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복음주의(福音主義, Evangelical Theology)

 

복음주의(福音主義, Evangelism)는 구원(救援)의 수단(手段)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속죄(贖罪)에 대한 신앙(信仰)과 개인적 귀의(歸依)에 대해 강조(强調)하는 특정(特定)한 프로테스탄트 분파(分派)이다. 대중적(大衆的) 복음주의(福音主義)의 정치적(政治的), 사회적(社會的) 영향력(影響力)은 대체(大體)로 특성상(特性上) 보수적(保守的)이다.

토마스 오든(Thomas Oden, 1931-2016, 미국 뉴저지주(State of New Jersey)에 있는 드류대학교에서 신학과 윤리를 가르친)"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복음(福音)을 신실(信實)하게 믿고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을" 복음주의자(福音主義者, Evangelicals)로 정의(定義)한다. 고대 교회 공의회, 루터, 칼빈, 침례파, 웨슬레의 교훈 아래 있는 사람들이 모두 복음주의자(福音主義者)에 속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복음(福音)을 믿는 자는 모두 복음주의자(福音主義者), 복음(福音)에 기초(基礎)한 신학(神學)은 모두 복음주의(福音主義) 신학(神學)이다.

1. 복음주의의 발단(The beginning of evangelicalism)

근본주의(根本主義)20세기초 미국에서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神學)에 대한 반동(反動)으로 생긴 신학(神學)이라고 한다면, 복음주의(福音主義, Evangelicalism)17세기 이후 독일 루터교회의 '죽은 전통'에 불만을 품은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운동에서 파생된 운동이다. 종교개혁 이후 독일교회에는 점점 신앙의 고정화 현상이 나타나 교리적(敎理的) 정통주의(正統主義)가 만연(蔓延)케 되자, 스페너(P. J. Spener, 1635~1705)와 그의 제자 프랑케(Francke, 1663~1727)를 중심으로 종교적 정열(情熱)과 내적(內的) 생명(生命)을 되살리려는 경건주의(敬虔主義) 운동이 일어나 독일교회에 커다란 각성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기독교(基督敎)는 생활(生活)이요 체험(體驗)이다"라는 표어(標語)를 가지고 성경의 생활화(生活化)를 강조하였다. 이들의 경건주의(敬虔主義) 운동이 바로 독일과 영국, 그리고 기타 유럽의 복음주의(福音主義)의 모체가 된 것이다.

복음적(福音的)이란 용어는 복음(福音)에 기초하려는 모든 개신교(改新敎) 교회에 붙여졌다. '복음주의(福音主義)'란 말은 칼빈주의(Calvinism)와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에도 적용되고, 영국에서는 웨슬리파 감리교회(監理敎會)에도 사용되었다. 이렇게 사용된 복음주의(福音主義)는 기독교의 기본(基本) 교리(敎理)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편, 성경의 권위(權威)와 완전 영감설(靈感設)을 강조하고, 의식적(意識的) 예배(禮拜)보다는 설교(說敎)의 우위성(優位性)을 주장(主張)하며, 로마가톨릭에 대해서는 짙은 회의적(懷疑的) 태도를 가지고 있다.

 

2. 복음주의의 역사(Evangelical History)

위에서 말한 대로 복음주의(福音主義)17세기 이후에 생긴 운동이지만, 그러나 초대교회(初代敎會)의 신경(信經)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초대교회(初代敎會)는 그것을 성경의 교훈(敎訓)과 관련하여 그 의미를 파악하고 변증(辨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복음주의(福音主義) 신학(神學)은 이 시대의 사상(思想)과 손을 잡고 다음 내용들을 확인(確認)하였다. 즉 성경은 하나님의 참된 계시(啓示)이며, 그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은 생명(生命)을 주시는 음성(音聲)으로 말씀하신다는 것, 하나님은 전능(全能)하신 창조주(創造主)요 우리는 그의 피조물(被造物)이라는 것,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聖肉身)에서 구속적(拘束的)으로 역사(歷史)속에 들어오셨다는 것, 하나님은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이시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完全)한 하나님인 동시(同時)에 완전(完全)한 사람이 시라는 것, ()의 권세(權勢)와 심판(審判)은 모든 인류에게 다 같이 실재(實在)한다는 것, 하나님은 자비(慈悲)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聖靈)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救援)하기 위해 먼저 찾아오셨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敎會)를 세우고 계신다는 것, 역사(歷史)의 완성(完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再臨)과 일반적 부활(復活), 최후의 심판(審判), 천국(天國)과 지옥(地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등이다.

복음주의(福音主義) 신학(神學)은 또한 초기(初期) 중세(中世)교회와 강하게 연결(連結)되어 있다. 캔터베리의 안셀름(Anselm, of Canterbury, 1033~1109)이 주장한 속죄론(贖罪論)에서 만족설(滿足說)을 비중있게 취하였으며, 끌레르보의 버나드(St. Bernard of Clairvaux, 1090-1153)가 주장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受難)에 대하여도 강조하였다. 특히 복음주의(福音主義) 신학(神學)은 종교개혁(宗敎改革)의 특징(特徵)들과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다. 복음주의는 철저하게 성경 중심성을 강조하고, 특별히 설교와 관련하여 성경의 능력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온다는 것, 교리와 생활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최종적인 권위(權威)를 갖는다는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성령을 있는 그대로 해석(解釋)하고 그것을 자국어(自國語)로 번역(飜譯)하여 널리 보급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 등에 깊은 책임감(責任感)을 느끼고 있었다.

복음주의(福音主義)는 또한 이신칭의(以信稱義(Justification by faith)교리를 강조하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은 인간(人間)의 노력(努力)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자기계시(自己啓示, Private revelation)를 신뢰(信賴)함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복음주의는 역시 교회는 성령(聖靈)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아버지를 직접적(直接的)으로, 개인적(個人的)으로, 또는 항상 가까이 나아가는 모든 신자(信者)들로 구성(構成)된다는 것을 기쁘게 고백(告白)하였다.

종교개혁(宗敎改革)은 제도화(制度化)된 여러 구조들과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 충동의 결과로 나타났으며, 이 속에서 복음주의 신학의 다양성(多樣性)이 발생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성례(聖禮)의 본질, 개인의 구원(救援)과 관련된 하나님의 작정(作定)의 위치, 천년왕국(千年王國)의 시기, 교회의 정치(情致)형태, 성경 영감(靈感)의 정확한 성격, 구원의 확신(確信)에 도달하는 방법, 문화와 국가에 대한 관계 등에 대하여 이해의 차이가 있었다. 오늘의 복음주의자(福音主義者)들에게는 이런 문제들 가운데 대부분은 약간 이차적인 중요성을 가진 문제로 생각될지도 모르는 것들이다.

복음주의(福音主義) 신학(神學)은 또한 대략 18세기 중엽에 일어난 복음주의(福音主義)적 각성운동(覺醒運動)으로부터 상당한 영향(影響)을 받았다. 18세기 미국에서의 대각성운동(大覺醒運動)과 영국에서의 감리교(監理敎) 운동(運動)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영국의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의 회심(悔心)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교제 기독교 정신에 따른, 엄밀하게 말하면 기독교 인도주의(人道主義)에 따른 사회정의(社會正義) 실천(實踐) 등을 강조했다는 특징이 있다.

18세기 영국에서는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Reverend John Wesley)가 민중(民衆)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는 감리교 운동을 하였는데, 감리교 운동(Methodist Movement)은 영국에 큰 사회적(社會的) 영향(影響)을 미쳤다. 당시 영국사회에서는 자본가들의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아동노동, 노예제도등의 많은 사회 구조악이 있었는데, 존 웨슬리는 기독교인의 사회참여를 강조함으로써 영국사회와 교회에 영향(影響)을 주었다. 그리스도 신앙을 사회적으로 이해한 존 웨슬리의 신학은 공교회(보편교회) 전통에 따른 예배(禮拜)와 기도(祈禱), 성서(聖書)묵상(黙想), 성만찬(聖晩餐)에 기반을 두고 있다. 기독교의 정통적 복음주의를 되살리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공교회적(公敎會的) 사상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렇듯 근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예배와 성례전(聖禮典M Sacrament)에 기반을 둔 영성과 신학을 근거로 하여 활발한 사회참여(社會參與)를 함으로써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나, 사회(社會) 복음주의(福音主義)등의 활동을 배경으로 하는 신학적 입장도 함께 지녔다.

근대 영국 성공회(聖公會) 복음주의 운동은 존 벤 신부(Rev. John Venn), 국회의원이자 노예해방운동(奴隸解放運動)을 지도한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 노동자 자녀들을 위해서 주일학교를 설립한 로버트 레이크스(Robert Raikes, 17361811), 개신교에도 순회설교자(巡廻說敎者)이며 감리교 운동의 지도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조지 휘트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 신부 등의 성공회 신자들과 사제(司祭)들은 활발한 사회참여(社會參與)를 하였다. 이 중에서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와 로버트 레이크스(Robert Raikes)는 존 벤 신부(Rev. John Venn)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노예해방운동, 동물을 오락에 사용하는(예를 들면 황소를 사냥개가 괴롭혀서 죽이는 오락)동물학대, 주일학교 설립을 통한 노동자 계급 어린이들의 인권운동, 교도소 환경개선을 통한 재소자 인권 향상등의 사회개혁을 하여 성인들의 당(영어: Party of Saints)이라고 불릴 만큼 영국사회의 윤리를 새롭게 하였다. 이러한 성공회 신자들의 사회참여(社會參與)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믿는 종말론적(終末論的)인 신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으로 근대 성공회 교인들은 사회개혁운동으로 그리스도가 세상에 올 그 날에 대비(對備)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근대 복음주의적 성공회 신자들의 사회참여에 대해 사회의 구조적(構造的) 개혁이 아닌 부분적(部分的) 개혁(改革)에 지나지 않는다는 즉, 보수적(保守的)인 사회개혁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노예해방운동(奴隸解放運動)으로 유명(有名)한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와 그의 동료들 중 하나였던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1797)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민중(民衆)들이 프랑스 혁명의 정신(精神)인 자유(自由), 평등(平等), 박애(博愛)에 관심을 갖는 것을 걱정하였다. 윌버포스와 버크는 민중들을 어리석고 천박한 그래서 영도자의 지도로 계몽되어야 할 자들로 여기는 보수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기에, 민중(民衆)들이 평등사상(平等思想)에 근거하여 참정권(參政權)을 행사하는 민주주의를 위험하게 여겼던 것이다.

영국의 구세군(救世軍) 복음운동(福音運動)은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 1829~1912)와 그의 아내 캐서린 부스(Catherine Booth, 1829-1890)는 구세군을 창시(創始)하여 개인과 사회의 균형(均衡)을 맞추려는 노력을 사회봉사(社會奉仕)로 실천하였다. 빈민(貧民)들의 비참(悲慘)한 삶을 목격(目擊)한 그는 그리스도인이 빵과 복음(福音)을 전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아내 캐서린과 함께 1865년 이스트 런던의 빈민굴(貧民窟)로 들어가서 그들에게 기독교 신앙(信仰)을 널리 퍼뜨렸다. 이 운동은 1878년 구세군(救世軍)이라 이름 붙여져 차츰 발전하였으며, 그가 죽을 때까지 세계 56개국에 퍼졌다. 저서로 암흑의 영국과 그 나아갈 길등이 있다.

그리스도 신앙(信仰)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가는 개인구원(個人救援)과 사회구원(社會救援)(기독교인의 사회참여)을 모두 강조(强調)하는 일부 복음주의(福音主義) 기독교인들은 앞으로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윤리성(倫理性)을 강조(强調)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실천(信仰實踐)을 주장하는 사회복음주의(社會福音主義, Social Gospel)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사회복음운동(社會福音運動, Social Gospel movement) 지도자 이자 미국(美國)의 조합교회(組合敎會, Congregational churches) 목사인 찰스 셸던(Charles Monroe Sheldon, 1857~1946)은 레이몬드라는 미국 철도(鐵道) 도시(都市)를 배경으로 한 기독교 소설인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에서 미국 기독교인(基督敎人)들의 이기적(利己的)인 신앙(信仰)을 비판(批判)하였다. 기독교인(基督敎人)과 성직자(聖職者)가 가난과 착취(搾取) 그리고 비리(非理)에 마주쳤을 때의 도덕적(道德的) 결정(決定)에 대해 말하고 있다. , 기독교인(基督敎人)으로서 도덕적(道德的) 결정(決定)을 해야 할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셸던의 신학적(神學的) 관심은 그의 사회적(社會的) 관심사(關心事)가 반영(反映)된 것이었으며, 사회복음주의(社會福音主義)를 창시(創始)한 신학자(神學者) 월터 라우셴부시(Walter Rauschenbusch,1861-1918)에게 영감(靈感)을 주었다. 라우셴 부시 자신도 셸던이 자신의 사상적(思想的) 근원(根源)이 되었음을 인정(認定)한 바 있다.

이때 복음주의(福音主義)는 위대하고 표준적(標準的)인 전통신학(傳統神學)을 재차 확인하고, 크리스챤 삶의 신학(神學)에 특별한 역점(力點)을 두었다. 구원(救援)에 이르는 신앙(信仰)이나 회심(悔心)의 성질(性質)에 대한 논의(論議), 비록 회심의 시간(時間)에 대한 차이는 있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식(意識)과 이에 따르는 성질(性質)의 변화(變化) 문제와 함께 계속 전면(全面)에 나타났다. 성화(聖化)의 수단(手段)과 그 가능성(可能性)도 역시 강조(强調)되었는데, 성화의 시간과 성취에 대하여 약간의 차이가 다시 한 번 있었다. 공동의 영적(靈的) 삶의 신학(神學)이 또한 강조(强調)되었는데, 교회의 갱신(更新)과 세계의 복음화(福音化), 그리고 사회의 개선(改善)을 특별히 강조했다.

1980년대에 와서 복음주의(福音主義) 신학(神學)은 크리스천 삶의 신학(神學, Theology of Christian Life)에서 벗어나 진지(眞知)한 성경해석(聖經解釋) 작업과 이를 반영하는 사상(思想)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중세초기(中世初期)와 종교개혁시대(宗敎改革時代)처럼 정통신학(正統神學)의 유산(遺産)을 활기(活氣)차게 선택(選擇)하려는 증거(證據)를 보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바로 그 당시에 복음주의(福音主義) 신학은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과 충돌(衝突)하고 있었다.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은 옛 계몽주의(啓蒙主義, Enlightenment) 운동의 합리주의(合理主義, Rationalism)와 신지식(神知識)에 이르는 다리로서 인간의 자각(自覺)을 강조(强調)하는 후기 칸트 철학(Kant philosophy)의 결합이었으며, 이 신학(神學)은 낭만주의(浪漫主義, (Romanticism) 시대에 호소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한 배경(背景) 가운데서 복음주의 신학은 그 새로운 견해들과 타협(妥協)함으로 약화되거나 후퇴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그 침체를 변호하려는 노력도 일어나고 있었다.

이들은 정통신학의 정수를 옹호하는데 눈부신 활약을 하면서도, 자주 그 당시 사상의 많은 부분을 버리고, 크리스천 삶의 신학(神學, Theology of Christian Life)에 대한 독특한 복음주의적인 강조점을 약화(弱化)시켰다. 따라서 모든 신학의 최종적인 형성을 종교개혁시대의 신앙고백(信仰告白)에 끼워 넣은 인상(印象)을 주었다. 이때 복음주의 신학의 빛을 희미하게나마 비추어 주던 학파가 있는데 바로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ayper, 1837~ 1920. 네덜란드의 수상이자 신학자) 이후에 나타난 화란학파(The Dutch School)이다. 이들은 정통신학(正統神學)의 전통을 확인하고, 모든 부분에서 크리스천 삶의 신학(神學, Theology of Christian Life)에 대한 중요성(重要性)을 깊이 깨닫고 있었으며, 동시에 많은 문제점들을 느끼고 그 당시 발생되는 문제들에 접근하고 있었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ayper)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두가지 명령을 말했다. 하나는, 문화명령(Cultural Mandate, 1:28)인데 이 세상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여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소위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 28:18-20)인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이다.

19세기 후반에 자유주의 신학의 압력(壓力)은 계속 증대되고, 복음주의는 약화(弱化)되었기 때문에, 더욱 더 방어적(防禦的)인 복음주의 신학이 근본주의(根本主義) 형태로 나타났다. 그 가장 중요한 보루는, 교회와 사회가 파멸(破滅)을 향하여 돌진(突進)한다고 주장하는 극단적(極端的)인 천년왕국설(千年王國說)이었다. 그리스도교는 '현재(現在)'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모든 것을 '미래(未來)'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중반에는 복음주의 신학 안에 어떤 활기(活氣)가 일어나고 있었다. 영국 학자들이 진지하고 학문적인 성경해석(聖經解釋) 방법의 접근에 공헌(貢獻)하였고, 미국 학자들은 조직신학(組織神學), 변증학(辨證學), 윤리학(倫理學)같은 조직신학의 보조학문 영역에서 열심히 연구하였다. 화란학파(The Dutch School)와 메노나이트파(Mennonites, 16-17세기 유럽의 종교개혁 당시 혹독한 핍박을 받았던 근원적 종교개혁자들(Radical Reformers)는 중요한 여러 종류의 출발점부터 사회적(社會的) 행동(行動)의 신학들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오순절파(五殉節派)의 카리스마 운동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교회를 통해 강하게 그리고 초자연적(超自然的)으로 나타나신다는 성령신학(聖靈神學)을 선언(宣言)하였다.

 

3. 영적신학(Spiritual Theology)

마지막으로, 복음주의 신학은 영적신학(Spiritual Theology)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위대한 신학 전통의 일부분인 삶의 신학(Theology of life)의 방법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정통(正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聖經)은 신학(神學)의 중심(中心)일 뿐만 아니라, 명상(冥想)하고 기도(祈禱)하며 연구(硏究)해야 할 대상이다(The Bible is not only the center of theology, but also the object of meditation, prayer, and study). 신학연구의 목표(目標)는 신학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The goal of theological study is not to know theology, but rather to know God). 학문적(學問的)인 만족(滿足)에 대한 유혹(誘惑)은 극복되어야 한다. 즉 신학(神學)은 사랑의 공동체(共同體)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再臨)과 결산(決算)의 날이 가깝다는 자각(自覺)에서 행해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복음주의(福音主義) 신학(神學)의 작업(作業) 전체는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위하는 것이다.

 

4. 한국교회와 복음주의(Korean Church and Evangelicalism)

한국교회(韓國敎會)는 일반적으로 '복음주의적(福音主義的)'이다. 복음주의(福音主義)는 요약해서 말한다면, 경건주의(敬虔主義)에 개혁주의(改革主義)가 가미(加味)된 운동(運動)이라고 하겠다. 복음주의자(福音主義者)는 그러기 때문에 성경(聖經)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대원칙(大原則)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한국의 복음주의는 현재 여러 교파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활발(活潑)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韓國福音主義神學會)가 있고, 한국복음주의협의회(韓國福音主義協議會)가 있고, 복음주의사상(福音主義思想신앙(信仰사업(事業) 확장(擴張)에 힘쓰고 있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韓國福音主義協議會)는 각 교단의 대표들이 아니라 개인들이 모인 단체이기 때문에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모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한국교회(韓國敎會)의 영향력(影響力)이 있는 지도자(指導者)들의 모임이며, 진보(進步)와 보수(保守)를 넘어서서 한국교회(韓國敎會)의 연합(聯合)과 갱신(更新)을 논의(論議)하는 중요(重要)한 단체(團體)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韓國福音主義神學會, Korea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는 한국의 개신교(改新敎) 보수주의(保守主義)의 신복음주의적(新福音主義的) 신학자(神學者)들의 모임으로, 복음주의(福音主義) 신학자(神學者)들에 의해 태동(胎動)된 개신교(改新敎) 신학회(神學會)이다. 1981년 서울 서대문 소재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에서 14명의 신학교수들 모여 김명혁 교수, 손봉호 교수, 이종윤 교수가 초안한 회칙을 통과시키고 임원을 선출하였다. 초대 회장으로 한철하 박사, 부회장은 오병세 박사와 김명혁 박사, 총무는 이종윤 박사, 서기는 손봉호 박사, 그리고 회계는 이형기 박사였다. 신학회는 한국복음주의구약신학회, 한국복음주의신약학회,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한국복음주의선교신학회,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등 여러 분과학회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약 1000명 정도의 교수(敎授)들이 등록되어 있다. 신학회(神學會) 학회지(學會誌)로는 성경과 신학이 매년 4권씩 발행된다. 한국기독교학회(韓國基督敎學會)와 더불어 한국(韓國)의 양대(兩大) 신학회(神學會) 중 하나이다. 현재 회장은 원종천 교수이며 수석 부회장은 이승구 교수 그리고 임원택 부회장과 총무로 강규성 교수가 있다.

비록 사상(思想)과 교파(敎派)의 배경(背景)은 다르나, 성경(聖經)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복음의 정열(情熱)을 가지고, 경건(敬虔)하게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복음주의자(福音主義者)라고 한다면, 한국복음주의운동(韓國福音主義運動)은 소망(所望)스러운 운동(運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경계할 것은 복음주의(福音主義)가 경건주의(敬虔主義)에 흐르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최근 미국의 복음주의(福音主義) 신학(神學)에 비해 유럽의 복음주의(福音主義) 신학(神學)이 약세에 있는 것은 경건주의(敬虔主義) 운동(運動)의 영향 때문이다. 경건주의(敬虔主義)가 내세운 내면생활(內面生活)과 현실도피(現實逃避) 경향(傾向) 위주(爲主)의 기독교(基督敎)는 얼마 안가서 교리적(敎理的)으로 이질화(異質化)의 염려(念慮)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