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 신학(Secular theology)
세속화 신학은 1960년대에 등장한다. 이 사상은 신정통주의(Neo-orthodox),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 hoffer), 하비 콕스(Harvey cox),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와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실존주의 신학(Existential theology)의 영향을 받았다. 세속화 신학은 토마스 알타이저(Thomas Altaizer)의 사신신학(死神神學, The death of God theology)이나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철학적 실존주의(Philosophical existentialism) 등의 근대 운동을 받아들였고 신학에 이러한 생각을 도입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고 건설적인 공헌을 했다.
특별히 이들은 본회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입했다가 잡혀 죽임을 당한 신학자이다. 그는 옥중 서신에서 기독교인은 세속에 참여해야 함을 강조했다. 세상에서의 안주로서의 참여가 아니라 고통을 감수하는 사랑의 참여를 의미한다. 그래서 그는 ‘종교 없는 기독교’를 주장했다. 이것은 하나님, 교회, 혹은 예배가 없는 기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구별된 사회에만 그리스도를 가둬 놓지 말자는 말이다. 그리스도도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위해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과 내세적인 것에 너무 마음을 두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본회퍼의 주장들은 전적으로 비성경적이라 할 수 없지만, 세속 신학자들은 이러한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아 비성경적 세속신학을 발전시킨 것이다.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45)
본회퍼는 현대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 오늘날의 삶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문제에 대하여 탐구하였다.
그는 세속화 신학의 선구자였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에 대한 이해를 비판하였다.
삶이란 이 세상적인 것을 피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신앙을 저 세상과 연결시키는 경향을 비판하였다.
기독교는 인간지식이 발달함에 따라 세상을 설명하고 해석하게 되자 신의 자리를 확보하기에 고심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초월적인 세계, 죽음이후의 세계와 연관 지어 제시되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점점 더 이 세상과 관계없는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다.
본회퍼는 하나님이 삶의 주변이 아니라 중심에, 인간의 약함, 고통, 죽음에 대한 절망 속에서 할 수 없이 의지하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과 번영에서 만나지고 관계하는 존재가 되기를 바랐다.
1906년에 디트리히 본회퍼는 독일의 명문가의 8남매 중 7번째 2란성 쌍둥이로 태어났다.
아버지 칼 본회퍼는 저명한 신경정신과 의사였으며
어머니 파울라는 예나대학 교회사 교수로 명성을 떨쳤던 칼 폰 하제의 증손녀였다.
1923년 17세 튜빙겐 대학과 베를린대학에서 신학을 공부
1927년 그는 베를린 대학에서 21세에 신학박사 학위 논문을 쓰고
1930년 9월 5일부터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1년간 신학을 연구했으며, 귀국한 후에는 베를린대학의 강사로 취임하여 베를린에 있는 공과대학의 교목이 되었다.
1930년 24세에 교수 자격을 취득한 가히 천재적인 신학자였다. 루터교 목사
그를 투사로 만든 것은 히틀러의 집권과 2차 세계대전이었다.
1933년 1월 3일에 히틀러가 독일의 총통이 되자 아리안 종족주의를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반유대적 감정을 자극해서 그리스교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나치 정권은 본회퍼가 활동하던 에큐메니컬 운동을 금하고, ‘독일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어용단체를 조직해서 유대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히틀러가 정권 을 잡은 후 그가 표방하는 정책은 교회의 권위를 침해 하지 않는다는 베일에 싸인 가식으로 교회 지도자들을 포섭하고 나섰다.
그러나 본훼퍼는 이미 히틀러의 의도를 간파하여 "지도자 개념의 변천"이라는 제목의 라디오 강연을 통해 히틀러 정책의 가식과 위선을 폭로하며 독일 교회의 세속화를 우려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이 강연은 중단되었다.
본회퍼는 수용소에 억류되고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유대인들을 돕기 위해서 ‘독일 그리스도인들’에 대립하는 ‘고백교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의 쌍둥이 누이의 남편이 유대인이었고, 본회퍼와 함께 교회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던 친구 힐데브란트 역시 유대인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유대인의 문제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그는 유대인들의 탄압이 부당하다는 것과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다가 한계에 부딪히자
1933년 10월 영국으로 건너가서 그곳의 독일인 교회를 맡아 사역했다.
이때 그는 인도의 간디의 비폭력 저항을 연구하기 위해서 인도로 갈 계획이었으나,
1935년 독일 고백교회로부터 신학교 설립을 위해 귀국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인도 여행을 포기했다. 이 신학교는 반정부적인 고백교회의 지도자 양성소였다.
1936년에 교육부장관이 본회퍼의 대학교수직을 박탈했고,
1937년에는 게슈타포가 들이닥쳐 신학교를 폐쇄했다.
1937년은 고백교회가 나치 정권에 맞설 수 없음이 분명해진 시점이었다. 본회퍼는 그동안 나치에 대한 저항은 반드시 비폭력적이어야 한다고 말했었고, 한동안 고백교회는 나치 정권에 당당하게 저항했다.
1937년에 나치 정권은 금지령, 체포 같은 방법으로 고백교회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결국 고백교회는 히틀러에게 충성하라는 나치 정권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신학교가 폐교되고 고백교회마저 무기력해진 지금 그에게는 더 이상 저항을 도모할 공동체가 남아 있지 않았고, 이제 비폭력 저항은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었다. 무고하게 학살당하는 유대인 형제들을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몸을 던지는 것뿐이었다.
1937년 독일 군정본부 법률 고문이었던 매형 한스 폰 도나니가 본회퍼에게 군사정보기관인 외국 첩보국에서 일할 것을 권했다.
당시 외국 첩보국은 정부에 맞서는 반란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거기서 본회퍼의 임무는 세계교회의 일원이라는 신분을 활용해서 영국의 벨 주교와 같은 외부 협력자들과 접선하고, 히틀러 암살 작전이 성공할 때 수립될 새 정부를 연합국이 적극적으로 지원하도록 그들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1939년이 되자, 검은 전운이 지평선에 떠올랐다. 히틀러 군대는 3월 체코슬로바키아로 진군해 들어갔고 폴란드 공격도 단지 시간문제였다.
그의 영미 친구들은 그가 독일을 떠나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겼다.
무엇보다 그는 7월에 군복무를 시작해야 했고, 친구들은 그가 군복무를 거부하리라는 것과 그러면 그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를 알고 있었다.
본회퍼가 상당 기간 독일을 떠나기 위해서 나치의 승낙을 얻으려면, 어떤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본회퍼가 미국에서 강의하도록 공식 초청장을 얻어주겠다고 제안했다.
1939년 6월 4일 라인홀드 니버와 폴 레만의 주선으로 유니온 신학교에서 강의하기 위해 독일을 출발해서 12일에 뉴욕에 도착했다.
그러나 출발부터 고통받는 형제들을 외면하고 미국에서 안전과 평안을 누린다는 것이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뉴욕에 도착하자 미국기독교위원회로부터 뉴욕시에 있는 독일 난민들을 위한 교회의 목사로 일해 줄 것을 제안 받았지만, 그는 독일의 상황이 악화될 경우 독일로 돌아가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고국으로부터 9월이면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소식을 받고 미국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때 그는 니버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는 미국에 온 것이 실수였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우리 민족의 역사 중 이 어려운 시기에 독일의 형제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이 시련을 저들과 함께 나누지 못한다면 전후 독일의 기독교 삶의 재건에 참여할 권한이 없게 됩니다.”
그는 평안하게 살 수 있는 미국 생활을 포기하고, 고난받는 그의 형제들을 돕기 위해서 7월 7일 독일 배에 승선했고 7월 25일 독일에 도착했다.
독일에 돌아온 이유에 대해서 그는 “독일 사람이며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통의 땅 독일을 떠나는 때에, 그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독일로 돌아간 그리스도인이었다.
1940년 여름 본회퍼는 그의 매형 한스 폰 도나니의 배려로 군정부의 민간인 정보 요원으로 채용되어 뮌헨 사무소에 배속되었다. 거기서 그는 지하 저항 세력의 히틀러 암살 계획에 적극 가담하기 시작했다.
그는 히틀러를 적그리스도로 보았고 그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의 결의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사람들로 가득 찬 거리에서 자동차를 몰아대는 미치광이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도 나의 할 일이지만, 내 모든 힘을 다해 운전 그 자체를 멈추게 하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일이다.”
1941년 2월 본회퍼는 유대인들을 정보국 첩보원으로 위장하여 스위스로 피신시켰다. 같은 해 9월에 그는 제네바로 가서 세계교회협의회 총무 비서트 후프트와 회담했다. 본회퍼의 주요 임무는 연합국으로 하여금 독일에서의 저항운동을 강화할 수 있는 현실적인 조건을 제공해주도록 촉구하는 일이었다.
1942년 5월 31일에는 영국 공보성의 요청으로 스웨덴을 방문 중이던 치체스터 주교와 회담하기 위해서 스웨덴으로 날아갔다.
그는 치체스터 주교에게 히틀러와 나치 정권을 전복시킬 광범위한 계획과 주요 공모자들의 이름을 밝히면서, 이와 같은 정보를 영국 정부의 해당 기관에 전해줄 것과 그 혁명이 성공할 경우 연합국들이 합리적인 평화 정착을 협상할 것인지 여부를 즉각 회신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본회퍼가 가담한 히틀러 암살단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서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다.
1943년 3월 13일 히틀러가 탄 비행기에 시한폭탄을 장치했지만 그 폭탄이 작동하지 않았다. 같은 해 3월 21일에는 히틀러가 베를린의 무기 박물관에서 열리는 전리품 전시회에 참석하는 틈을 타서 폰 게르스도르프가 몸에 폭발물을 품고 그 장소에 잠입했다. 그런데 히틀러가 예정과 달리 5분 만에 전시회장을 떠나는 바람에 그는 히틀러에게 접근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1943년 4월 5일 그의 매형 한스 폰 도나니가 체포된 지 몇 시간 후, 본회퍼는 유대인들을 스위스로 도피시키는 일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테겔 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2년 여 동안 형무소와 수용소를 옮겨 다니며 고문을 당한 끝에
1945년 4월 9일 새벽, 동료들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때 본회퍼의 나이 39세였다. 그런데 그가 처형당한 지 2주 후, 미군이 그가 수감되어 있던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방면했다.
그리고 그 1주 후에 히틀러가 자살했다.
그가 애석하게도 이렇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의 신학이 활짝 꽃피우지는 못했지만, 그의 천재적인 신학적 발상은 홀로코스트 이후의 신학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저서
『나를 따르라』(1937), 『신도의 공동생활』(1939), 『윤리학』(1940), 『옥중 서신』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책은 『나를 따르라』이다.
본회퍼가 평안한 삶이 보장되는 미국 생활을 버리고 독일에 돌아와서 자기 동족과 유대인들을 위해서 일하다가 나치에 의해 교수형을 당한 것은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이었다.
본회퍼가 루터교회에서 자랐고 루터교회의 목사였지만, 그는 독일교회가 종교개혁의 표어인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것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아무런 노력이 수반되지 않는 믿음은 값싼 은혜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믿는 자는 순종하고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것을 말한다.
그는 행동하는 신학자였다.
그는 나치 치하에서 박해받고 있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교회가 침묵할 때, 유대인을 위하여 소리치는 자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했다.
그의 친구였던 라인홀드 니버는 그를 순교자라고 부르면서 본회퍼의 삶을 ‘현대의 사도행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본회퍼를 20세기 순교자 10인 중의 하나로 뽑았고,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서쪽 입 구에 그의 석상을 세웠다.
어쨌든,
히틀러 암살을 모의한 사람을 순교자라고 부르는 것은 모순인 것 같다.
본회퍼의 생애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중요한 결정에 주목하게 된다.
첫째는 그가 고백 교회를 택한 사실이다.
"고백 교회와 나를 분리하는 것은 나를 구원으로부터 멀리하는 것 같다."고 언급할 정도로 고백 교회에 대한 그의 사명은 대단했다. 그는 교회가 영원한 진리나 원칙들을 선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의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사람 들에게 선포하기 위해 교회가 존재한다고 하면서 바람직한 교회상 정립을 원했다. 이 고백 교회는 히틀러의 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정의와 양심을 따르는 신앙 공동체였다.
두 번째 결정은 국가 사회주의에 대한 저항과 혁명에 가담하는 것이었다.
그는 항상 평화를 위해 저항했다.
본회퍼에게 저항은 교회를 구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련에 처한 인류를 구원하는, 억압받은 사람들을 구조하는 행위였다. 그는 나치체제를 전복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의 바람직한 국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히틀러와 그의 정권에 투쟁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