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신학 사상과 영향(Calvin's Theological Thoughts and Influences)
칼빈(Calvin)은 과격(過激)한 종교개혁자(宗敎改革者)들이 교회를 개혁(改革)하기 위하여 폭력(暴力) 사용을 정당화(正當化)한 것을 배척(排斥)하고 루터(Martin Luther)와 쯔빙글리(Ulrich Zwingli)를 따라 설교(說敎)만이 부패한 교회를 개혁(改革)하는 유일(唯一)한 방법(方法)이라고 주장하였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검은 문자적(文字的)인 검이 아니라 영적(靈的)인 검, 곧 말씀으로 이해한 것이다. 따라서 칼빈(Calvin)은 설교(說敎)라는 방편(方便)을 가지고 제네바(Geneva)를 개혁하기 위해서 자유교회(自由敎會)를 세웠다. 칼빈(Calvin)은 제네바(Geneva)의 목회기간 동안 교회적 정치가(政治家)로서, 종교적 논쟁가(論爭家)로서, 교육가(敎育家)로서, 저자(著者)로서 그의 명성(名聲)과 영향(影響)은 넓게 퍼져 나갔다. 그의 신학적(神學的) 통찰력(洞察力), 주석적(註釋的) 재능(才能), 언어지식(言語知識)은 종교개혁가(宗敎改革家)들 중에 가장 큰 영향력(影響力)있는 저술가(著述家)가 되게 하였다. 그의 기독교강요(基督敎綱要)는 개신교회(改新敎會) 속에 가장 권위(權威)있는 책으로 알려지고 있다. 칼빈(Calvin)이 신학자(神學者) 혹은 복음변증가(福音辨證家)로서의 삶에서 목회자(牧會者)로의 삶으로 바뀐 곳은 스위스의 수도 제네바(Geneva, the capital of Switzerland)였다.
당시 로마가톨릭교(Roman Catholic Church)의 도시였던 제네바(Geneva)는 파렐(Farel)의 생명을 건 활동(活動)으로 로마 가톨릭 미사(Roman Catholic Mass)가 폐지(廢止)되고 시민들은 복음에 순종(順從)하는 생활(生活)을 하겠다는 서약(誓約)까지 받아놓은 교회개혁(敎會改革)의 성공지(成功地)였다. 이때가 칼빈(Calvin)의 나이 27세 때였고 1536년 7월 하순경이었다. 제네바(Geneva)의 종교개혁(宗敎改革)은 칼빈(Calvin)을 만남으로 새로운 전기(轉機)를 맞이하게 되었다. 제네바(Geneva)는 날개 없는 새가 날개를 가진 셈이 되었다.
칼빈(Calvin)의 종교개혁(宗敎改革)은 교육(敎育), 복지(福祉), 윤리(倫理), 정치(政治), 경제(經濟), 예술(藝術), 출판(出版) 등 다양한 분야에 큰 영향(影響)을 끼쳤다. 먼저 칼빈(Calvin)이 세운 "제네바 아카데미(Geneva Academy)"의 교육 시스템(Education system)은, 이후 영미 청교도(British and American Puritans)들에 의해 대학(大學)들이 설립(設立)되면서 "교육의 표준(Standard of education)"으로 작용했다. 칼빈(Calvin)이 제네바(Geneva)의 난민(難民)들을 위해 조성한 "구제기금(救濟基金)"은 훗날 복지제도(福祉制度)의 성립(成立)에 영향(影響)을 끼쳤다. 이때 칼빈(Calvin)은 구제사역(救濟使役)을 위해 "집사제도(執事制度)"를 활성화(活性化)했고, 이후 집사는 교회의 주요 직분으로 정착되었다. 또한 칼빈(Calvin)은 십계명(十誡命)을 "적극적(積極的)"으로 해석하여 기독교윤리학(基督敎倫理學)을 정립(定立)하였으며, 서구사회(西歐社會)의 도덕적(道德的) 수준(水準)을 높게 고양(高揚)시켰다. 그래서 이후 청교도(淸敎徒)는 "율법주의자(律法主義者)"라는 오명(汚名)을 들을 정도로 율법(律法)을 지키는 일에 큰 관심(關心)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칼빈(Calvin)은 교회(敎會)정치를 "장로(長老)" 중심으로 개혁하여 기존의 중앙집권적(中央集權的) 체제(體制)를 "권력분산형(權力分散形)"으로 변화(變化)시켰고, 교회가 정치적(政治的) 간섭(干涉)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오늘날의 정교분리(政敎分離) 사상(思想)의 기초를 제공했다. 이러한 칼빈(Calvin)의 시도는 정치체제(政治體制)의 개혁(改革)으로도 이어졌다. 칼빈(Calvin)은 사무엘상을 주해하면서 한 명에게 모든 권력(權力)이 집중되는 "왕정제도(王政制度)"를 비판했고, 신1:14~16에서 모세가 재판관(裁判官)들을 임명할 때 "백성들의 투표"를 거쳤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제네바(Geneva) 시민들에 의하여 선출된 "의회(議會)"를 구성했다. 게다가 "대의회"와 "소의회"를 나누어 구성하여서 권력을 분립(分立)하였고, 행정(行政) 장관(長官)들도 1년 단위로 시민들의 투표를 통해 선출되게 만들었다. 이러한 칼빈(Calvin)의 아이디어는 훗날 청교도(淸敎徒)들에게 이어져 "최초의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 국가 미국(美國)"의 건국에 큰 영향을 끼쳤다.
칼빈(Calvin)을 싫어하는 철학자(哲學者)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년)조차 "국민이 권력의 근원(根源)이라는 공화주의적(共和主義的) 사상(思想)은 1607년경 당시 청교도(淸敎徒)들이 고안해낸 것"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칼빈(Calvin)이 끼친 또 하나의 영향은 "직업(職業)의 신성(神聖)함"을 강조한 것이었다. 소위 "소명(召命)" 교리로서, 칼빈(Calvin)은 성직자(聖職者)뿐만 아니라 모든 직업(職業)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소명(召命))을 받은 것으로 이해했다. 이에 따라 칼빈(Calvin)은 당시 천한 직업이라 생각되던 상업(商業)이나 유통(流通)업을 "귀하게" 생각했고, 이후 칼빈주의(Calvinism)가 전파되는 곳이라면 어디든 "자유시장과 자본주의(資本主義)에 대한 선호" 역시 퍼져나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칼빈(Calvin)이 공예배(公禮拜)에서 사용한 "시편(詩篇) 찬송(讚頌)"은 라틴어(Latin)가 아닌 모국어(母國語)로 부르게 해서, 예배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는 "예술(藝術)의 대중화(大衆化)"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칼빈(Calvin)은 자신의 사상(思想)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놀라운 양의 책을 출판하였는데 이로써 출판업(出版業)이 성행(盛行)하였다.
1. 추기경(Cardinal) 사돌레토(Jacopo Sadoleto)에의 답신(Reply)
칼빈(Calvin)은 당시 카펜트라스(Carpentras)의 주교(主敎)였던 추기경(樞機卿, Cardinal) 사돌레토(Sadoleto, 1477-1547)의 서신에 대한 답신(Responsio ad Sadoleti epistolam)에서 종교개혁(宗敎改革)의 대의명분(大義名分)을 뚜렷하게 밝혔다. 따라서 그의 답신은 변증서(辨證書)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사돌레토(Sadoleto)는 종교개혁자(宗敎改革者)들을 비난하면서 말하기를, 그들은 개인적 야망(野望)을 채우려는 기독교 통일과 평화의 적들이라고 했고, 교회(敎會)에 겸손히 복종(服從)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첫째 의무(義務)라고 주장했다. 칼빈(Calvin)은 사돌레토((Sadoleto)의 글을 읽고 6일 간에 걸쳐서 사돌레토((Sadoleto)에게 답신(答信)을 썼다.
칼빈(Calvin)이 추방(追放)을 당하고서 가장 힘든 때를 보내던 때에 제네바(Geneva) 역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1539년 3월 26일 카펜트라스(Carpentras)의 주교였던 추기경(樞機卿, Cardinal) 사돌레토(Jacopo Sadoleto)는 구교(舊敎)로 돌아올 것을 회유(懷柔)하는 서신(書信)을 제네바(Geneva)로 보낸다. 그러나 추기경(樞機卿, Cardinal)에 답신을 보낼만한 사람을 찾던 중 결국(結局) 스위스 베른 당국(Switzerland Bern authorities)의 부탁으로 칼빈(Calvin)이 논박서신(論駁書信)을 보내게 된다. 그 해 10월 5일에 보낸 칼빈(Calvin)의 답변을 보면 그는 물리적(物理的) 공간(空間)으로는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 있지만, 그 영혼과 심장은 제네바(Geneva)에 있음을 알게 해준다. 그는 사돌레토(Sadoleto)에게 “비록 나는 당분간 제네바(Geneva)의 교회를 책임지고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교회를 부모와 같은 애정으로 감싸고 싶은 나의 마음을 가로막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그 교회를 맡기셨을 때 나를 영원히 그 교회에 충성(忠誠)하도록 맹세 시켰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단 6일 만에 작성된 답변서신(答辯書信)은 모든 문제를 해결(解決)하고도 남았다. 칼빈(Calvin)에게 제네바(Geneva)는 추방되고 재적되어 버린 교회가 아니라 여전히 자신이 속한 교회이며, 칼빈(Calvin) 스스로가 마치 이 문제의 중심에 있고 자신이 모든 개혁교회(改革敎會)의 대표자(代表者)인 것처럼 말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에게 제네바(Geneva)는 여전히 자신의 목양지(牧羊地)이자 교구(敎區)였던 것이다. 나중에 루터(Luther)조차 이 편지를 읽고서 상대방(相對方)을 꼼짝달싹할 수 없게 만드는 훌륭한 답변(答辯)이라고 칭찬했다. 종교개혁시대(宗敎改革時代)의 가장 아름다운 변증서신(辨證書信)으로 알려진 이 답변서신(答辯書信)에서 칼빈(Calvin)은 가톨릭과 주교(Catholic and Bishop)들의 무책임(無責任)함과 교회의 재정(財政)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칼빈(Calvin)은 제네바(Geneva) 교회는 교회법에 따라 재정(財政)을 관리하고 있으며 더군다나 목사(牧師)들은 시의회(市議會)에서 박봉(薄俸)의 봉급을 받으면서 검소(儉素)하게 교회를 섬기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칼빈(Calvin)과 사돌레토(Sadoleto) 추기경 사이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한번은 칼빈(Calvin)의 정적인 로마교회의 사돌레토(Sadoleto) 추기경이 제네바(Geneva)를 지나며 칼빈(Calvin)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때 사돌레토(Sadoleto)는 너무나 초라한 칼빈(Calvin)의 집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칼빈(Calvin)의 사환(使喚)이 대문에 와서 사돌레토(Sadoleto)를 맞이했을 때 사돌레토(Sadoleto)는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환(使喚)을 보고 자신(自身)을 소개하면서 칼빈(Calvin) 선생(先生)을 만나고 싶다고 하였다. 이때 사환이 사돌레토(Sadoleto)에게 자신이 칼빈(Calvin)이라고 말했다 한다. 추기경(樞機卿)의 눈에 사환처럼 보였던 사람이 바로 칼빈(Calvin)이었던 것이다. 후에 칼빈(Calvin)의 사망 소식을 들었던 교황 파이어스(Pope piuss) 4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이교도(異敎徒)에게 가장 무서운 무기(武器)가 있는데 그것은 돈이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내가 그런 신하들을 거느리고 있다면 나의 제국(帝國)은 대양에서 대양으로 뻗어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칼빈(Calvin)이 쓴 이 글은 제네바(Geneva) 시민과 원로원(元老院)에 보내온 사돌레토(Sadoleto) 추기경(樞機卿)에 서한에 대한 칼빈(Calvin)의 답신이다. 칼빈(Calvin)은 문제의 본질(本質)을 확실히 파악하고, 매우 정중(鄭重)한 표현(表現)으로 자신과 파렐(Farel)을 포함한 개혁자(改革者)들이 개인적 유익을 추구하려 했다는 비난(非難)을 물리치면서 서두를 열었다.
"만일 그대가 나를 개인적으로 비난했었더라면, 나는 그대의 학식을 생각하고 그대의 학문을 존중하여 그러한 비난을 쉽게 용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소명(A call from God)에 의해 지지받고 또 인정되었다고 확신하고 있는 나의 사역이 도전받고 공격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내가 만일 여기에서 침묵(沈黙)을 지키고 그대의 말을 무시하고 지나친다면 그것은 인내가 아니요 배신행위(Perfidy)가 될 것입니다. 나는 내 자신이 명석하고 박학다식(博學多識)하고 사려 깊고 능력이 있고 또 근면(勤勉)하다고 지금 주장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나는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데 반드시 요구되는 성실성(Sincerity)을 가지고 노력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내가 만일 내 자신의 이익(My own intersest)만을 염두에 두었더라면, 나는 결코 교황의 세력으로부터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나와 같은 나이에 이미 고위 성직(聖職)에 오른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나와 대등한 인물들이며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못한 자들로 생각됩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탐심(貪心)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남용(濫用)한 적이 없습니다."
칼빈(Calvin)에 의하면, 자기 자신의 제일차적 존재(存在) 동기로서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제시하려는 열의를 보이지 않고 모든 생각들을 자기중심(自己中心)하에서만 전개하는 것은 그다지 건전(健全)한 신학은 못되는 것이다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선적(優先的)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태어났지 우리들 자신을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들의 선과 유익에 대한 모든 생각과 염려보다도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높이려는 열심이 우리에게 있어 더욱 커야할 것을 가르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단지 자기 자신의 영혼 구원(The salvation of his own soul)만을 확보(確保)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음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칼빈(Calvin)은 말씀의 우선권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성령(聖靈)의 역할을 언급하고 있다. "선지자들이 교회의 갱신(The renewal of the Church)과 전 세계로의 확장(Its extension over the whole globe)을 예언할 때에 그들은 언제나 말씀에 우선권(優先權)을 두었습니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성령의 구실하에 우리들을 복음의 단순한 교리(The simple doctrine of the gospel)로부터 호도(糊塗)하려는 어떤 사람도 용납하지 말도록 충고하였던 바, 매우 옳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령(聖靈)이 우리에게 약속되어진 것은 새로운 교리를 밝혀주시기 위함이 아니요 복음의 진리를 우리의 마음에 새겨주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교리들을 검사하는 시금석(試金石)이다. 또한 성령(聖靈)은 교회가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밝혀주시는 분이다. 성령(聖靈) 없이 말씀 자체만을 강조하는 것이 불합리(不合理)하듯이 말씀 없는 성령만을 자랑하는 것 역시 그 못지않게 불합리한 일입니다. 라고 말한 대목에서 그의 확고한 성경관(聖經觀)을 엿볼 수 있다. 칼빈(Calvin)에 의하면, 개혁자들이 주장하는 교회의 형태가 로마 교회보다 초대교회(初代敎會) 형태에 훨씬 더 가깝다. 개혁자(改革者)들은 처음에는 무식한 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더럽혀졌으며 후에는 로마 교황(敎皇)과 그의 도당(徒黨)들에 의하여 극악무도(極惡無道)하게 난도(亂刀, hack)질당하고 거의 파괴(破壞)되다시피 한 교회의 본래의 형태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해 왔다. 또 칼빈(Calvin)에 의하면, 개혁자(改革者)들은 부패하고 타락한 기존의 교회 상태에 결코 만족하지 않고 고대의 경건(敬虔)함과 거룩함(Ancient piety and holiness)을 열망하여, 현재 교회가 처한 상황을 개선하고 초대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 이다. 칼빈(Calvin)은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신칭의(以信稱義)에 대한 지식이 제거된 곳에서는 그리스도의 영광(榮光)은 소멸(消滅)되고 종교는 무너지고 교회는 파괴(破壞)되며 구원의 소망은 완전히 없어지고 맙니다"고 했다. 그는 또 "우리가 주장하는 바는 이와같이 인간은 자기 자신의 공적(功績)이나 가치(價値)있는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은혜(Gratuitous mercy)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和解)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迎接)하고 그리스도와의 교제(交際)에 들어갈 때, 우리는 이것을 성경(聖經)의 표현(表現)을 따라 믿음의 의(The righteousness of faith)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분명코 공로(功勞)는 사람을 의롭게 하는 데 있어 지푸라기(Straw) 만큼의 가치(價値)도 없다고 우리는 주장(主張)합니다."라고 했는데, 이는 칼빈(Calvin)의 의하면, 하나님의 자비(慈悲)는 죄인의 공적(功績)들과는 상관없이 그의 불의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를 의롭게 여기신다.
칼빈(Calvin)은 칭의(稱義)와 선행(善行)과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우리는 선행(善行)이 칭의(稱義)에 어떤 역할(役割)을 한다는 것을 부인(否認)한다. 그러나 의인의 삶 속에서는 선행(善行)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을 주장(主張)한다. 우리가 값없이 택함 받은 목적(目的)이 순결(純潔)하고 오염(汚染)되지 않은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인 것처럼, 값없이 주어지는 칭의(稱義)의 목적도 또한 그와 같다.
2. 성찬(聖餐, Eucharist) 예식(Ceremony)
칼빈(Calvin)의 1536년 기독교강요(基督敎綱要) 초판(初版)에서부터 성찬(聖餐)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기독교강요(基督敎綱要)는 판을 거듭하면서 성찬(聖餐)에 많은 분량을 할해 해 나갔다. 칼빈(Calvin)은 성찬(聖餐) 속에서 명쾌(明快)하게 그 주제(主題)를 다루고 있다.
1) 성찬(聖餐) 제정의 이유(Reasons for instituting the Eucharist)
하나님은 성찬(聖餐)을 통해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Communion)로 인도하신다고 했다. 칼빈(Calvin)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영혼(靈魂)을 양육(養育)할 수 있는 유일(唯一)한 양식(糧食)이다. 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의 연약(軟弱)함에까지 자신을 낮추사, 그의 말씀에 보이는 표식(Visible signs)을 더해주시고, 우리를 모든 의심과 불확실(不確實)함에서 건지신다.
성찬(聖餐)을 제정(制定)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칼빈(Calvin)은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보이는 표식을 통해서 약속의 실체(Substance)를 나타내시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영적 둔감(鈍感)함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이 수용(受容)하는 정도에 맞추어 우리를 이해시키고자 하신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교제(交際)한다는 이 신비(神秘)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성찬(聖餐)을 제정하셨다.
둘째, 성찬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慈悲)를 깨닫고 하나님을 보다 온전히 찬양(讚揚)하게 된다.
세째, 성찬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肢體)임을 알고 모든 성결(聖潔)에 힘쓰게 된다.
2) 성찬(聖餐)의 유익(Benefits of the Eucharist)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거울로서 성찬(聖餐)을 주셨다. 우리는 이 거울을 통해 십자가(十字架)에서 죽으시고 부활(復活)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가 성찬(聖餐)에서 얻는 특별한 유익은 무엇인가? 성찬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와 부활(復活)로 인도하여 우리에게 무슨 불의(不義)가 있든지 주님은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는 것이며, 우리에게 어떠한 비참(悲慘)함이 있든지 지복(至福)으로 우리를 채우신다는 사실(事實)을 우리로 확신(確信)케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聖餐)이 우리에게 하나의 거울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 거울을 통해서 우리를 정죄(定罪)함에서 구하기 위해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시고 우리에게 의(義)와 영생(永生)을 주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칼빈(Calvin)에 의하면 성찬(聖餐)에서 두 가지 것이 우리에게 제시된다. 첫째는 모든 선(善)의 근원(根源)이요 실체(實體)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요, 둘째는 그의 죽음과 고난(苦難)이 주는 열매와 효과(效果)이다. 우리는 성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실제(實際)로 받아야 한다. 성례(聖禮)의 내적(內的) 실체(實體)는 보이는 표지(Visible signs)와 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보이는 표지(表紙)를 볼 때, 우리는 그것이 상징(象徵)하는 바가 무엇이며 또 그것이 누구에 의해 주어졌는가를 고려(考慮)해야 한다. 성찬은 우리를 배은망덕(背恩忘德)에서 건지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부어주신 유익(有益)을 잊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감사(感謝)하게 하고, 공적(公的)인 신앙고백(信仰告白)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그에게 빚을 지고 있는지를 고백(告白)케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성찬(聖餐)의 유익(有益)은 우리가 거룩하게 살게 하고, 특히 우리 안에 사랑과 형제애(兄弟愛)을 지키도록 강력(强力)히 촉구(促求)하는 데 있다. 왜냐하면 성찬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聯合)하여 머리되신 그와 하나가 됨으로 그의 지체(肢體)가 된 까닭에, 우선 우리를 그의 청결(淸潔)과 순결(純潔, Purity and innocence)에 부합(附合)시키고 또한 특히 동일(同一)한 몸의 지체(肢體)가 가져야 할 그런 사랑과 일치(Charity and concord)를 서로 가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3) 성찬의 올바른 사용(Correct use of the Eucharist)
성찬(聖餐)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서 칼빈(Calvin)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이 성찬(聖餐)에 업신여김(Contempt)이나 무관심(Indifference)으로 접근하여 우리 주님이 부르시는 곳으로 따라가는 데 그다지 관심(關心)을 갖지 않는 자는 성찬(聖餐)을 사악(邪惡)하게 능욕(凌辱)하는 자요 더럽히는 자이다. 하나님이 그토록 거룩하게 하신 것을 더럽히고 오염(汚染)시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신성모독(神聖冒瀆, Intolerable blasphemy)이다.
칼빈(Calvin)에 의하면, 하늘과 땅위에 주님의 몸과 피보다 더 귀하고 더 존엄(尊嚴)한 것이 없을진대, 경망(輕妄)스럽고 준비(準備)없이(Inconsiderately and without being well prepared) 성찬(聖餐)에 참여(參與)하는 것이 사소(些少)한 실수(失手, Peccadillo)일 수는 없다. 또한, 주님의 성찬(聖餐)에서 합당(合當)한 영양(Proper nourishment)을 얻기 위해선 마땅히 우리 영혼(靈魂)은 기근(饑饉)으로 고통(苦痛)당하여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懇切)해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 특히 교회(敎會)에서 하나가 된 그리스도인을 미워하거나 그에게 원한(怨恨)을 품고서 성찬(聖餐)을 대하려 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공동(共同)으로 함께 섞여 있는 것 같이, 우리 역시 끊을 수 없는 우정(Indissoluble friendship)으로 하나가 됨이 마땅하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서로 싸우고 다툰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여러 조각으로 찢게 되며 하나님을 모독(冒瀆)한 죄(罪)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칼빈(Calvin)은 성찬에 참여하는 자의 태도(態度)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관점(觀點)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믿음이 불완전(不完全)하다고 느끼며 우리의 양심(良心)이 수많은 죄악(罪惡)들을 책망하지 못할 정도로 순결(純潔)치는 못하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그것이 주의 거룩한 식탁에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을 방해(妨害)해서는 안된다. 물론 이런 연약함 가운데서도 마음에 위선(僞善, Hypocrisy)이나 기만(欺瞞)이 없어야 한다. 성찬(聖餐)은 우리의 허약함(Our weakness)을 돕고 우리의 믿음을 강건(强健)케 하며 우리의 사랑을 증가(增加)시키고 더욱 거룩한 삶으로 인도(引導)하기 위한 하나님의 치료(治療, Remedy)책인 까닭에, 우리가 질병(疾病)으로 억압(抑壓)된 느낌을 받으면 받을수록 성찬(聖餐)을 삼가 하기보다 더욱 활용(活用)해야 한다.
칼빈(Calvin)에 의하면, 성찬(聖餐)의 사용횟수(使用回數)에 관해서는 어떤 확실한 규칙(規則)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때로는 어떤 사람에게 성찬을 삼가 해야 할 특별(特別)한 경우도 있다. 더우기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일 억지로 성찬을 이용케 하기 위해 성찬을 제공하라는 명백한 명령을 받은 일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주님이 의도(意圖)하셨던 목적(目的)을 신중(愼重)히 고려(考慮)해보면, 성찬의 사용은 지금 많은 곳에서 하고 있는 것보다 더 빈번(頻繁)하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연약함이 우리를 억누르면 누를수록 우리는 우리의 신앙(信仰)을 확고히 해주고 순결한 삶(Purity of life)으로 우리를 이끌어갈 수 있는 이 성찬(聖餐)에 의지(依支)함이 더욱 더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수요(需要)할 능력(Capacity)에 따라 자주 성찬을 거행(擧行)하는 습관이 모든 교회에 잘 세워져야 한다. 칼빈(Calvin)에 의하면, 합당(合當)치 못하다는 이유(理由)로 성찬(聖餐)을 오랫동안 삼가 해서는 안 된다.
4) 성찬을 부패시키는 오류들(Errors That Corrupt the Sacrament Ritual)
칼빈(Calvin)에 의하면, 사탄은 성찬의 유익을 오류(誤謬)와 미신(迷信)으로 더럽히며, 그 열매를 부패(腐敗)시키려고 전력(全力)을 다했다. 마침내는 주님의 성찬(聖餐)을 거짓과 허식(虛飾)으로 뒤바꿔 놓기까지 했다. 성찬을 희생 제사(Sacrifice)로 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을 얻는다고 주장(主張)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신성모독(神聖冒瀆)이다. 칼빈(Calvin)은 로마교회(Roman Catholic church)의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을 거부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에 아무런 기초가 없고 고대 교회로부터의 어떤 흔적(痕迹)도 없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一致)되고 조화(調和)되지 않는다. 성찬의 빵 앞에 부복하거나, 또 마치 그리스도가 그 빵에 포함되어 있는 듯이 빵 속에 그리스도께 경배(敬拜)하는 것은 우상(偶像)을 성찬(聖餐)으로 바꿔놓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명령(命令)은 그것을 경배(敬拜)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먹으라는 것이다. 로마교회(Roman Catholic church)는 또한 피의 상징(象徵)을 분배(分配)하지 않는다. 이처럼 불행히도 가려한 신자들은 우리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선물(膳物)을 사기(詐欺)당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양식으로 주님의 피를 받는 것이 적지 않은 유익(有益)일진대 이것을 탈취(奪取)하는 것은 잔인(殘忍)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칼빈(Calvin)에 의하면, 성찬은 하나님의 은밀(隱密)하고 기이(奇異)한 능력에 의해(By the secret and miraculous power of God) 완성된다. 또한 하나님의 영은 성찬의 참여의 띠(The bond of participation)이시다. 이 때문에 성찬은 영적(靈的)이라고 불리운다. 우리는 주님의 지시에 따라 신앙(信仰)으로 성찬(聖餐)을 받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진정(眞正)한 실체(The proper substance of the body and blood of Jesus Christ)에 참으로 참여하게 된다.
3. 성경(聖經)의 절대권위(絶對權威) 사상(思想, Absolute Authority of the Bible Thought)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1851-1921)는 칼빈(Calvin)에 대하여 말하길 "칼빈(Calvin)은 삼위일체(三位一體)의 교리사(敎理史)에서 제2위이신 성자의 존재(存在)가 스스로 계신 분이라고 주장(主張)한 것이 가장 위대(偉大)하다. 즉 철학적(哲學的)으로 말한다면 형이상학론(形而上學論, Metaphysics)은 하나님이 중심(中心)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그의 인식론(認識論)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중심(聖經中心)이었다. 그래서 그를 말씀의 신학자(神學者)라고 부른다." 고 하였다. 특히 그는 성령(聖靈)의 신학자(神學者)라고 할 만큼 성령의 역사에 깊은 교리(敎理)를 교회에 주었다. 기독교(基督敎) 전통 속에 표현되어 있었던 형이상학론(形而上學論)은 칼빈(Calvin)에게 있어서도 문제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창조주(創造主)와 피조물(被造物)과의 관계(關係) 개념(槪念)으로 궁극적(窮極的)인 요소이다. 칼빈(Calvin)은 "기독교강요(基督敎綱要)"에서 그것은 천상적 현상(現像)과 지상적 현상(現像)으로 설명하였다. 칼빈(Calvin)의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s)론은 중세(中世) 교회인 가톨릭교회(Catholic church)에서 주장된 사상과 대립적(對立的)인 입장이다. 가톨릭교회(Catholic church)는 천상적인 것으로 지상적인 국가가 천상적인 교회에 종속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칼빈(Calvin)은 세속적 국가의 정치의 권한은 종속(從屬)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主權)하에 신성화(神聖化) 될 수 있음을 고조(高調)하고 있다. 그에 의해 주장된 이러한 사상(思想)은 특별 은혜와 이에 대비할 일반 은혜와의 관계성의 문제에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칼빈(Calvin)은 두 개념을 비교하여 하나님의 주권인 예정론(豫定論)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弱化)시키거나 인간의 주권(主權)을 극대화시키는 것을 부정(否定)하는 입장인 것이다.
칼빈(Calvin)은 그의 "기독교강요(基督敎綱要)"에서 인간 자체에는 영적(靈的) 지배와 시민적(市民的) 정치적 지배의 두 가지 요소가 있다고 한다. 영적 지배(支配)의 요소는 신령(神靈)한 영적생활이고 시민적 정치적 지배의 요소는 현세적(現世的) 육적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이 양자에 대하여 칼빈은 항상 별개의 것으로 구별시키고 양자를 혼동시키지 아니하였다. 또한 그는 양 개념(槪念)의 공존과 양 개념은 하나님의 주권(主權) 하에 종속(從屬)되어 있음을 주장하였다. 즉 그는 양 개념을 무엇보다도 대비(對比) 상황(狀況)으로 보았다. 그것은 실제적(實際的)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인간 이성에게도 가장 합리적(合理的)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그의 형이상학론(形而上學論)을 확실히 밝히고 있는 단면(斷面)이다.
칼빈(Calvin)의 목회(牧會) 철학(哲學)에 있어 근간이 되는 것은 인식론적(認識論的) 측면에 있어서의 성경(聖經)의 절대권위(絶對權威) 사상(思想)이라 하겠다. 칼빈(Calvin)은 절대적 권위가 있는 말씀의 이해(理解)는 인간 이성의 판단을 중심할 때 이해력을 높이는 실제적(實際的)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칼빈(Calvin)은 성경의 권위(權威)에 있어서 루터(Luther)보다 더 명확(明確)했다. 루터(Luther)는 성경 66권 가운데 야고보서와 요한계시록 등 성경의 일부에 대하여는 신학적(神學的) 비평(批評)을 하면서 정경성(正經性)을 의심하였으나, 칼빈(Calvin)은 성경66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정경(正經)으로서의 절대권위(絶對權威)를 부여했다. 즉 성경은 선지자(先知者)와 사도(使徒)들이 영감(靈感), 곧 성령(聖靈)의 감동(感動)을 받아 기록되었다고 생각하며 칼빈(Calvin)은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권위(權威)를 성경(聖經)에 부여한 것이다.
칼빈(Calvin)은 또한 기자(記者)들을 영감하여 성경을 기록케 하신 바로 그 성령(聖靈)께서 성경 독자의 심령에 역사하여 내적(內的) 증거(證據)로 확신을 주며, 성경의 권위가 인식(認識)됨을 주장(主張)했다. 그는 사람의 이성(理性)도 이미 타락(墮落)으로 인해 부패(腐敗)되었기 때문에 진리(眞理)를 깨닫고 그것을 이해(理解)하는 것도 오직 성경말씀 안에서만 이해되는데 부패(腐敗)한 이성(理性)이라도 그 성경(聖經)을 읽는 중에 깨달음과 함께 믿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조화성(調和性)이 있어서, 오랜 세기(世紀)를 걸쳐서 많은 저자(著者)들에 의해 씌어 졌지만 이성(理性)으로서 이해(理解)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聖經) 이해(理解)는 그의 목회사역(牧會使役)에서 폭넓은 성경해석(聖經解釋)과 성경강해(聖經講解)를 가능케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깊은 성경연구(聖經硏究)를 통해 나온 그의 식견(識見)은 교회 내에서 뿐만 아니라 제네바시(Geneva city)의 정서(情緖) 문화(文化)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나아가 유럽의 전 개혁교회(改革敎會)로 퍼져 나가게 되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4. 교회(敎會)와 조직(組織, Church and organization)
칼빈(Calvin)의 교회는 직분(職分)을 중심한 교회이다. 칼빈(Calvin)은 말씀과 성례(聖禮)와 권징(勸懲)은 교회의 직분자(職分者)들에게 맡겨진 일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기본적(基本的)인 요소(要素)가 말씀과 성례(聖禮)이기 때문에 즉 말씀을 올바로 듣고 성례(聖禮)를 올바로 행하며 그리고 권징(勸懲)에도 올바르게라는 개념을 적용하여 시행될 때 직분은 이 세상에서 교회의 존재를 위하여 그 역할(役割)을 다한다는 것이다.
칼빈(Calvin)은 직분의 의미를 지나치게 강조(强調)한다고 할 정도이다. 교회의 직분자(職分者)들은 하나님 자신의 인격(人格)을 대변(代辯)하는 자들이라고 한다. 칼빈(Calvin)은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직분은 고결(高潔)하며 동시에 필요한 기능(技能)이라고도 하였다.
1541년과 1561년의 교회(敎會) 헌법(憲法)에 보면 칼빈(Calvin)은 네 가지 형태의 직분(職分)을 말하고 있다. 즉, 목사(牧師), 교사(敎師), 장로(長老), 집사(執事)이다. 이에 대한 신학적(神學的)인 설명(說明)은 기독교강요(基督敎綱要) 1543년 판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직분의 제일 첫 형태는 목사(牧師)이다. 칼빈(Calvin)은 목사직(牧師職)을 에베소서 4장 11절의 주석에서 처음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It was he who gave some to be apostles, some to be prophets, some to be evangelists, and some to be pastors and teachers(엡4:11).”
칼빈(Calvin)은 이 해석(解釋)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목사(牧師)란 양 무리를 돌보는 일이 맡겨진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또 그는 "나는 목사(牧師)들이 교사(敎師)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5. 실천(實踐) 목회(牧會, Practice ministry)
칼빈(Calvin)의 영향력(影響力)은 정치(政治), 경제(經濟), 사회(社會), 문화(文化) 등 인간 삶의 모든 영역(領域)에 뻗쳐졌지만, 그는 제네바교회(Geneva Church)의 목회자(牧會者, Pastor)였을 뿐이다. 장 다니엘 브노와(Jean-Daniel Benoit)의 다음과 같이 칼빈(Calvin)을 평가했다. 우리는 그를 제네바의 개혁자로 말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아마 그를 제네바(Geneva)의 목회자(牧會者)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칼빈(Calvin)은 그의 영혼(靈魂) 속에서 목회자(牧會者, Pastor)였으며, 그의 개혁(改革) 활동(活動)은 많은 면에서 그의 목회(牧會) 활동(活動)의 결과(結果)와 연장(延長)에 불과(不過)했기 때문이다."
칼빈(Calvin)이 제네바교회(Geneva Church)의 순수(純粹)한 목회자(牧會者, Pastor)였기 때문에 그는 그만큼 큰 영향력(影響力)을 서양문화(西洋文化)에 끼칠 수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칼빈(Calvin)은 하나님 중심적(中心的)인 순수한 목회자(牧會者, Pastor)로서 그 시대(時代)의 정치논리(政治論理), 그 시대(時代)의 경제논리(經濟論理) 등 그 시대(時代)의 논리(論理)를 뛰어넘는 사상(思想)을 피력(披瀝)했으며, 이것이 그의 영구적(永久的) 영향력(影響力)이 되었다.
1) 목회자(牧會者)는 설교자(說敎者)여야 한다(The pastor must be a preacher).
첫째로 칼빈(Calvin)을 위시한 종교개혁자(宗敎改革者)들이 생각한 목회자상(牧會者像)은 무엇보다 먼저는 설교자(說敎者)였다. 칼빈(Calvin)은 교회의 두 표지로 말씀과 성례(聖禮)를 드렸다.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성례(聖禮)가 바르게 집행(執行)되는 곳에 교회(敎會)가 있다. 그러나 칼빈(Calvin)에게 있어서 성례(聖禮)는 '보이는 말씀'이었다. 그래서 칼빈(Calvin)을 위시한 종교개혁자(宗敎改革者)들에게 있어서 목회자(牧會者)는 하나님 말씀의 사역자(Minister verbi divini)였다.
칼빈(Calvin)은 카톨릭교회의 성직자(聖職者)들이 성례(聖禮)를 집행(執行)할 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큰 소리로 선포(宣布)하지 않는다고 비판(批判)했다. 이 선포(宣布)의 말씀이 성례(聖禮)를 성례(聖禮)되게 하는 것이다. 칼빈(Calvin)은 성례(聖禮)를 집례(執禮)할 때 성례에 관한 설교(說敎)를 할 것을 권고했다. 칼빈(Calvin)은 설교자가 설교를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말씀 속에 빛남으로 그의 종들을 통해 말씀할 때마다 마치 그가 우리와 대면(對面)해 가까이 있는 것처럼 그것에 의해 감동(感動)되는 것이 마땅하다." 고 말했다. 또한 그리스도는 "그들의 입이 자기의 입으로 간주(看做)되고 그들의 입술이 자기의 입으로 간주(看做)되기를 원한다." 고 말했다. 그래서 목회자(牧會者)의 직임이야말로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최고(最高)의 직임(職任)이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준 많은 중요한 은사들 가운데 독특(獨特)한 특권(特權)은 그가 사람들의 입과 혀를 자신을 위해 성별(聖別)하고 그것들 안에서 자신의 음성(音聲)이 울리게 한 것이다." 라고 칼빈(Calvin)은 말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왜 목회자들을 사용하시는 것인가? 칼빈(Calvin)은 그 이유를 이렇게 열거했다. 우선 우리 인간들을 하나님의 사신(使臣)으로 사용한 것은 우리 인간에 대한 존중을 선포한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 인간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宣布)하는 것은 듣는 자들을 시험(試驗)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직접 말씀한다면 지체(遲滯)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2) 교육(敎育)과 목회(Education and Ministry)
칼빈(Calvin)에게 있어서 목회자(牧會者)는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성경(聖經)을 부지런히 연구(硏究)하는 학자(學者)가 되어야 했다. 칼빈(Calvin)은 "만약 무엇보다도 먼저 학자(學者)가 되지 않는 다면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좋은 사역자(使役者)가 결코 되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예언(豫言)이란 성경에 대한 단순한 해석(解釋)이 아니라 현재(現在)에 적용할 수 있는 지식(知識)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Calvin)은 "선하고 신실한 목자의 직임(職任)은 단순히 성경을 설명하는 것에 한정(限定)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힘과 능력을 더하기 위해 진지(眞知)함과 예리(銳利)함을 가져야 한다." 하고 말했다. 칼빈(Calvin)은 병석에 누워서도 제자들에게 구술(口述)하여 저작(著作) 활동(活動)을 계속했다. 병문안(病問安)을 왔던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겨 좀 쉬라고 권면(勸勉)하면,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대답했다.
종교개혁자(宗敎改革者)들은 중세교회(中世敎會)의 성직자(聖職者)들이 입던 제사장(祭司長) 예복(禮服) 대신에 샤우배(Schaube, 앞이 터지고 주름 잡힌 외투)라고 하는 세속(世俗) 학자(學者)의 가운을 입기 시작했다. 은 1523년 가을에 이 가운을 입기 시작했으며, 루터는 1924년 10월 9일 오전에는 수도사(修道師)의 옷을 입고 설교(說敎)했으나 그날 오후부터 샤우배(Schaube)를 입고 설교(說敎)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샤우배(Schaube), 즉 학자(學者)의 가운이 프로테스탄트 목회자(牧會者)의 예복(禮服)이 되었다.
둘째로 칼빈(Calvin)에게 있어서 교회는 죄인(罪人)들을 위한 하나님의 학교(學校)였으며, 이 학교의 교과서(敎科書)는 성경(聖經)이었고 이 학교의 선생들은 목회자(牧會者)들이었다. 칼빈(Calvin)은 "가르치는 직임을 수행(遂行)하지 않는다면 그는 교회의 참된 목회자가 아니다." 라고 말했다. 제네바(Geneva) 교회의 교리문답(敎理問答) 서문에서는 교회는 항상 아동들을 기독교 교리(敎理) 안에서 바르게 교육하는 일을 힘써 행해 왔으나 로마 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는 이것을 전복 시켰다고 비판하고 교회(敎會) 교육(敎育)의 회복을 강조했다.
이 교리 문답 308항에서 목사가 "그리스도인은 자기 목사로부터 한번 교육을 받는 것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평생 동안 이 과정을 받아야 하는가?"하고 묻고 아동은 "계속(繼續)하지 않는다면 시작한 것으로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혹은 더 낮게 말해 끝없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여기서는 평생교육(平生敎育)이 강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칼빈(Calvin)은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것을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의 의무(義務)로 생각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의 평가에 있어서 바보들’ 이 되며 '그리고 아동들처럼' ,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게' 되기를 요구(要求)하신다고 말했다. 어떤 목회자가 회중(會衆)에게 가르칠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회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침을 잘 받아들일' 자세를 가짐으로써 '하나님을 위한 경건(敬虔)한 순종(順從)'을 나타내야 한다고 칼빈(Calvin)은 주장했다. 그렇다고 해서 회중(會衆)이 목사(牧師)의 잘못된 가르침까지 받아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3) 목회자의 인격(Pastoral Personality)
칼빈(Calvin)은 목회자를 영혼의 인도자(引導者)로 보았으며, 그 자신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적(靈的) 상담(相談)을 해주었다. 그 상담 대상자(對象者)들은 왕이나 제후(諸侯)로부터 평민(平民)에 이르기까지 실로 각계각층(各界各層)의 사람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칼빈(Calvin)은 내담자(來談者)들에게 용기와 애정(愛情)을 가지고 상담(相談)해 주었다. 목회자(牧會者)는 "왕들과 왕후들에게 자유롭게, 그리고 용기를 가지고 책망(責望)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민중(民衆)들이나 낮은 사람들에게 국한(局限)되어서는 안 되고 가장 작은 자로부터 가장 큰 자에까지 모든 사람을 복종(服從)시키기 때문이다." 하고 칼빈(Calvin)은 말했다.
또한 칼빈(Calvin)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설교(說敎)를 하고 나면 우리의 직무가 다 끝나서 쉬기만 하면 될 정도로 우리의 직무(職務)가 극히 제한적(制限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피를 책임져야 할 사람들에게 최대(最大)한 직접적(直接的)이고 쉼이 없는 관심(關心)을 기울이는 것이 필수적(必須的)이다. 왜냐하면 그 피를 잃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태만 때문일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칼빈(Calvin)은 목회자(牧會者)로서 교인들에 대한 각별(各別)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그는 생존(生存)한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교인들을 자녀처럼 생각했다. "하나님은 나에게 작은 아들을 주셨다가 데리고 가셨다. 그러나 내게는 전(全)기독교 세계(世界)에 무수한 자녀들이 있다." 칼빈(Calvin)은 아들을 역병(疫病)으로 잃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 "클로드 선생과 귀하의 아들 루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처음으로 접했을 때 나는 너무 정신(情神)이 산란(散亂)하고 당황(唐惶)해서 며칠 동안 우는 일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칼빈(Calvin)은 목회자(牧會者)의 삶은 사랑을 가르치고 실천(實踐)하는 삶이며, 그래서 가난한 삶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칼빈(Calvin)은 감독(監督)은 가난한 자들이 가지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것을 바람직하게 보았다. 교회법(敎會法)은 교회의 수입을 네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하나는 교직자(敎職者)를 위해, 하나는 교회 및 다른 건물(建物)들의 보수(補修)를 위해, 하나는 가난한 나그네나 가난한 본토 민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칼빈(Calvin)은 교회 수입에서 '적어도 절반'은 가난한 자의 몫이 된다고 주장했다.
칼빈(Calvin)을 포함한 종교개혁자(宗敎改革者)들은 카톨릭교회의 성직자(聖職者) 독신주의(獨身主義)를 비판(批判)하고, 목회자(牧會者)는 모범(模範)된 가정(家庭)을 이끌어가야 한다고 보았다. 칼빈(Calvin)은 서른두 살에 결혼하여 9년동안 모범된 가정생활(家庭生活)을 했다. 칼빈(Calvin)은 자녀가 하나였는가 아니면 둘 이상이었는가 하는 것은 칼빈(Calvin) 연구가(硏究家)들 사이에서 큰 논쟁(論爭)거리이다.
4) 목회자(牧會者) 영성(靈性, Pastor Spirituality)
루터는 참된 예배의 목적(目的)은 “각자의 개인적 신앙에 자양분(滋養分)을 공급해주고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교회(Catholic church))는 미사를 선행(善行)이요 회생제사로 보았기 때문에 신앙이 없어도 미사의 희생 제사를 바치는 자는 그 행위 자체로서 실제적(實際的)인 제사(祭祀)의 효과(效果)가 있다는 사효성(事效性, opus operatum)을 주장(主張)하게 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칼빈(Calvin)도 중세교회(中世敎會)의 사효성(事效性)을 부정(否定)하였기 때문에 목회자의 내적(內的) 소명(召命)을 강조했다. 내적 소명은 목회자(牧會者)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식하는 것으로 본인 이외의 아무도 그가 하나님의 소명(召命)을 받았는지 확인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내적 소명(召命)없이 목회자(牧會者)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칼빈(Calvin)은 주장했다.
칼빈(Calvin)은 이렇게 한탄했다. "목회자의 직임을 신실(信實)하게 수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도 힘드는 지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오늘날 백 명중에 거의 한 명도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목사의 직임을 하찮고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면서 그 직임을 시작한다. 그리고 후에 경험에 의해서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게 알지 못하는 것을 열망(熱望)했는지를 알게 되지만 너무 늦다. 목사(牧師)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보수(報酬)를 목적(目的)으로 하는 용병(傭兵)들이 있다."
외적 소명(召命)은 교회가 목사로 부르는 것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고 칼빈(Calvin)은 말한다. 즉, 건전한 교리(敎理)와 거룩한 삶을 구비(具備)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칼빈(Calvin)은 기도(祈禱)와 성령(聖靈)의 역사를 강조했다. 칼빈(Calvin) 연구의 대가였던 워필드(Benjamin B. Warfield)는 칼빈(Calvin) 신학을 연구하고 난 다음 칼빈(Calvin)을 "성령(聖靈)의 신학자(神學者)"라고 규정했다. "그의 손에서 교회 사상 처음으로 성령론(聖靈論)이 제자리에 왔다. 어느 누구의 마음속에서 보다 그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영광(榮光)의 비전이 빛났으며,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으려고 했다. 어느 누가 그보다 자기를 피로 산 구주(救主)에게 헌신했는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칼빈(Calvin)의 모든 사상(思想)을 짓는 것은 성령의 전능한 능력에 의한 구원의 주권적 역사에 대한 의식이다. 그러므로 그는 무엇보다도 '성령의 신학자(神學者)'라는 위대한 이름을 받을 만하다."
칼빈(Calvin)은 말씀을 강조했지만, 말씀 그 자체로는 외적 말씀, 문자(文字)에 불과하고 그 말씀에 성령(聖靈)이 역사해야만 살아있는 말씀이 되는 것으로 보았다. "성령의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에 결합(結合)된다. 그러나 구별된다. 이는 외적 말씀이 성령의 힘에 의해 생명(生命)이 불어 넣어지지 않으면 그 자체로는 무용하다는 사실을 우리로 알게 하기 위함이다." 라고 칼빈(Calvin)은 말했다. 그러므로 칼빈(Calvin)은 "하나님이 그의 사역자(使役者)로부터 자신을 분리(分離)시키면 그들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고 말했다.
칼빈(Calvin)의 예정론(豫定論)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칼빈(Calvin)의 예정론이 기도를 불필요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칼빈(Calvin)은 누구보다 기도생활(祈禱生活)을 강조했다. 칼빈(Calvin)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어려운 처지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기도(祈禱)는 불필요하다고 말한다고 비판했다.
칼빈(Calvin)은, 우리의 기도(祈禱)에 의해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준비(準備)해 놓은 보화(寶貨)에 이른다고 했으며, 또한 "우리의 기도(祈禱)에 의해 보물(寶物)을 파낸다." 고 했다. 우리는 필요할 때 기도함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謙遜)을 배우고, 필요한 것을 받을 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계속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명상(冥想)하게 된다고 칼빈(Calvin)은 말했다.
칼빈(Calvin)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죽음 후에 영원(永遠)에 대한 희망이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다면...우리는 부끄럽게도 야수(野獸)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게 될 것이다." "육체에 눈멀고 우둔한 욕망(慾望)이 저항(抵抗)하지만 주님의 오심을 모든 것 중 가장 행복한 것으로 여겨...고대(苦待)하기를 주저하지 말자. 그는 구속주(救贖主)로서 우리에게 오실 것이며, 모든 악과 고통(苦痛)의 밑없는 심연(深淵)으로부터 우리를 구출(救出)하시고 그의 생명(生命)과 영광(榮光)의 복된 유산(遺産)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죽음의 날과 마지막 부활(復活)을 기쁘게 기다리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진급하지 못한다."
칼빈(Calvin)은 이처럼 그 마음이 하늘나라에 있었기 때문에 소신(所信) 것 목회(牧會)를 할수 있었다. 하늘나라에 마음을 둔 사람이 현세(現世)에서 훌륭한 목회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역설(逆說) 같지만 진리(眞理)이다.
칼빈(Calvin)은 제네바(Geneva)에서 주일에 두 번, 그리고 매주 월, 수, 금요일에 한 번씩 설교(說敎)했던 것 같다. 제네바 대학(Geneva University)에서 강의(講義)를 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상담(相談)에 응해야 했고, 시의 각종 회의(會議)에 참석하여 조언(助言)을 해야 했다. 또한 유럽 각지에서 제네바 대학(Geneva University)으로 유학(留學) 온 학생들에 의해 칼빈(Calvin)의 사상(思想)과 정신(情神)은 유럽 전역(全域)으로 확산(擴散)되어 갔다. 오로지 하늘나라에 마음을 둔 그가 국제적(國際的)으로 가장 큰 영향력(影響力)을 행사하는 국제적 인물(人物)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