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로빈슨(John. A. T. Robinson 1919년5월16-1983년12월5일)
존 로빈슨(John A. Robinson)은 영국의 신약학자이며 런던 남쪽에 있는 울위치(Wool-wich) 성공회 감독이었다. 그는 캠브리지 대학(트리니티)에서 교수와 학장을 했다. 로빈슨은 자유주의 기독교 신학을 형성하는데 영향력을 강하게 주었다고 평가한다. 하바드 대학의 신학자 하비 콕스와 더불어 세속화 신학의 분야의 거두였으며, 윌리암 바클레이 처럼 보편 구원론을 믿는자였다.
로빈슨은 주장(主張)하기를 하나님이란 말로 형언(形言)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위한 존재(存在)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여기 ‘다른 사람을 위한다’는 말이 바로 ‘세속(世俗)’을 의미한다 하겠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 표현을 위해 하나님의 영역에만 있어서는 안되고 세상의 영역으로 세속화(世俗化)되셔야 한다는 것이다. 로빈슨(John A. Robinson)은 천상(天上)에 계신 하나님의 개념(槪念)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개념이고 무의미(無意味)하다고 한다. 새롭게 된 기독교인(基督敎人)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시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라 한다. 그리고 교회와 세계간의 선(線)은 지워져야 한다고 한다.
그는 교구의 감독으로 있으면서 「신에게 솔직히(Honest to God)」 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다. 신학 서적임에도 불구하고 책이 출간되자마자 수십만 권이 팔렸을 정도로 대단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책이다. 그가 이 책에서 다루는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 또는 이미지에 관한 것이다. 그가 보기에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신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저위에’ 또는 ‘저밖에’ 있는 존재로 자신이 창조한 세계 위에 도는 그 너머에서 우리 위에 군림하는, 심지어 백발의 노인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현대에는 그러한 신 개념은 들어설 자리가 없으며, 그런 신 개념을 계속 고수한다면 오히려 신앙에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로빈슨에게 있어서 신학적 교사는 주로 세 사람이었다. 첫째는, 기독교의 메시지를 "비신화화"하여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에 적응시킬 것을 주장한 불트만(Bultmann)이다. 불트만은 기독교는 구태여 신화적인 용어를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그는 “신화적인 세계관 자체는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학 이전 시대의 우주관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역사적 사건의 참된 차원과 깊이의 중요성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다.”라고 주장하는 불트만(Rudolf Bultmann)의 ‘비신화화’ 개념을 통해 이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둘째는 "종교성 없는 기독교"를 강조한 본회퍼(Dietrich Von hoeffer)이다. 본회퍼는 기독교는 구태여 종교적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로빈슨은 신학을 대중화시키고 신학의 이해를 현대화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본 회퍼(Hoefer)는 “우리와 신의 관계는 ‘신의 존재’에 참여함으로써 생기는, 남을 위한 새로운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초월적인 성격은 우리의 손이나 힘으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어떤 과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 있는 ‘너’ 안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셋째는 하나님이 "궁극적 관심의 대상이자, 존재의 지반"임을 강조한 틸리히(Paul Tillich) 였다. 틸리히는 기독교가 구태여 초자연주의라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로빈슨이 말하는 신 개념은 ‘저밖에’ 있는 투영이나 하나의 타자가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의 기반(Ground)이라는 것이다. 신은 이 세계의 여러 존재자들 중에 가장 우월한 존재 또는 최고의 존재라고 이해하는 전통적 형이상학적 신 개념은 신화적 사고 방식에서 유래한 것이며, 이제는 그 효용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은 존재자들 중의 가장 탁월한 존재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이며, 존재의 기반이라는 것이다. 틸리히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삶의 깊이를 아는 사람은 신을 아는 것이다.”
로빈슨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초월자가 아니라 개인의 진지한 확신의 영역에 속하며 궁극적 실재를 받아들이는 자신의 인식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들은 전통적인 기독교는 세계 대전을 막지도 못했으며, 전후 시대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지도 못했다고 평가했다. 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이해된 하나님은 현대인에게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신학적 관심을 저 세상적이고 초자연적인 것으로부터 이 세상적인 일이나 사건에로 전환했다.
따라서 세속화의 문제가 20세기 후반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되었으며, 이러한 세속적인 관심과 사고에 기초하여 형성된 신학이 세속화 신학이다. 그리고 세속화 신학이 일어난 것은 1950년대 후반이었으나, 대중들의 관심을 끈 것은 1960년대 중반이었다. 이처럼 60년대 후반의 서구 신학은 전반적으로 세속화로 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세상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유신론의 종말(The end of theism)
"로빈슨은 유신론에 종말을 고했다. 자연신론에서는 신은 최고의 존재, 거대한 건축가로서, 로빈슨의 표현을 따르면, 마치 세계 밖의 저쪽 어둔 곳에 존재하여 세계를 움직이게 하고 세계의 운동에 관심을 둔다. 그러나 유신론은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관계는 충분히 인격적이고 자연신론자들이 말하는 바, 멀리 있는 기계 조작자의 관계가 아니라는 데 있다. 신은 인격으로서 그가 만든 세계로부터 이 세계를 내려다보고 "저 밖"에서부터 사랑하는 신이다. 그는 공간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사물의 총체 위에, 그리고 사물을 넘는 떨어져 있는 존재로서 증명하고 확인되어야 하는 "하나의 존재"이다. 이것이 유신론자들이 믿는 신 개념이다. 그러나 로빈슨은 이러한 신을 포이에르바하와 같이 하나의 투사로 보았다. "거룩한 소재는 지성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 속의 한복판에 있으며,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이웃을 위한 봉사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크리스챤의 생활은 세속적 성결의 삶이요, 역으로 거룩한 세속의 삶이라고 역설한다. 그런 의미에서 포이에르 바하가 신학을 인간학으로 만든 것에 대해서 정당하다"고 말한다.
이처럼 로빈슨은 틸리히를 따라서 유신론의 종말을 고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을 세계와 인간을 넘어서 살고 있는 하늘의 완전한 인격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로빈슨에 의하면 오늘날의 언어학자들이 투쟁하고 있는 것도 여전히 이러한 '한 존재'의 존재 또는 비존재에 대한 문제, 즉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신을 믿는 유신론에 대해서이다."
존재의 깊이로서의 신(God as the depth of existence)
로빈슨이 정통적인 기독교 유신론에 종말을 고한 것은 새로운 신의 형상을 주기 위해서였는데, 로빈슨은 그것을 틸리히의 '깊이'의 개념으로 대신하고 있다. 틸리히에 있어서 신은 "임기 응변책으로서의 신", "초자연적 존재", "밖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본회퍼의 말과 같이 우리의 삶 한복판 가운데에서 '초월해' 있다.... 왜냐하면 신이란 말은 "모든 우리의 존재의 궁극적 깊이, 모든 우리의 실존의 창조적 근거와 깊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로빈슨이 "위에 계신 신" 이나 "밖에 계신 신"이 표현하려고 한 것은 신의 초월의 개념이었다. 그러나 로빈슨은 신의 초월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오히려 틸리히와 같이 초자연주의와 자연주의를 넘어선다. 신의 자연적 요소는 위에나 밖에가 아니라 "한가운데에서 초월해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있는 초월"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초월자의 인식은 다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가능한데 이웃에 대한 봉사와 사랑의 행동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인 로빈슨의 신 개념의 특징이다.
우리 가운데 현존하는 초월자: 그리스도(The Transcendental Being Among Us: Christ)
로빈슨은 본회퍼를 따라서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 현존하는 초월"이라는 개념을 가진다. 그에 의하면 일반적 초자연주의적 그리스도론은 항상 '저 세상적'이 지배적이었고, 전통적 그리스도론은 신이 밖으로부터 인간 세상에 와서 인간과 '비슷하게' 살았다는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비슷하게 보거나 순전히 인간이었다고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초자연주의적인 해석과 자연주의적 해석을 모두 거부하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고 그의 말씀이라고 한다. 즉, 로빈슨은 케노틱 그리스도론 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을 만족스럽게 관계시킬 수 있는 소망을 주는 유일한 입장이라고 믿는데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의 복종'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비신화적인 것으로 비판하면서 그것을 실존적, 윤리적으로 재해석한다. 그것은 첫째로, 예수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는 뜻이다. 즉 예수는 '타자를 위한 인간'이다. 둘째로, 예수의 처녀탄생의 뜻은 로빈슨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 완전한 신', 기름과 물의 혼합이거나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의 혼합이 아니고 '우리 속에 있는 초월자', '사랑의 초월'의 복종을 통한 구체화이다.. 로빈슨은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신"으로 해석한다. 셋째로, 속죄론을 비신화화 한다. 그에게 속죄론이란 초자연주의적 사고방식에서와 같이 고도의 신화적인 것이 아니고 또한 신과 인간 사이의 거래 같은 것이 아니고 또한 신과 인간 사이의 거래 같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로빈슨은 그리스도의 속죄론에 대해서는 초자연적 설명이나 자연적 설명을 다 부정하고 제 3의 길을 모색한다. 이 제 3의 길을 그는 신론에서와 같이 틸리히의 '실존과 그리스도', 인간의 소외론에서 현대인에게 의미가 있는 그리스도의 속죄론의 새로운 모습을 가지려고 한다.
예배와 기도의 비종교적 이해(Secular understanding of worship and prayer)
로빈슨은 실제적으로 예배와 기도, 다시 말해서 교회 생활의 비종교적 해석 또는 세속적 해석을 시도한다. 그에게 거룩의 의미는 상대화되어 설명되는데 이제는 "거룩의 장소가 지성소가 아닌 세상의 한복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천국이란 지역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자기 존재의 기반과 하나이 되는 것이 곧 천국이라고 했다. 이렇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천국의 실재성을 일관적으로 부인하고 이 모든 것을 다만 상징적으로, 그리고 상대적으로만 이해하여야 된다고 한다." 이처럼 로빈슨에게 있어서 예배의식은 그리스도인에 있어서 하나의 종교의 의식이 아니라 세속적인 것 안에 그것과 같이 그리고 그것 아래서 일어나는 거룩의 선포, 고백, 예배이다. 그리고 기도의 중심은 전통적으로 "떠남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로빈슨에게 있어서 기도는 "기도는 우리의 일상생활 어디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우리의 생활 그 자체가 수도원이 되어야하고, 그 속에서 선으로써 악을 이기는 증거와 고백의 활동이 '시간을 속량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한다. 중세는 '부정의 길'을 완전의 길로 보았지만 로빈슨은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의 떠나감이라기보다는 세상을 통해서 하나님으로 침투하는 것이 성육신의 빛에서 본 기도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자신을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로빈슨이 혁명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기도의 비종교적 이해의 출발점이다. 이처럼 로빈슨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세상에서 떠나야 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기도'는 그룹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할 것이 아니라 세상, 역사, 날마다의 삶을 진지하게 성육신의 장소로 취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윤리의 새로운 이해: 상황 윤리(A New Understanding of Ethics: Situational Ethics)
로빈슨에 의하면 그리스도교가 전해온 전통적 도덕은 초자연적인 사고 방식의 윤리적 영역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것이 과거에는 교회를 봉사했지만 오늘날에는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자연적 윤리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비판은, 그것이 예수의 교훈을 왜곡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마태복음의 예수의 도덕적 명령은 "모든 사람은 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모든 상황에서 해야하는, 모든 사람에게 미리 규정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로빈슨의 혁신적 윤리는 틸리히를 따라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를 넘어서 '신율의 윤리'를 지향한다. 신율적 윤리는 로빈슨에 의하면, 틸리히가 시사한 바 종말론적 윤리를 말한다. "변화된 세계의 윤리는 카이로스, 즉 하나님께 주어진 운동의 윤리로서, 시간적인 것 속에서 영원과 만나는 것을 매개하는 카이로스의 윤리로, 이해되어야 한다. 카이로스에서 카이로스로 자신을 실현하며 사랑은 절대윤리와 상대적 윤리의 양자 택일을 넘어가는 윤리를 강조한다. 이처럼 로빈슨의 혁신 윤리는 상황 윤리를 지향한다. 그리고 이 상황 윤리는 사랑 이외에는 아무 것도 명령하지 않는다. 마치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이다.
초자연주의와 자연주의를 넘어서(Beyond Supernaturalism and Naturalism)
그리스도교는 초자연적인 요소와 자연주의적 요소를 다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양자와는 동시에 구별된다. 어떻게 그리스도교는 초자연주의나 자연주의로 일방적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에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를 그리고 오늘 현대적 사고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떻게 자연주의와 휴머니즘에 빠지지 않고 초자연주의를 부정할 수 있을까? 어떻게 범신론에 빠지지 않고 창조의 하나님을 주장하는 자연신론과 유신론을 부정할 수 있을까? 에 대해서 로빈슨은 대답하려고 했다. 로빈슨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초자연주의를 부정하는 데 있어서 문제는 그것이 내재의 신학 또는 범신론을 결과하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범신론은 독립적 존재로서의 신의 존재를 문제로 삼는 신 개념의 재구성에 그 열쇠가 있기 때문이다. 로빈슨은 초자연주의를 부정하면서 동시에 자연주의를 극복하려고 한다. 그는 헉슬리와 본회퍼의 관계와 구별에서, 그리고 까뮈와 본회퍼의 관계의 구별에서 해결을 찾는다. 헉슬리는 그의 [그리스도교와 자연주의]에서 "초자연주의의 종말은 계시 없는 종교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논쟁점(Controversy)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와 하비 콕스의 [세속 도시]는 1960년대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로 로빈슨의 사상의 급진성과 혁명성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다. 둘째로, 로빈슨이 출발점으로 삼았던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논란이 되었다. 그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신관이 낡은 세계관에 기초한 것으로 성인이 된 현대인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보고 심층 심리학에 근거한 새로운 신관으로 바꾸려고 했다. 이것은 인격적이고, 초자연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포기였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초자연성과 초월성을 거부하는 로빈슨의 기독론이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 외에도, 예배, 기도, 윤리학 등에 대한 그의 급진적인 해석이 논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