체도 아니다. 오히려 성경 권위(權威)의 확고(確固)한 근거(根據)는 칼빈(John Calvin)이 지칠 줄 모르게 주장했던 성령의 증거(證據)인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믿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아는 것은 성령께서 증거해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때, 즉 성경의 권위와 성령의 증거를 분리(分離)시킬 때, 우리는 즉시 영적(靈的)으로 싸늘해지는 위험(危險)에 처하게 되고, 마침내는 비생산적(非生産的)이며 무의미(無意味)하게 되는 빈약(貧弱)한 논쟁의 희생물(犧牲物)이 되고 말 것이다 (Inst. I.7.1, I.7.5, I.8.13 참조). 칼빈(John Calvin) 은 또한 "하나님이 교리(敎理)의 저자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확신(確信)하기 전에는 교리에 대한 신앙이 수립(竪立)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Inst. I.7.4)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개혁주의(改革主義)66권의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임을 믿는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경은 정확무오(正確無誤)한 객관적(客觀的) 권위를 지닌 하나님의 말씀일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신앙과 행위의 규범(規範)이 된다(딤후3:16, 17). 개혁주의(改革主義)는 로마 가톨릭처럼 성경의 권위를 교회 밑에 두고, 교회가 없이는 성경이 존재할 수 없으나 성경은 없어도 교회는 존재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성경이 처음에는 불성문계시(不成文啓示, Non-script revelation)로 있었기 때문에, 시간적(時間的)으로나 논리적(論理的)으로나 성경이 교회보다 앞선다는 것은 상식(常識)에 속한 문제이다(2:20). 개혁주의(改革主義)는 성경을 종교적 신물(神物)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에 따라 교회의 씨앗(종자)으로 삼기 위해 주신 영감(靈感)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개혁주의는 또한 신정통주의(Neo-orthodoxy, 新正統主義)자들처럼, 계시의 객관성(客觀性)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에 따르면 계시(啓示)는 성경(聖經)과 동일시(同一視)될 수 없고, 성경은 계시의 증거(證據)요 표()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자체가 아니며, 성경의 진술들은 계시 자체가 아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계시(啓示)를 객관화(客觀化)하는 것이요 형체(形體)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계시(啓示)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는 사건이요, 하나님과 사람이 상봉(相逢)하지 않는 한 계시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들은 말한다(칼바르트의 성경관 비판에 대하여는 Colin Brown, Karl Barth and the Christian Message, pp. 54~62; Klaas Runia, Karl Barths Doctrine of Holy Scripture를 참조).

개혁주의(改革主義)는 신복음주의자(新福音主義者, Neo-evangelical)들처럼 성경의 영감(靈感)과 무오(無誤)를 분리하지 않는다. 그들은 영감은 믿으면서도 무오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절대적으로 무오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聖經)은 하나님의 영감(靈感)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신적 권위를 가지며, 그 독자적(獨自的) 신빙성(信憑性)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경을 통하여 구원(救援)에 필요한 지식을 교회나 신부(神父)에 의존할 필요 없이 충분히 섭취(攝取)할 수 있다. 로마 가톨릭(Roman Catholic Church)에 따르면, 성경은 흐려지고 손상되어서 신앙과 행위의 문제까지도 교회가 해석해 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나, 우리는 성경의 명백성(明白性)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들의 견해(見解)에 찬성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의 충족성(充足性), 혹은 완전(完全)성을 주장한다. 기록된 말씀인 성경은 개인과 교회의 영적(靈的도덕적(道德的) 욕구를 위해서 충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전(遺傳)을 성경과 동등하게, 혹은 그 이상으로 우월(優越)한 권위(權威)를 갖게하는 로마교회(Roman Catholic Church)의 입장을 우리는 전적으로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

 

2) 하나님의 주권사상(God's sovereignty)

개혁주의(改革主義)의 특징은 하나님의 주권사상(主權思想)이다. 개혁주의는 항상 하나님 사상(思想)을 그 중심(中心)으로 하고 있다. 감리교(監理敎)가 죄인의 구원, 성결교(聖潔敎)가 구원론(救援論)의 핵심(核心)인 중생(重生) 성결(聖潔) 신유(神癒) 재림(再臨)4중 복음, 침례교(浸禮敎)가 중생(重生)의 신비(神秘), 루터교(Lutheran)가 이신득구(以信得救), 모라비안(Moravian)이 그리스도의 상처, 희랍정교회(希臘正敎會)가 성령(聖靈)의 신비(神秘), 로마교회(Roman Catholic Church)가 교회의 보편성(普遍性)을 각각 강조한다고 하면, 개혁주의(改革主義)는 하나님 사상(思想)을 강조(强調)한다.

개혁주의(改革主義)는 인간의 회심(回心)이나 칭의(稱義)와 같은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하나님이 차지하셔야 할 당연(當然)한 주권(主權)을 차지하시도록 하는 사상에서 출발한 것이다. 개혁주의(改革主義)"만물(萬物)이 주()에게서 나오고, ()로 말미암고, ()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榮光)이 그에게 세세(世世)에 있으리로다. 아멘" (11:36)이라는 말씀을 생활(生活)원리로 하고 실현하려 애쓴다.

개혁주의(改革主義)의 중심사상(中心思想)이 바로 하나님 사상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많은 연구가들이 서로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체계(思想體系)를 이루고자 할 때 만물(萬物)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絶對的) 지배(支配), "하나님의 절대적주권(絶對的主權)"이라는 술어를 필연적(必然的)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주권(絶對的主權)이라는 말이 하나님과 우주(宇宙)와의 관계(關係)를 가장 잘 지적해 주는 술어이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주권(主權)이라는 말은, 자연계(自然界)와 도덕적(道德的) 세계를 지배(支配)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대권(絶對的 大權)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하나님은 자연계(自然界)에서와 마찬가지로 진리(眞理), 도덕(道德), 과학(科學), 사랑 등의 여러 면에서도 법칙과 질서에 따라 다스리신다고 개혁주의자는 믿고 있다.

워필드(B.B. Warfield)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칼빈주의자(Calvinist)는 모든 현상 배후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며, 이 현상(現狀)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본다. 그리고 기도하는 태도(態度)로 전생애(全生涯)를 살아가며, 구원문제(救援問題) 있어서는 자아의존(自我依存)을 배제(排除)하고, 하나님의 은혜(恩惠)만을 전적(全的)으로 의지(依支)하는 자이다"(Calvin as a Theologian and Calvinism Today, pp. 23, 24).

하나님의 주권사상(主權思想)은 개혁주의(改革主義) 첫째가는 교리(敎理)로써 다른 모든 교리들의 중심(中心) 태양이다. 하나님의 우주의 최고(最高) 절대적(絶對的)인 통치자(統治者)라고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작정(作定), 창조(創造), 심리(心理), 구속(救贖)에서 주권적(主權的)으로 역사(役事)하신다.

 

3)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 은혜(Irresistible grace)

개혁주의(改革主義)의 셋째 특징(特徵),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不可抗力的 恩惠)이다. 개혁주의의 구원이 하나님의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 은혜(恩惠)임을 믿는다. 즉 구원(救援)이 전적(全的)으로 하나님의 은혜(恩惠)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요,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죄인(罪人) 안에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실 때 아무도 그 역사에 저항(抵抗)할 수 없다는 것이 개혁주의자(改革主義者)들의 신념(信念)이다. 하나님이 주권사상(主權思想)을 가지다보면, 구원의 문제도 자연히 하나님의 은혜(恩惠)로 말미암아서만 해결(解決)된다는 결론(結論)에 도달(到達)하게 된다.

구원(救援)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교리(敎理)는 칼빈주의 5대 강령(The Five Points)이다. 전적타락(全的墮落), 무능력(無能力, Total Depravity, Inablity) 무조건선택(無條件選擇, 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속죄(制限贖罪, 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은총(不可抗力的恩寵, 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堅忍 끝까지 견딤, Perseverance of the saints). 영문자(英文字) 첫 자들을 모르면 튜우립(TULIP)이라는 꽃 이름이 된다. 이 교리(敎理)들은 구원(救援)은 사람의 공로나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全的)으로 하나님의 은혜(恩惠)의 역사(役事)임을 강조한다.

알미니안주의자(Arminianists)5대 항론(Remonstrance)1) 인간은 완전 타락하지 않았고 자유의지(自由意志)가 남아 있다(자율구원성) 2) 하나님은 인간의 조건(條件)을 보고 선택하였다(예지예정 및 조건선택) 3)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 속죄(贖罪)는 모든 인류(人類)를 위한 것이다(만인구원(萬人救援)) 4) 성령의 은혜는 충분히 저항(抵抗) 할 수 있다(자유의지(自由意志)) 5) 구원(救援) 얻은 사람도 잘못하면 구원(救援)을 잃어버린다 (궁극적 구원 실패가능)는 것을 주장한다. 이 신학적(神學的) 사상(思想)을 받아들인 웨슬레(John Weskey)가 감리교(Methodist)를 창설했다. 여기서 감리교(監理敎), 성결교(聖潔敎), 오순절(五殉節), 침례교(浸禮敎), 구세군(救世軍), 순복음(純福音), 그리스도교(Church of christ) 등의 교리(敎理)가 되었다.

개혁주의(改革主義)는 인간은 전적(全的)으로 부패(腐敗)한 존재(存在)이며(6:5, 17,9, 51:5; 3:10),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말한 영적 선(靈的 善)을 행할 수 없다고 주장(主張)한다. 다른 말로하면, 인간은 영적(靈的)으로 죽은 존재(存在)이므로, 자신의 힘으로는 예수를 믿을 능력(能力)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전적으로 부패(腐敗)한 인간이어서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창세전(創世前)에 선택(選擇)하셨다(1:4). 이 선택은 선행(善行)을 조건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한 은혜(恩惠)의 선택(選擇)이다.

그리고 성자(聖者)는 성부의 택함을 받은 죄인들을 위하여 인간이 되시고,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十字架)에서 죽으심으로 구속(救贖)을 완성(完成)하신다. 이것은 피택자(被擇者)에 국한된 구속이다(1:21, 10:14, 20:28). 제한속죄(制限贖罪)가 아니면 하나님의 선택(選擇)은 무의미하다.

칼빈(John Calvin)은 이 선택교리(選擇敎理)에 대하여 다른 칼빈주의자(Calvinist)들보다 더 신중(愼重)하였다. 그는 모든 영역(領域)에서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높였고, 구원과 관련하여서도 높였지만, 그가 기독교강요(基督敎綱要, 라틴어: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영어: 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에서 구원의 문제를 다루기까지는 선택교리(選擇敎理)를 충분히 논하지 않았다(Inst. III. 21~24).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選擇)이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救贖使役)만으로 완성(完成)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타락(墮落)한 죄인(罪人)들을 회복(回復)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는 피택자(被擇者)에게 그리스도의 순종(順從)과 죽음을 적용시키는 성령(聖靈)의 중생(重生)시키시는 역사(役事)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구원의 국면을 우리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 은혜(恩惠)라는 말로 표현한다. 어거스틴(St. Augustine)은 이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고 또한 즐겨 사용하셨다.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성령(聖靈)께서 죄인(罪人)을 구원하시는데 결코 실패(失敗)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 즉 성부(聖父), 성자(聖者), 성령(聖靈)은 죄인(罪人)을 구원(救援)하시는데 다 같이 참여(參與)하신다. 성부 하나님은 만세 전에 구원할 자를 미리 선택(選擇)하셔서, 그의 백성을 성자 하나님에게 주시고, 성자 하나님은 때가 되어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의 구속(救贖)을 완성하신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위에서 말한대로, 선택된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사역(救贖使役)을 적용(適用)하여 저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救援)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한 죄인(罪人)을 구원(救援)하시는데 얼마나 놀랍고 감격(感激)스러운 은혜(恩惠)인가!

 

4) 하나님나라와 세상에 대한 견해(A view of God's kingdom and the world)

개혁주의(改革主義)의 넷째 특징(特徵)은 하나님나라와 세상(世上)과의 관계(關係)에 대하여 적극적(積極的)이며 긍정적(肯定的)인 견해(見解)를 가지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하나님나라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견해는 늘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개혁파 신학자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똑같은 '문화적 명령'에 대한 인식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개혁파(改革派)의 신학적(神學的) 전통(傳統)은 최선(最先)을 다하여 세계의 형태와 문화에 대하여 큰 관심을 표시해 왔다. 물론 세상과 일치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세상을 변혁(變革)시킨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하였다.

우리는 이 사실이 칼빈(John Calvin)에게서 아주 강하게 나타났음을 보게 된다. 제네바(Geneva)에 있어서의 칼빈(John Calvin)의 관심은 복음(福音) 선포(宣布)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으로 훨씬 더 넓은 것이었다. 확실히 복음의 선포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와 국가(國家)의 생활(生活) 전반(全般)에 관련(關聯)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개혁주의(改革主義)는 사회를 매우 중요(重要)하게 생각하며, '문화적(文化的) 명령(命令)'에 대한 높은 인식을 갖고 있다. 문화적 명령에 대하여 논할 때, 기본적으로 지적되는 성경(聖經)구절(句節)은 창세기 128절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God blessed them and said 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earth. Conquer the land Over the fish of the sea, over the birds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s on the earth)."

이 구절(句節)은 생활의 모든 방면(方面)과 경험의 모든 국면(局面)을 하나님의 주권(主權)에 종속(從屬)시키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그것을 요구(要求)할 책임(責任)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상황(狀況)에 대하여도 우리는 관심(關心)을 가진다. 배고픈 자가 배부름을 얻고, 목마른 자가 시원함을 얻으며, 핍박(逼迫)받는 자가 보호(保護)를 받고, 궁핍(窮乏)한 자가 만족(滿足)함을 얻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The hungry claim to be full, the thirsty to be cool, the persecuted to be protected, and the needy to be satisfied).

개혁주의자(改革主義者)는 다음 말씀과 같이 매우 강한 신앙(信仰)을 고백(告白)한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The earth, its fullness, the world, and all that dwell in it, belong to the LORD(24:1)." 그리고 하나님은 한 순간(瞬間)이라도 세계를 자신 밖의 어떤 세력에도 내어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개혁주의자(改革主義者)는 믿는다. 이것이 바로 일반사회에서 사회악(社會惡)과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위범(違犯)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 없다는 이유가 된다.

우리는 임신(姙娠) 중절(中絶)의 그 무서운 악(), 도처에서 볼 수 있는 도덕적(道德的) 부패(腐敗), 권력(權力)에 짓밟힌 가난하고 불행(不幸)한 사람들, ()하고 무력(無力)한 사람들에 대한 핍박(逼迫)에 대하여 반대(反對)하는 것이다. 분명히 사회변혁(社會變革)은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도 복음(福音)의 선포(宣布)와 개인(個人)의 중생(重生)에서 분리(分離)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든가, 복음(福音)을 증거(證據)하지 않거나, 영향력(影響力)을 행사하지 않거나, 비전(Vision)을 가지지 않거나, 또는 부흥(復興)과 개혁(改革)이 늦어지는데도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교훈적(敎訓的) 의지(意志)를 수행(隨行)하도록 부름받지 않은 자처럼 생각한다든가 하는 것은 매우 큰 잘못이다.

만사(萬事)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主權)에 속해있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마치 하나님에 대해 자신의 의무(義務)를 혼자 수행(遂行)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Christian)이 자기 혼자만 살아가는 개인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聖經的)인 신앙의 삶에서 타락(墮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은 그 특성(特性)이 악하고, 또한 온 세상이 악한 자 안에 처해 있으나(요일5:19), 우리는 세상을 대항(對抗)하여 싸우는데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개혁주의자(改革主義者)들은 폭군(暴君)에게 도전(挑戰)했고 또한 그들을 넘어뜨렸다.

낫소의 윌리엄((William of Nassau), 오랜지 공(the Prince of Orange), 존 낙스(John Knox), 존 파임(John Pym), 올리버 크롬월(Oliver Cromwell) 리쳐드 카메론(Richard Cameron), 스코틀랜드의 언약론자(the Scottish Covenanters), 그리고 존 위더스푼(John Witherspoon)등 이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世上)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유산(遺産)이며, 이 세상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Christian)으로 살아가며, 어떻게 신앙(信仰)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를 우리는 그들에게서 배우게 된 것이다. 우리는 어두움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폭군(暴君)의 광포(狂暴)도 우리에게 공포(恐怖)를 주지 못한다. 우리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니 어째서 무서워하겠는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In the world ye shall have tribulation: but be of good cheer; I have overcome the world(16:33)."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The kingdom of the world becomes the kingdom of our Lord and of Christ, and he reigns for ever and ever(11:15)."하게 될 그 날을 향하여 열심히 일해야 할 것이다.

개혁주의(改革主義)는 바울(Paul)과 어거스틴(Augustine)을 거쳐 16세기 칼빈(John Calvin)과 그의 사상의 추종자들(Followers of his thoughts)에 의하여 체계화(體系化)된 사상(思想)운동(運動)이다. 개혁주의(改革主義)는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강조하고, 이 근본원리(根本原理)에 따라 모든 문제들(정치(政治), 경제(經濟), 사회(社會), 문화(文化), 체육(體育), 예술(藝術), 신학(神學)을 풀어 나가려고 노력(勞力)한다. 성경은 교훈의 건전(健全)성과 관련 있는 균형(均衡)을 중대시하고 있다(딤전1:9; 6:3; 딤후1:13). 예수그리스도의 교회(敎會)는 당연히 하나님의 주권(主權)과 성경(聖經)의 권위(權威)를 강조(强調)하며, 하나님의 문화적(文化的) 명령에 대한 깊은 인식(認識)을 가지고 지상(地上)에서 하나님 나라 건설(建設)에 힘쓰는 운동(運動)에 동참(同參)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