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다원주의(宗敎多元主義, Religious pluralism)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나 타종교간의 대화 문제는 최근에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포스트모던 시대(Postmodern era)에 들어와서 어느 때보다 더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종교 다원주의는 사회적으로 종교현상을 보는 입장의 하나이다. 각 종교의 신앙과 수행의 특성을 인정하며 특히 기독교 입장에서 배타주의(排他主義, Exclusivism)와 포괄주의(包括主義, Inclusivism)에 대한 반대 입장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현대사회에 있어서 종교간 대화의 접근태도에는 배타주의, 포괄주의, 그리고 종교다원주의를 들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 중 하나는 어떤 한 가지 절대적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한 종교의 절대적 진리란 있을 수 없고, 한 종교의 고유의 의미란 없고, 다른 종교들이 따라야 할 초 설화적 혹은 초 신학적 가르침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유일성 혹은 하나님 되심은 종교 다원주의의 No. 1 인 것이다. 한마디로 다원주의는 어떤 동질성(Consensus)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질성(Dissensus)을 인정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Tolerance)을 주창하는 것이 종교 다원주의인데 이 관용이란 한 쪽 편에서 다른 쪽을 관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관용된다는 의미이다.

중세 이후 서구 제국주의 시대인 15~16세기 신대륙 발견에 대한 열망은 제국주의의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표출되었으며, 식민사회에 서구 기독교를 전도(Mission)하려는 강한 정책적 제국주의의 식민 정책에 부응했다. 기독교의 복음전파(Mission)는 타종교와 타문화에 대해 배타적이며, 일방적인 자세를 견지했으며, 현재까지도 대체적으로 지속되고 있다. 17~18세기 영국이 인도를 점령하고 지속적으로 동양문화와 종교전통을 서구 기독교 사회에 소개되면서 비교종교학적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에릭 샤프(E.J.Shape)19세기 말의 서구의 종교 상황은 오직 계시된 진리에만 의거하여 심판하는 풍토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몇몇 사려 깊은 철학자나 신학자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종교를 오직 계시된 진리에만 의거하여 심판하는 풍토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로마 가톨릭의 경우에는, 1302년에 교황 보니파체 2(Boniface II)가 해설한 이후 15세기 플로렌스 공의회(The Council of Florence)에서 확고해진 바 있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금언에 바탕해서 기독교 이외의 종교는 물론이고 기독교 내의 다른 종파들에까지도 배타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정배는 19세기 말 역사주의(Historismus)의 등장은 기독교 종교의 절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 것으로 본다. 그는 역사주의는 세계 내의 어떤 종교도 역사 밖에서 태동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서, 이는 연역적, 도그마적, 계시 중심적인 기존의 신학체계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기독교를 역사주의의 선상에서 적극적으로 이해하려는 대표적 인물은 트뢸치(Ernst Troeltsch, 1865-1923)로 여긴다. 신적 계시를 중요시하는 기독교의 경우도 역사주의를 떠나서 논의되는 신학은 비학문적으로 평가되었으며, 기독교의 역사적 전개과정과 역할은 타종교와 비교했을 때, 우위성은 확보할 수 있으나 절대성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요지이다. 역사주의를 전제로 한 기독교의 역사적 상대주의는 기독교 내의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20세기 초반 기독교적 포괄주의(Inclusivism)를 출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H.카워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3~1965), 웁살라 세계교회협의회(1968) 등이 포괄주의를 표방한 신구교회의 대표적 모임이라고 보고 있으며, 한스 큉(독일어: Hans Küng , 1928319~)은 스위스의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이자 저명한 기독교 신학자, 종교의 평화로운 공존과 상호 존중을 주장하는 에큐메니즘 신학자) 또한 불가해한 신 체험을 갖고 있는 역사적 예수가 모든 다른 규범(종교)들을 위한 규범이 될 수 있다고 함으로써 가톨릭적 포괄주의 노선에 충실하고 있다고 여긴다. 특히, 20세기 최고의 로마 가톨릭 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 독일 출신의 로마 가톨릭교회 예수회 사제이자 신학자)는 독실한 유태교인, 이슬람교인, 힌두교인, 또는 기타 종교인들을 익명의 그리스도교인(An anonymous Christian)’으로 간주하는 기독교의 포괄주의를 강조했다. 그는 예수는 그리스도가 맞지만 그리스도는 오직 예수만이 아니다. 타 종교들도 초자연적인 은총의 요소가 있고 구원이 있다. 하나님은 기독교를 능가하는 크고 위대한 분으로 구원은 예수로 제한되지 않는다.” 라고 했고,

라이문도 파니카(Raimundo Panikkar; 스페인 출신 로마가톨릭교회 신자 어머니와 인도의 힌두교 신자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로마가톨릭교회 사제)그리스도는 힌두교에도 현존하고 있다.

다양한 종교들은 말씀이신 로고스의 현존이다. 예수, 석가, 공자, 마호멧도 로고스의 구체적인 성육화(成肉化)의 결과이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맞지만 예수 외에 힌두교의 라마, 불교의 석가, 이슬람의 마호멧 등 인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타 종교를 적대시하거나 개종시키려는 개종전도 행위는 용납 되어서는 안 된다. 라고 했다.

폴 리터(Paul F. Knitter 1936년 생. 미국 유니언 신학교 교수)는 기독교는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따위의 주장을 버리고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사랑하고 구원하신다는 것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 예수 외에도 하나님에게 이르는 다양한 길들이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은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예수를 꼭 믿어야 할 이유가 없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불교인에게는 선()에 전념하라고 권해야 하고, 힌두교인에게는 섬기는 신들을 더욱 잘 섬기라고 해야 하고, 이슬람인에게는 코란과 알라에 더욱 충성하라고 총고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보편적이며 포괄적인 구원 의지와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보편성을 긍정하려는 체계적인 노력을 경주한 것이다. 교회 밖의 구원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칼 라너는 선량한 수많은 비종교인과 타 종교인들이 하나님의 권속 안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교회 밖의 타 종교인을 익명의 그리스도교인이라 함으로써 구원의 대상으로 설정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서구 기독교 중심으로 본 세계관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다. 다원주의와 연계된 최근의 아시아 신학은 유태교적, 서구적 인식의 하나님을 동양의 시각에서 새롭게 보려고 한다.

송천성(중국인 신학자), 성령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아시아적 가치를 염두에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가 서구 밖의 다른 종교문화와 만났을 때, 기독교는 복음이라 불리는 새로운 술은 기독교와 관련 없는 종교문화의 헌 술 포대에 담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대부분 그들을 거절했다. 아시아에 있는 대부분의 교회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리고 반드시 추가할 것은, 신학교와 세미너리에서 가르친 대부분의 기독교 신학이 아시아의 종교문화에 대하여 이러한 부정적인 태도를 받아 들였다. 이것이 왜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그것들이 변칙적인 것, 정도에서 벗어난 것, 또는 부적당한 요소들인 것처럼 그들과 씨름을 계속해야 하는지의 이유이다.

그러나 아시아 신학도 자체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구원이 교회 밖에 있음의 가능성을 적극 전개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의 권위를 강조하게 될 때,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것은 정당화된다. 한국사회에서, 감리교의 변선환 목사(전 감리교신학대 교수)교회 밖에 구원이 있다고 강변하다가 자신의 교단으로부터 퇴출된 사례는 교회내의 울타리가 너무 높게 세워져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종교다원주의는 배타주의와 포괄주의에 대한 반대 입장에 서 있다.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존 힉(John Hick), 파니카(R. Panikkar), 사마르타(Stanley J. Samartha), 캔트윌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종교 다원주의 대표 주자인 존 힉(John Hick)은 기독교의 성육신의 교리야말로 다원주의의 최대의 걸림돌이라고 말한다. 그는 주장하기를 모든 종교가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 즉 신을 추구하고 있다고 한다. 단지 문화적 역사적 배경만 달랐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모든 종교가 정당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예수-중심의 모델에서 하나님-중심의 모델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존 힉은 경건하고 독실한 비기독교인들을 어떤 형이상학적 의미의 기독교인이거나, 또는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알지 못하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적 전개를 긍정하지만, 기독교 중심의 포괄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 각 종교자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책 표제로 인도의 고전인 바가바드기따(Bhagavad-gītā)의 글귀인 인간이 어떠한 길을 택하든 그것은 나에게로 이르는 길이다를 택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존 힉은 기독교의 비신앙인과 타 종교인에 대한 구원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배타주의와 포괄주의가 어느 특정한 종교만이 진리이며, 구원에 이르게 하는 절대적 또는 상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교리체계를 넘어설 것을 요청한다. 존 힉은 세계의 각 종교의 전통은 같은 신성한 존재에 대한 서로 다른 인간의 인식을 대표하며 서로 다른 반응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각 종교의 독특한 전통체계를 중시하려고 했다. 존 힉은 비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전통적 기독교의 긴장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기독교 사상가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 이상의 급진적인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3~65)에서 밝힌 내용은 진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응이지만, 문제의 핵심을 해결하기 보다는 기존의 교리적 체제를 오히려 복잡하게 하는 것으로 보았다. 바티칸 공의회에서 밝힌 내용은 신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의 구원에 대한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인도 신학자 R. 파니카는 힌두교인들을 포함한 타 종교인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보는 것은 기독교적 제국주의 시각이며, 기독교 서구만의 독백구조의 산물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기독교 서구와 제3세계가 주종관계로서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로서의 종교와 종교 간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기독교 자신만의 자문화중심주의에서 다문화중심주의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정배(감신대 교수)는 이러한 종교 다원주의 담론은 탈식민지(postcolonial) 상황 하의 제3세계 민족의식의 발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고 있다. 종교다원주의의 특징은 종교 간의 대화에서 나타난다. 대화는 일방적 교리의 전파가 아닌 쌍방향적으로 이루어진다. 파니카는 현세계는 대화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으며, 대화만이 다원주의, 공존, 민주사회(democracy), 정의와 평화를 만든다고 본다.

종교다원주의는 각 종교의 신앙과 수행의 특성을 그대로 인정하며, 고유한 문화적 배경을 통해 이해하려한다. 배타주의는 자신의 종교만을 유일한 것이라 보고, 다른 종교의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우월주의는 다른 종교의 가치를 부분적으로 인정하지만 가장 뛰어난 진리성과 구원성은 오직 자신의 종교에 있다고 본다. 배타주의와 포괄주의적 성격의 종교가 지향하는 진리와 구원은 오직 자신의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음을 강조하게 된다. 따라서 다른 종교는 대화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종교 간의 협력은 더욱 불가능하게 한다.

결국, 교리의 전파와 구원을 위한 종교적 전도(Mission)는 사마르타(Stanley J. Samartha)가 언급한 것처럼, 어떤 특정한 종교만이 나머지 세계에 파급되어야 하는 일방향적 선언(One-way proclamation)이 되며, 식민지적 연대(Colonial associations)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일방향적 구원관은 종교와 종교의 충돌, 이념과 이념의 충돌, 문명과 문명 간의 충돌현상은 정치적경제적 이권과 맞물려 일어나게 한다.

다종교 사회에서의 종교간 이념적신앙적 갈등은 사회적 갈등을 불러일으키며, 상호 반목과 충돌의 길로 접어들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사마르타는 종교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기독교의 복음전파도 새롭게 이해하려고 한다. “만약 복음전파(Mission)가 창조물의 깨어진 부분을 고치고, 인간성의 부스러진 조각들을 불러 오게 하고, 인간 및 자연, 그리고 신 사이의 갈라진 틈을 고치는 신(God, 신학적인 용어를 쓰자면)의 지속적인 역할로 이해한다면, 협력의 가능성은 환영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윌리암 스미스 (William C. Smith)는 진리란 객관적이 아니라고 한다. 더욱이 진리란 명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어떤 객관적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란 의미는 단지 각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또한 인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주장하기를 종교의 진리 혹은 실재가 무슨 뜻이었냐라는 역사적 질문은 현재의 진리와 실재에 대한 신학적 질문과 다르다고 한다. 즉 역사적 질문을 버리게 되면 참다운 종교 다원주의가 성립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한다. 그는 또 주장하기를 만약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났다면 그것은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게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데이비드 트레이시(David Tracy)는 주장하기를 인간의 모든 지식은 제한적이며 다각적(perspectival)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대화는 이러한 제한적이고 다각적인 특징을 인지한 포스트모던 지식 소통이며 취득 방법이고 대화는 언어와 역사의 애매성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종교가 대화에 있어서 우월한 입장에 있던지 대화를 일방적으로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를 실재로 받아들이고 그 실재를 텍스트로 놓고 대화를 해석의 방편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종교의 해석을 절대적인 것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웨슬리 아리아라자(S. Wesley Ariarajah)는 주장하기를 기독교를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게 보는 것은 영적 테러리즘이라고 한다. 그는 배타적 성경 구절들을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절대적 의미의 진리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니, 단순히 바울이나 성경이 그렇게 말했다고 예수가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이 믿는 기준에 의해 비슷한 주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절대적 주장은 단순히 상대적일 뿐이라고 아리아라자는 주장한다.

사마르타(Stanley J. Samartha)는 종교다원주의가 배타주의와 포괄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역사적으로는 배타주의와 마찬가지로 다원주의도 실패했다고 여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원주의는 현대사회에서 다음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자유, 자아존중, 인간 존엄성을 추구하기 위한 서로 다른 사람들의 생존에 대한 영적이며 문화적인 자원을 제공한다.

종교문화민족언어의 다원성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어떠한 오직 하나의 종교 또는 주의(Ideology)를 부과하려는 것에 대해 저항하기 때문에 파시즘(Fascism)에 대응하는 하나의 확신이 된다.

다원성은 실제와 삶의 방식에 대해 대안적인 비전을 제공함으로써 선택의 요소를 제공한다.

다원성은 오늘날 지구화된 기본적인 문제들을 대응하기 위한 다양한 영적 재원을 제공한다.

길희성(서강대 명예교수)는 종교 모두를 부정하는 세속주의나 한 종교의 언어만을 절대화하는 근본주의가 아닌, 3의 길을 걸으면서 종교 간의 벽을 넘고 성과 속의 경계를 넘나드는 초 종교적 영성을 주장한다. 특히 불교와 기독교 사이의 소통과 화합을 강조함으로써 종교가 초래하는 인간소외의 현실과 종교가 신앙의 이름으로 세속적 욕망을 부추기고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을 억압하고 있는 현실을 넘어서는 대안을 제시한다. 무지와 독선에 근거한 편협한 신앙이 조장하는 현실 종교에 대한 비판을 한다. 그는 다원주의의 다양성을 구체화하여 일원적 다원주의’, ‘다원적 다원주의’, ‘실천적 다원주의라 구별하고 있다. 그는 진정한 다원주의는 종교간의 차이를 끝까지 인정하는 다원주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모두가 같은 산정에서 만날 것이라는 일원적 다원주의와 진리와 구원의 다양성을 전제로 한 다원적 다원주의를 구별한다. 또한, ‘실천적 다원주의종교가 궁극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어떤 이론적, 교리적, 또는 사상적 차원이 아니라 정의와 해방에 헌신하는 도덕적 실천의 차원임을 구체화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다원주의의 성격은 종교협력운동 가운데 하나인 세계보편윤리(Global ethics)의 구상에서도 나타난다. 인류는 각 민족에 따라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종교 또한, 독특한 윤리규범을 독창적으로 가지고 있어 종교마다 긴장과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다. 지구보편윤리의 필요성을 공감 하지만 어떻게 세계보편윤리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질 수밖에 없다. 보편윤리란 보편성을 지녀야 하며, 누구나 지켜야 하는 절대성 내지는 최소한 대다수가 공감하고 지킬 수 있는 틀을 제공하여야 한다.

종교마다 가지는 독특성을 인정하면서 공유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약수를 찾아야 하는 스스로의 한계를 설정하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 종교다원주의(Pluralism)는 종교의 다양한 개체의 현상에 있어서 그 차이점을 그대로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이다. 현재 세계종교 연합기구들이 추구하는 노력은 종교다원주의를 바탕으로 각 종교마다의 독특한 종교문화와 구원관을 인정하면서, 최대공약수를 찾으려는 노력의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점차 다원화되어 가는 현대 세계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존중해야 하는 상황이 종교다원주의를 낳게 하였다. 그러므로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기독교 이외의 종교들에 대한 이해와 존중에 대한 태도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익명의 기독교인'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타종교들 속에 내재한 기독교적 요소를 시인하기 때문에, 예수 중심의 기독교를 하나님 중심으로 전환함으로써 타종교와의 원활한 교류를 시도한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 중심의 종교는 구원 중심적 종교관을 표방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모든 종교에 내재해 있는 구원적 관점에서 서로의 통일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주로 선교적 상황에서 그 필요성이 인식되었다. 그러나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다른 종교들을 인정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기독교 자체에 대한 정체성을 여지없이 흔들어 놓았다.

종교다원주의가 봄을 이루기 시작했고, 일부 신학교에서 종교다원주의 신학이 이미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음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또한 타종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 종교간의 대화에 대한 원칙들이 W.C.C(World Council of Churches)에서 연구되고 문제시되기도 하였다. 다음은 이러한 종교다원주의 신학의 발생 배경과 내용 그 역할과 특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종교다원주의 신학의 발생 배경(Background of Religious Pluralism Theology)

 

1) 현대적 상황(Modern situation)

1993년 세계종교계 대표들이 참석한 미국 시카고 세계종교의회 100주년 기념대회에서 채택된 지구윤리 선언(A Global Ethic)은 인간중심, 실천중심의 종교다원주의 사회를 실현하는 방향을 설정하고 있다. 한스 큉은 세계윤리구상에서 공동의 가치규범태도에 대한 최소의 요구가 있어야 하지만, 종교마다 가지고 있는 독특한 종교윤리와 보편윤리 사이에 긴장과 갈등이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고, 종교마다 가지고 있는 독창적인 종교윤리를 넘어서는 가능한 공감대를 형성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실토하고 있다.

현대 사회의 특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고도 다양하다. 그러나 현대가 다원화된 사회라는 점은 모든 사람의 공통된 인식이다. 생활 영역과 관심은 확대되었고 동시에 지역적 차이라는 것은 축소되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의 관심사와 생활 영역에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심사를 가지고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결과적으로 사람과 문화는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인정해야만 하는 특성을 갖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런 현대적 특성이 종교다원주의 신학이 일어나게 된 근본적인 바탕이었고 이유였다.

 

2) 타종교와의 만남(Meeting with other religions)

옛날에는 자신이 사는 지역이 온 세계의 전부였으나 현대인들은 다양한 인종들과 문화들을 접하게 되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와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현대인들을 두 가지 질문을 가지게 되는데, 그 첫째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다른 종교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나 이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종교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타종교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기독교를 알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의 문제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기 시작한 것이다.

 

2. 종교다원주의 신학의 내용(Contents of Religious Pluralism Theology)

 

1) 익명의 기독교인(An anonymous Christian)

타종교들 속에는 모종의 기독교적 요소와 하나님의 섭리가 깃들어 있다고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간주한다. 보편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일반 종교들 속에서도 나타나며, 하나님께서는 그들 모두를 지옥으로 가도록 놔두시지는 않으셨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모두 영벌에 처해진다는 것은 억울하지 않은가?라는 항변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나온 개념이 '익명의 기독교인'이란 관점이다. 그리스도 이전의 타종교인들은 기독교인으로 불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이다.

 

2) 구원 중심성 이동(Salvation shift)

기독교와 타종교간의 관계를 다루면서 기독교만의 우월성이나 종교적 배타성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종교다원주의 신학자들은 생각한다. 그래서 기독교를 예수 중심적 종교로부터 하나님 중심적 종교로 전환해서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타종교에서는 도무지 예수를 찾아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한계가 있다. 하나님이란 개념이 없는 종교들도 있고 기독교의 하나님과 타종교의 하나님이 과연 같은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나온 것이 구원 중심적 종교관이다. 즉 모든 종교에는 구원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종교는 구원이라는 공통적 요소엣 하나의 근원으로 시작된 다양한 해석이라고 본 것이다.

 

3) 종교의 본질과 공통성(Nature and commonality of religion)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이렇듯이 종교들간의 실제적 차이점보다는 공통적 성격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결과로 종교들을 묶어 주고 하나의 보편성 속에 틀을 잡게 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한 것이다. 결국 종교들간의 차이점이라고 하는 것은 구원에 이르는 방법의 차이일 뿐 그 본질적 차이점은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종교다원주의 신학자들의 관점이다. 따라서 종교들이 구원에 동참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 이전의 타종교인들도 종교의 본질에 참여하고 있고 익명의 기독교인이라고 불릴 수 있다는 것이다.

 

3. 종교다원주의 신학의 역할과 특성(Role and Characteristics of Religious Pluralism Theology)

 

1) 타종교에 대한 선교적 관점 전환(Transitioning a Missionary View of Other Religions)

다원주의적 시각은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근본적 시각에 대해 심각한 도전을 제기하였고, 그 수정을 요구했다. 이전에 기독교에 타종교란 선교의 대상이었고 우상에 불과했으며 무지 몽매한 사단의 자식들이 벌이는 자기 맹목화에 불과했다. 그러나 종교다원주의 신학자들에 의하면 타종교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다양하게 다른 옷들을 입고 있는 기독교인의 진정한 형제들인 것이다. 물론 종교다원주의 신학자들 중에도 기독교의 우월성만은 포기하지 않는 신학자들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종교다원주의 신학의 근본적 입장은 대등한 입장에서의 대화와 사랑이며 정복과 선교가 아닌 것이다.

 

2) 예수와 성경의 규범성의 문제(The problem of the norms of Jesus and the Bible)

종교다원주의 신학자들은 근본적인 입장에서 예수의 규범성을 포기하고 성경의 유일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예수와 부처는 실질적으로 크게 차이가 나는 존재가 아니며, 바가바드 기타(Bhagavad-Gita)와 성경도 계시의 수록이란 점에서 동일 선상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근본적으로 이런 전제가 종교다원주의 신학에 놓여 있기 때문에 정통신학으로부터 그 신학성을 의심받아 왔고 의문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다원주의 신학은 타종교인들을 존중하도록 기독교인의 시각을 교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기독교의 정체성과 유일성이 훼손되었음은 물론이다. 타종교와의 대화에서 상대를 존중하는 것과 상대의 종교를 기독교의 종교와 동일시하는 것은 구분될 필요가 있으며, 종교간의 공통점뿐만 아니라 차이점도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어느 불교인이 자신을 익명의 기독교인이라는 것에 공감하겠는가? 결론적으로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의 신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철학에 더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4. 종교다원주의의 정의(Definition of Religious Pluralism)

'구원을 얻는 데 유일한 하나의 길이란 없다'는 것이 종교다원주의를 요약한 말이다. 즉 산꼭대기는 하나밖에 없다. 그러나 그곳에 도달하는 길은 여러개가 있다는 의미이다.

1992년 이화여자대학교의 정대형 교수가 종교다원주의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혀 주었는데, 정교수는 거기서 종교다원주의가 '모든 종교는 각기 구원의 방식을 갖는다'라는 명제로 요약할 수 있으며, 그것은 모든 종교는 구원을 갖는다는 명제와 구별되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흔히 종교다원주의는 두 갈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포괄론이고, 다른 하나는 문자 그대로 다원주의를 말한다. 포괄론은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구원은 궁극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온다는 사상이다. 그리스도가 신비한 방법으로 다른 종교에도 현존하며 활동하기 때문에 다른 종교를 진실하게 신봉하기만 하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반면 다원주의는 종교의 근본은 하나이나 그 형태가 다양하다고 말한다.

트뢸취(E.Troelts-ch)에 의하면 역사의 강을 흐르는 모든 것은 기독교를 포함해서 상대적이다. 모든 것은 역사적이며 역사적 발전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고, 성경도 예외는 아니라고 한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유일한 계시란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종교도 다른 종교를 일괄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한다.

 

5. 존 힉(John Hick)

종교다원주의의 대표적인 인물 존힉은 영국 장로교회 목사로서 원래는 복음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영적 체험을 통하여 그의 신앙을 성장시켰으며, 전통적인 교회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붙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현대 사상과 철학을 연구하면서 그의 복음주의적 신앙 체계의 명료성을 문제삼고 끊임없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들 가운데에서 가장 그를 괴롭혔던 것은, 명시적 계시들의 다양성에서 비롯된 질문들이었다. 종교다원주의의 사실과 도전은 특히 그가 사는 버밍햄 근처의 종교 집단인 이슬람교, 시크교, 힌두교 및 유대교 공동체 속에서 개인적으로 경험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여기에서 타신앙인의 종교 예식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서 '신비하신 중신자'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스미드(W.C.Smith)The Meaning of Religion(1962)를 접하게 되면서 기독교 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으로서의 종교다원주의적 종교 신학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는 God and the Universe of Faith(1973)를 저술했으며, 그 후 현대 성서 비평학을 힘입어 The Myth of God Incarnate(1977)를 편집하여 성육신을 신화적 언어라고 주장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God has many names(1980)를 저술하여 진리를 추구하는 신앙인들간의 대화를 통한 하나의 종교적 비전을 보여 주었다.

 

6. 종교다원주의의 문제점(Problems of Religious Pluralism)

종교다원주의가 타종교, 타문화에 대한 긍정성을 발견하고 종교간의 협력을 가능하게 기독교와 대치되는 여러 가지 문제점도 가지고 있다.

첫째, 다원주의는 십계명의 제1계명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신접한자, 박수, 이방신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유일신 개념은 성경의 근본적 정신이다.

둘째, 순교의 무의미성과 선교의 절박성을 위태롭게 한다는 점이다. 선교는 기독교의 최우선적 당면 과제이며, 교회의 사도성이란 선교에 동참하는 사도직을 감당하는 것인데, 종교 다원주의의 주장을 따르게 되면 선교는 무의미해지며 기독교 제국주의의 확산으로 밖에 평가될 수 없다.

셋째, 다른 종교 속에 존재하지 않는 십자가와 부활이 그리스도교 정신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 종교는 율법적인 반면 그리스도교 안에는 십자가를 통한 은총이, 부활을 통한 생명의 힘이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넷째, 미혹하는 영의 심각성과 영적 세계의 심각한 혼탁성을 알지 못한 채, 일반 종교에 대한 낙관론이 그 근처에 깔려 있다는 점이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세상 속의 암흑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인간은 세상을 우상화하였고, 그 결과 세계는 하나님의 심성과 영광을 감지하기 힘들 정도로 어두운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인간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는 방법을 찾을 수 있는데 종교다원주의는 예수와 성경 그리고 성령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있다.

종교 다원주의는 새로운 사상이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다신론주의이며, 구약이나 신약 당시 사회에서도 다원주의적 종교의 세계였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성경은 이러한 것을 우상으로 정죄하고 있다.

또한 다원주의에서 추구하는 궁극성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떤 나름대로의 초월적 절대성이다. 이러한 절대성은 인간이 추론(postulate)한 것에 불과하다. 또한 다원주의는 모든 것을 관용하는 것 같지만, 다원주의를 믿지 않는 자는 가차없이 정죄한다. 기독교에서처럼 사랑이라는 것이 없다. 기독교는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동시에 모든 자를 사랑한다. 그러나 다원주의는 다른 모든 종교가 다원주의가 되기를 원하면서 그 다원주의(즉 다원주의라는 종교)는 다른 종교가 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독단을 갖고 있다.

다원주의는 상생(相生)이 아니라 사실은 독생(獨生)인 것이다. 이런 독단적인 발상은 인간의 자율성을 기초로 한 인본주의에 근거한 것에 불과하다.

고후2:14-16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라고 말씀한다.

복음은 구원 얻는 자들에게만 향기가 아니다. 망하는 자들에게도 향기가 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다른 종교들에게는 악취요 우리에게만 향기가 아니라 모두에게 향기가 되는 것이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이 향기가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 진리 자체가 타종교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진리는 그들에게도 구원의 소식인 것이다. 단지 그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그들 스스로 멸망을 쌓고 있는 것이다. 모든 종교들의 희망은 종교 다원주의가 아니다. 복음뿐이다. 참 진리의 향기를 맡는 길뿐이다. 진리 자체가 동시에 악취이며 향기일 수가 없다. 진리는 언제나 향기일 뿐이다.

문제는 종교 다원주의자들에게 있는 것이지 기독교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벨리알이 동시에 참 신이 될 수 없다. 동시에 둘이 참 신이라고 하는 것은 참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타종교에도 전해야 한다. 이것만이 그들이 살길인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상생(相生)이 아니라 전멸(全滅)인 것이다. 기독교는 우리만 살자는 것이 아니다. 다 같이 살자는 것이다.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