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대신학(Modern theology, Contemporary theology)의 배경(背景)
현대신학의 학문적, 사회적 배경으로 우리는 17세기 말에서 시작해서 한 세기동안 유럽을 휩쓸었던 계몽주의(啓蒙主義, Enlightenment)를 들 수 있다. 계몽주의는 인간의 것이 들어갈 여지가 없었던 교회(구·신교)의 통치(統治)와 권위(權威)로부터 나와 인간의 것으로 깨우쳐진(Enlightened)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중심이었던 세계관(世界觀)이 인간 중심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인간의 지적(知的), 도덕적(道德的) 능력이 높게 평가되기 시작했고, 상대적(相對的)으로 교회의 권위(權威)가 축소(縮小)되기 시작했다. 이것을 달리 표현(表現)하면 인간의 ‘이성(理性)’이 ‘계시(啓示)’를 대신하였고 자연주의(自然主義, Naturalism)가 초자연주의(超自然主義, Supernaturalism)를 대신(代身)했다는 것이며, 교회의 가르침이나 성경(聖經)이 인간(人間)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이성(理性)이 종교적(宗敎的) 교리(敎理)나 계시(啓示)를 살피고 검증(檢證)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계몽주의(啓蒙主義)가 전적으로 반(反)기독교적(基督敎的) 혹은 반(反)유신론적(有神論的)으로 시작했으며 진행(進行)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기독교적(基督敎的)이었으며 유신론적(有神論的)이었다. 그래서 어정쩡한 이신론(理神論, Deism)이 나온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認定)하되 더 이상 인간의 이성(理性)을 다스리는 신이 아니라, 인간(人間)의 이성과 그 이성이 다스릴 세계(世界)를 허락(許諾)하고 이제 더 이상 상관(相關)하지도 상관할 수도 없는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계시(啓示)보다 이성(理性)이 우월(優越)한 위치를 차지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자연신론(自然神論)을 기독교내에 존재하면서 초자연적(超自然的)인 것을 부인(否認)하고 계시(啓示)를 부정하는 현대 신학자들의 모태(母胎)적 양상(樣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계몽주의(啓蒙主義) 사상의 기초(基礎)를 놓은 대표적(代表的) 인물은 아마도 수학자(數學者)이며 철학자(哲學者)였던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일 것이다. 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이성의 우월(優越)성을 잘 나타내 보이는 말이다.
즉, 인간의 이성이 무엇인가를 의심(疑心)할 때 (여기 데카르트가 말하는 cogito는 의심 내지는 비판(批判)의 의미가 들어있다) 그 의심의 주체(主體)인 인간의 존재가 확인(確認)된다는 것이다. 이제는 신적 계시가 아니라 이성(理性)이 인식론적(認識論的) 출발점(出發點)이 되었고,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주체가 존재론적(存在論的) 출발점이 되었음을 알리는 말이다.
계몽주의(啓蒙主義)는 이런 사상적(思想的) 변화(變化)뿐만 아니라 과학적(科學的) 변혁(變革)에 의해 그 힘을 한층 더 싣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지구(地球)가 우주(宇宙)의 중심(中心)이 아니라는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의 발견이 기존의 중세시대(中世時代)의 우주관(宇宙觀)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평평한 지구를 중심에 놓고 위에는 천국(天國)이요 밑은 지옥(地獄)이라고 가르친 교회의 권위는 추락(墜落)했었다.
이렇게 시작한 과학(科學)의 존재는 바로 교회(敎會)의 권위(權威)를 부정하는 근거요 인간 이성의 우월(優越)성을 나타내는 상징(象徵)이 된 것이다.19세기 역사학자(歷史學者)이자 시인(詩人)인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는 당시 계몽주의(啓蒙主義) 시대의 과학의 발달(發達)과 교회의 관계(關係)를 다음과 같이 풍자했다. “자연과 자연의 법칙(法則)들이 밤 속에 숨어 있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뉴톤(Newton)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 이러한 풍자(諷刺)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과학의 존재가 어떠했으며 교회가 얼마나 초라해졌는가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계몽주의(啓蒙主義)와 과학의 발달이 인간 문명(文明)과 삶의 질에 진보(進步)를 가져왔다고 낙관(樂觀)했을지 모르나, 사실은 그때부터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필요로 하지 않는 또 다른 암흑시대(暗黑時代)에 돌입하게 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을 인지(認知)하지 못한 것이다. 자연(自然)에 대한 깨달음이 또한 과학의 작은 발전이 하나님을 대적(對敵)하게 된 것은 마치 아버지가 인터넷을 모른다고 아버지 권위(權威) 자체를 무시(無視)하는 어리석은 아이의 행실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19세기 초 현대신학(現代神學)이 태동(胎動)하기에 아주 적합한 환경(環境)으로 무르익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 적합(適合)한 환경으로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자율성(自律性, Autonomy)’이다. 이제는 인간 외에 어떠한 외부의 권위(權威)나 기준에도 순복(順服)하지 않고 인간 스스로가 법이 되었다는 것이다. 진리(眞理)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인간을 자유케 할 것으로 착각(錯覺)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이 최종(最終) 준거점(準據點, Reference-point)이 되었다는 것이다. Theonomy(God-law)가 아니라 Autonomy(self-law)가 된 것이다. 둘째로 ‘이성’이다. 물론 헬라 철학(哲學) 이후부터 시작해서 이성이 중세시대(中世時代)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계몽주의(啓蒙主義)의 이성은 주어진 질서(秩序)와 원리(原理)에 부합(附合)하는 이성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분별하고 판단(判斷)하는 이성이었다. 즉, 하나님의 계시의 자리를 차지한 이성(理性)이었다. 자연과 인간의 세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도 다스리는 이성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자율성(自律性)과 이성은 바로 현대신학(現代神學)이 태동하기에 아주 적당한 온도와 습도가 된 것이다.
현대신학(現代神學)을 잘 살펴보아야 할 두 가지 큰이유가 있다. 첫째, 소위 ‘자유신학(自由神學)’ 이라고 명명되는 ‘현대신학(現代神學)’이 어떻게 성경적(聖經的) 정통(正統)에서 벗어난 지를 발견하기 위한 것이고, 둘째로, 현대신학(現代神學)이 어떻게 그 당시 처해 있던 상황에 대한 물음에 (현대 신학자(神學者)들 자신이 가졌던 물음들을 포함하여) 답하려 했는가를 살핌으로 그 오류(誤謬)에 빠지지 않고 우리들의 물음에 관한 답을 성경(聖經) 안에서 찾고자 하는 데 있다. 이러한 두 가지 큰 이유를 토대로 우리가 현대신학에 관심을 두어야하는 이유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현대 신학은 우리 기독교(基督敎)가 지켜왔던 정통신학(正統神學)에 큰 도전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신학을 부정하고 우리가 지니고 있는 신앙을 부인한다는 것은 보수신학(保守神學)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첫 번째와 비슷한 이유로, 현대신학(現代神學)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방해(妨害)하고 신앙의 순수성(純粹性)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현대신학(現代神學)은 사탄적 요소가 있기 때문에 성도들을 혼란(混亂)케 하며 그들의 믿음을 흔들 것이다. 셋째, 우리의 성숙(成熟)된 신학과 신앙의 테스트가 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평신도(平信徒)들은 현대신학을 대함에 있어서 조심(操心)해야 한다는 의미이며, 현대신학에 관심을 둠으로써 우리들의 신학과 신앙을 재점검(再點檢)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 보수진영(保守陣營)이 자유진영(自由陣營)으로부터 많이 받는 비판(批判)으로서 마치 우리가 지적능력(知的能力)이 부족해 현대 신학을 이해 못한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이다. 어려운 철학(哲學)이나 사상을 논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성경만을 이야기하고 영성(靈性)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자(保守主義者)들을 마치 지적 수준이 낮아 그런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서라도 현대신학(現代神學)에 관심을 갖고 비판(批判)할 줄 알아야 한다. 다섯째, 현대신학으로 인해 성도(聖徒)들 (특히 지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성도들)이 혹 가질 수 있는 보수신학(保守神學)과 신앙에 관한 도전(挑戰)과 의문을 치유(治癒)하기 위해서이다. 여섯째, 현대신학은 보수주의(保守主義) 보다 우리가 처해 있는 현 상황(狀況)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우리는 현 상황의 신학적(神學的) 문제가 무엇이고 고민(苦悶)이 무엇인지를 현대신학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물론 현대신학의 답은 틀린 답이다. 그러나 우리도 문제를 알아야 대안을 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신학은 우리의 신학적(神學的) 관점(觀點)을 깊게 만들어 준다고 하겠다. 일곱째, 현대-자유주의(自由主義)자들도 우리의 전도(傳道) 대상(對象)이 된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指摘)해 주며 그들에게 올바른 신학(神學)과 신앙(信仰)의 길을 제시(提示)해야 의무(義務)와 책임(責任)이 우리에게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현대신학(現代神學)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