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비 콕스(Harvey Cox, 1929년-)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종교학자 하비콕스(Harvey Cox)는 라인홀드 니버, 폴 틸리히 이후 20세기 최고의 종교학자로 꼽히고 있다. 하비콕스(Harvey Cox)에 의하면 세속(世俗)이란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첫째로, 이 세대(世代) 혹은 시대(時代)를 의미한다. 둘째, 이 세상(世上)을 의미한다. 세속이란 변화하는 이 세상, 즉, 영원한 종교적(宗敎的)인 세계에 대비(對比)되는 것을 말한다. 참다운 종교(宗敎)의 세계는 비시간적(非時間的) 이며 불변적(不變的)인 반면, 세속세계(世俗世界)는 일시적(一時的)이며 가변적(可變的)인 것이다. 따라서 세속(世俗)이란 말은 어떤 열등(劣等)한 것을 암시(暗示)한다"고 한다.
하비 콕스(Harvey Cox, 1929년-)은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사회윤리학을 강의했던 신학자이다. 교회의 세속화, 교회의 자본주화에 대한 경고로 유명하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와 예일 신학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하버드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7년 미국 침례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와 예일 신학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하버드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2년부터 1년간 서독의 베를린에서 거주하면서 동독 교회와 하버드대학교 간의 연락을 받는 일을 하였다. 귀국 후에는 흑인 민권운동에 참여했으며, 보스턴의 흑인거주지역에서 살면서 흑인의 권리를 신장시키기 위한 사회운동을 하였다.
하비 콕스는 자신의 저서인 《세속도시》에서 도시화와 개인주의의 확산에 대해 긍정하고, 성경에 대해 문자적인 해석과 로고스(logos) 중심적인 해석을 배격하여야한다는 주장을 펼친 바 있는데,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론은 남아메리카에서 해방신학의 열풍이 부는 데에 일조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세속도시"(1965), "바보제(祭)"(1971)등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21세기 종교와 성령운동에 대해 갈파한 "Fire from heaven(하늘에서 내린 불), 한글로는 영성, 음악, 여성의 제목으로 번역"(1995)를 발표, 세계적 관심을 끌고 있다.
콕스는 기독교에 대해 종교적이 아닌 세속적 접근을 통해 산업화된 현대의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의미를 탐색한 문명비판 이론가이다. 요컨대 고도로 발달한 20세기 문명사회에서 전통적 사회규범을 해체하는 세속화 과정과 기독교의 가치구조를 무너뜨리는 종교 다원주의 물결 속에서 "사회와 종교의 결합","역사성과 초월성의 결합"이란 고리 없이는 진정한 자유와 공동체적 화합은 불가능하다고 역설하는 현실주의적 이상론자다.
기존의 교구중심 교회는 낡은 제도적 함정에 빠져있다고 비판하면서 산업사회의 분화에 걸맞게 산업현장, 병원, 학교 등 소외지역 에서 선교 공동체가 형성, 분화되어야 한다면서 성령운동에 내재한 원초적 영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지난 62년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수학하면서 기독교인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대화에 참여했는데 당시 디트리히 본 회퍼의 비종교적 기독교 해석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본 회퍼는 히틀러 암살모의에 가담했다가 처형당한 독일의 신학자이다. 남미의 급진적 종교운동인 해방신학과 바닥공동체운동 등 제3세계 종교운동에서 종교적 사고와 감수성의 새로운 르네상스를 찾고 있는 그는 70년대부터 민주화운동과 맞물려 "우상의 지배로부터의 인간해방"을 갈구하던 우리나라 종교계, 학계 지식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주요 저서로는 《신이 된 시장 The Market as God》, 《종교의 미래(The future of religion), 예수의 시대에서 미래의 종교를 보다》, 《신의 혁명과 인간의 책임 Gog’s revolution and man’s responsibility》(1966), 《바보제 The fesast of fools》(1966), 《영혼의 유혹 The seductiom of the spirit》(1973), 《세속도시에서 종교 Religion im the secular city》(1985), 《하늘에서 내린 불 Fire from heaven, 영성, 음악, 여성》(1994), 《예수, 하버드에 오다 When Jesus came to harvard》(문예출판사, 2004), 《세속도시 The secular city》(문예출판사, 2010) 등이 있다.
신이 된 시장(The Market as God)
‘시장경제’라는 종교를 바라보는 노신학자의 신학과 경제학이라는 두 가지의 시선으로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는 『신이 된 시장』.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신학자 하비 콕스는 이 책에서 갈수록 그 힘을 확장해나가며 신적인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시장’을 종교사와 경제사, 신학과 경제학을 통해 철저하게 분석하고 비판하며 그 과정에서 점점 거대화되고 기업화되어가는 종교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으로 돌아본다.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은 물론 다양한 기독교 서적과 연구, 프란치스코 교황이 발표한 최근 문서 등을 검토하면서 하나님을 모시는 교회가 어떻게 부를 획득해왔는지, 예수의 가르침과 성서에서 어떻게 부의 과도한 축적을 비판하고 부의 정기적인 재분배를 시도했는지, 프란치스코 교황이 부의 불평등에 대해 어떤 비판을 해왔는지를 면밀하게 검토하고 분석한다.
또 점차 불평등이 가속화되는 세계를 분석하기 위해 경제학과 경제사를 검토하면서 시장이 종교를 벤치마킹한 것들을 살펴보고, 시장이 종교와 얼마나 유사한지, 시장의 신격화를 통해 어떻게 성장해왔는지, 더 나아가 시장이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모색한다. 저자는 시장은 유사종교이며 그릇된 우상일 뿐이라고 이야기하며, 종교와 시장의 현재성과 진정한 위치를 돌아보게 한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이 사람들은 2,000만이 넘는 지구상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에 산다. 매일같이 혼잡한 사람과 차를 뚫고 다닌다. 한국의 집이 대부분 비좁은 걸 감안하면, 사람들은 고독을 많이 누리지 않는다. 이 사람들은 정말로 교회에서 수많은 인차에 떠밀리는 걸 좋아할까? 주변에 그 많은 동료 신자들이 있으면 더 안정감이 들까? 널리 칭송받는 유명한 교회에 다니면 빠르게 움직이는 익명의 대도시에서 개인의 존엄성과 자존감이 깊어지나?...나중에 여의도 순복음 교회 방문 경험을 곱씹어보니 나는 고무되거나 감동을 받았다기보다 일시적으로나마 나 자신이 어떤 거대한 존재, 그 거대함 때문에 의미심장한 존재의 일부라는 사실에 경외감을 들었다...초대형 교회는 새로운 종교 조직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이 형태는 분명히 기업 모델을 바탕으로 한다. 담임 목사는 최고경영자 역할을 하면서 전문적인 책임을 맡은 직원을 관장한다. 초대형 교회는 자기들끼리 경쟁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고객 중심으로 운영하기 위해 다양한 피드백 방식을 통해 노력한다.”- 하비 콕스, “신이 된 시장”중에서...-
종교의 미래(The future of religion)
예수의 시대에서 미래의 종교를 보다. 콕스 교수가 그의 정년 은퇴에 맞추어 출간한 책으로, 저자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두 가지 사항을 담아내고자 했다. 첫째는 지난 2,000년간의 그리스도교 역사를 살펴보면서 미래를 전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자신의 신앙생활의 편력을 기술하는 것이다. 한 종교 전체의 역사를 다루면서도 이 종교에 귀의한 한 개인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자로서, 또 종교 학자로서 저자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본래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왜곡되었으며 어떻게 그 본래적 생명력으로 되살아나고 있는지에 대한 진술을 역사적 실재에 근거하여 귀납적으로 도출해냈다. 학자이자 실천가인 하비 콕스 자신의 신앙생활과 그리스도교 2,000년의 역사와 미래 전망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지적인 탁월함과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준다는 평을 받으며 종교 분야 베스트셀러 자리에 올랐다.
세속 도시(The secular city)
하비 콕스는 세속화(Secularization)의 뿌리를 성서적 신앙에서 찾는다. 성서적 세계관은 세계의 비신격화, 정치의 비신성화, 가치의 상대화를 이루었다. 자연의 힘, 사회제도, 이데올로기에 대한 우상 숭배적 경배가 성서의 창조 교리와 역사이해에 의하여 무너졌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의 혹독함으로부터 해방되고, 실용적인 사회 정책을 발달시키게 되었다. 그 결과 전적으로 세속적이고, 실용적이고 가변적인 현대 도시인의 생활방식이 생겨났다. 세속화 신학자들이 이해하는 현대인은 종교적이거나 반종교적이지 않고, 단순히 비종교적이거나 세속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무 종교성, 종교성의 결여를 한탄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인간이 영지주의적, 신화적, 더 나가서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버린 것일 뿐이다.
하비 콕스는 자신의 저서인 《세속도시》에서 도시화와 개인주의의 확산에 대해 긍정하고, 성경에 대해 문자적인 해석과 로고스(logos) 중심적인 해석을 배격하여야한다는 주장을 펼친 바 있는데,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론은 남아메리카에서 해방신학의 열풍이 부는 데에 일조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오해도 많고 말도 많았던 책이다. 필자와 같은 전통 보수주의 교단에서는 거부감을 표시한다. 보수교단의 거부감은 책 속에서 저자가 교리에 함몰되어 현실을 외면하는 부적응을 질타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세속도시가 교회의 지향할 바라는 잠재적 의도 자체에 대한 거부이기도 한다. 보수교단에서 '세속화'는 저자가 주장하는 보편적 도시의 개념이 아닌 타락과 매치시키는 오해 때문이다.
하비콕스는 세속도시의 형체에서 익명성과 기동성으로 정의 한다. 더 나아가 세속도시의 모습을 실용주의 불경성이란 단어로 풀어낸다. 그동안 도시를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의 개념으로 정의한 반면 콕스는 철학적의미를 부여하여 보편에서 개체로의 변혁으로 이해 한다. 익명성과 기동성, 실용성과 불경성은 성과 속의 이분법적 구분을 거부하고 기술도시로의 변모를 꾀한 결과다.
세속화는 비신화이며, 교리적 교회가 실용적 교회 즉 봉사적 교회로의 탈바꿈을 요구 받는다. 교리적 교회는 정통과 권위에 의해 지배 된다. 세속도시는 기술도시로 권위가 아닌 기술이 지배하고 모든 것이 평등하다. 평등은 기술로 만들어진 고속도로를 통해 이동성이 보장되고, 익명성의 출현으로 계급체계가 무너진다. 콕스는 9장 성과 세속화에서 왕관을 쓴 여성의 이미지(미인대회)에서 중세의 왕이 쓴 왕관을 채용한다. 심지어 그는 "기독교 이전 시대의 농업여신 제사의 유물'(225쪽)이라고 까지 말한다. 그녀는 인간의 욕망을 표출하는 상징인 것이다. 보수교단이 세속화를 거부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이기도 하다.
1965년에 출간된 책이다. 벌서 반세기가 지난 구시대적 유물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세속도시 논쟁은 좀처럼 사그러 들지 않았고, 오히려 커지고 있다. 심지어 그토록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던 보수교단에서도 겉으로는 세속화를 부인하면서 교회 안의 프로그램과 신자의 삶에는 보편화 되었다. 기술과 이동성, 익명성과 불경성을 대형교회는 모두 가지고 있다. 교리와 상관 없이 세속화를 이미 침투했으며 거부할 수 없는 삶의 패턴이 되었다. 저자의 관점이 이후 다소 변하기는 했지만 세속도시란 화두는 여전히 유효하고 논의가 필요한 주제다.
영성, 음악, 여성 (Fire from heaven, 하늘에서 내린 불)
"영성, 음악, 여성"에서는 1개의 장을 할애해 한국사회의 종교현상을 분석하고 있기도 하다. 무속종교의 포용과 사회적 대응력의 성장에서 한국종교의 성공원인을 찾은 그는 한국교회의 원초적 에너지와 정의를 추구하는 민중 신학의 열정 등을 들어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면서도 무속을 지나치게 수용함으로써 나타난 주체성의 상실 지나친 상업화, 교회지도자의 카리스마화 등을 경계한다.
콕스는 한때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방문하고 인천 순복음교회에서 설교함으로서 한국의 오순절 운동에 대해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라고 말했지만, 그의 저서에서 순복음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콕스는 "성령운동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운동으로 열매를 맺어야 하며 성령의 역사는 예수그리스도의 삶 자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성령운동이 교회의 제도와 권위주의에 묶일 경우 그 역사가 제한 받는다"고 역설한다.
미국의 목회잡지 [미니스트리 투데이](The Ministry Today) 1997년 10월호에 오순절 계통의 열정적인 성령운동에 대한 연구가 소개된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 보고된 19억 5천만 그리스도인 가운데 24.5%인 약 4억 7천 9백만 명이 오순절 교인이며 2천년도에는 26%인 5억 5천 4백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했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충격적인 인물이 [세속도시]의 저자 하비콕스였다.
그는 본래 성령운동에 대한 부분을 부정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1967년 [타임]지에 '하나님은 죽었는가?'(Is God Dead?)라는 글에서 앞으로 기독교 미래는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같은 전통적인 교단만 남고 성령운동을 하는 교단은 쇠락할 것이라고 전망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타임지에서 30년 전 미국전역을 들끓게 했던 하비콕스의 글을 기념하는 30년 기념특집을 마련하기 위해서 하비콕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기에서 타임지 편집인은 하비콕스에게 자신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하나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당신의 글이 신문잡지 판매대를 강타한 이후 30년 동안 왜 장로교, 감리교, 성공회 같은 기존 교단들이 최고 교세를 과시했던 때보다 20%에서 40%까지 교인수가 줄어든 반면, 성령운동 교회를 중심으로 한 일부 신흥 교단들의 교인 수는 2배에서 3배나 늘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라는 질문이었다.
콕스는 이 질문에 충격을 받고 성령운동에 대하여 몇 년 동안 연구하고 내놓은 책이 [영성. 음악. 여성](Fire from Heaven)이라는 책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콕스가 그의 저서, "영성, 음악, 여성"에서 이야기하려는 성령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영성, 음악, 여성』은 오순절 운동에 대한 중요한 연구서 중의 하나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20세기 초에 시작된 성령운동이 1세기가 지나기 전에 약 5억의 사람들을 성령운동교회의 교인이 되게 한 것을 볼 때 오순절 운동은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세계적인 운동의 창시자를 1906년 LA의 아주사 스트리트(The Azusa Street Revival)에서 성령운동을 시작한 윌리엄 시모어(William J. Seymour)라고 주장한다. 이미 1900년 찰스 파함(Charles Fox Parham)의 베델성경학교(Bethel Bible College)에서 아그네스 오즈만( Agnes Ozman)이라는 백인 여자가 방언을 한 사건이 있었지만, 방언기도는 교회사를 통해서 계속되었기 때문에 방언기도만으로 이 운동의 기원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아주사 스트리트 부흥회 출신 선교사들이 미국 각지와 전세계로 퍼져나가 말씀을 전파함으로써 다음 세대에 크게 성장한 성령운동의 씨앗을 뿌렸기 때문에 아주사 부흥운동(The Azusa Street Revival)을 현대 오순절운동(Pentecostal and Charismatic movements)의 효시(嚆矢, the beginning)로 보아야 한다.
이 운동에 대한 호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하비 콕스는 20세기 오순절 운동에 대하여 사회학적, 종교학적(Sociological and Religious)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이 운동에 대해 좀더 거시적이고 객관적인 이해를 얻을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순절운동의 내적 의미를 밝히고 그것의 원동력을 파악하게 되며, 기독교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할 수 있게 한다.
하비 콕스는 자신을 포함한 많은 신학자들이 예견하였던 하나님의 죽음 내지는 종교의 쇠락이 일어나는 대신에 왜 종교의 부흥이 일어났는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하였다. 지나간 25년간 기성 교단들은 20-40%나 감소하였으나, 오순절교회는 두 배, 세 배의 부흥을 하였다는 사실이 그로 하여금 이 현상을 연구하게 하였다(영국의 경우 지난 20년간 성공회는 150만에서 110만으로, 감리교회는 13,000 교회에서 7,000 교회로 감소하였다).
그가 발견한 성령운동은, 이제 전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으며, 그 교회의 구성원들은 현대 도시의 평범한 사회인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교회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권위적 교리와 전통적 예배의 냉랭함에 반발하는, 기독교에서 가장 체험을 강조하는 교파이다. 그러나 콕스는 아직은 성령운동 본래의 정신에 충실한 면이 있지만, 어쩌면 그들이 성령운동을 유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감추지 않는다.
1906년 4월 9일 로스앤젤레스 노스 보니 브래 애비뉴(North Bonnie Brae Avenue) 214번지 목조 단층집에서 기도하던 비천한 직업의 흑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였다. 그들의 인도자는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순회설교가 윌리엄 조셉 시모어(William Joseph Seymour)였다. 그들이 수 주 동안 함께 모여 기도했을 때, 혀 모양의 불길, 방언, 신유, 기타 표적들이 나타났다.
제2의 오순절 사건 이후 근처 아주사 스트리트(Azusa Street)에 있는 버려진 작은 교회를 임대했다. 당시 그 건물은 마굿 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1906년 4월 14일부터 이곳에서 매일 집회를 가졌으며 3년간 계속되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그 집회에 참석했는가? 개발의 꿈에 부풀어 희망을 안고 로스앤젤레스로 몰려든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악덕 부동산업자와 사기적인 도시계획 등으로 실망한 사람들, 산업성장의 중지로 야기된 취업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1907년에 몰아닥친 대공황 으로 실의에 빠진 사람들이었으며 이렇게 빈곤한 사람들은 새로운 희망을 줄 대상에 갈급해 있었다. 시모어는 바로 그런 희망을 그들에게 제공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지금 새로운 역사를 인도하고 계시며, 따라서 많은 이적과 기사들이 나타나 세계의 끝날이 다가옴을 입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종말론적 희망의 메시지를 그들에게 주었으며, 이 메시지는 성령의 은사들에 의해서 입증되었다.
성령운동이 성공한 이유는 원초적 영성을 회복시켰기 때문이다. 콕스는 원초적 영성의 세 가지 차원을 원초적 언어, 원초적 신앙심, 원초적 희망(Primitive language, primitive faith, primordial hope)이라고 부른다.
방언기도는 현대인이 결핍하고 있는 무아적 황홀감, 무아적 희열의 체험으로서, 심원한 본능적 통찰력과 활기차고 자유로운 느낌으로부터 인간을 가두어 온 인지기능의 창살과 장벽을 일시나마 파괴하는 체험이다. 그는 무아적 황홀감은 일상적 의식의 세계를 초월하는, 인간 심연에서 심연으로 전달되는 지각의 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이 방언은 2세기 몬타니즘(Montanism)에도 있었으며 그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유지되었다. 요한 웨슬리(Johan Wesley)도 방언기도에 대한 소식을 듣고 있었는데, 몬타누스(Montanus] )를 ‘진정한 성서적 기독교인’으로 묘사했으며, 세상에 존재한 최상의 사람 중 하나라고 칭송했다.
비교종교학에서도 무아적 소리 표현이 여러 종교 속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데, 콕스는 방언기도를 하나의 무아적 소리표현의 실례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콕스는 성령운동의 성공 원인 가운데 한 가지를 시대적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변화는 금세기에 수행된 온 세계의 도시화와 연관된다. 도시로의 이동에 의해 초래된 문화충격은 새로운 공동체 형성의 필요를 낳았으며, 성령운동은 이러한 사회, 문화, 경제적 위기에 직면한 사람들 속에서 급속한 성장을 보였다. 이러한 문화변동에 대부분의 교회들은 신속하고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보수주의자들은 교리만이 불변의 진리이며, 교회의 계급구조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주장만 했다.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시대의 조류에 적응하려고 노력했으나, 기능적 합리주의 문화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짐으로써 인간의 영적 세계의 중요성을 외면했다. 그런데 성령운동은 제3의 길을 제시했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신조를 거부하고 기독교 신앙의 신비를 보존했다.
또한 교회의 계급구조를 폐지하고 개인적 종교체험을 유지시켰다. 그들은 학문주의와 전통주의 모두를 배격하고 살아 숨쉬는 그대로의 인간 영성의 본원적 바탕에 눈을 돌렸다.
콕스는 성령운동에서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주장이 입증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운동이 확산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는 이 재림운동을 700년 전 요아킴 플로리스(Joachim de Floris 1130?-1202)가 말한 성령시대와 유사하다고 본다. 성령운동의 메시지가 강한 호소력을 가지는 이유는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외적인 표현뿐 아니라 그 표현을 넘어서는 기쁨의 기대 정서, 즉 설레이는 소망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천년기 감각, 즉 대단히 거대한 변화가 목하 진행 중이라는 문화의 가장 핵심적인 정서감을 의미한다. 이 예언이 성취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운동이 전 세계적인 종교부흥의 물결을 주도하는 이유는, 그것이 가진 인간의 원초적 희망에 대한 회복력 때문이다.
여성들이 성령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성령운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는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직접적인 체험, 즉 하나님과 각 개인의 직접적인 만남의 체험이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성령의 체험은 여성들로 하여금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하였고, 이것은 예배에서의 간증이라는 형식으로 여성들의 예배 참여를 자연스럽게 유도하였다. 더 나아가 급격한 산업화, 전문화의 과정에서 대가족제도가 무너지고, 새로운 가족관계가 형성되어야 하는 사회적 상황에서 성령운동의 메시지는 잘못된 가족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최고의 방편을 제공하였다. 기존 문화가 심어준 남성들의 권위적 처신을 변화시키고, 그들의 독단적이며 파탄적인 가계운영을 포기하게 하는 메시지를 강조함으로써 여성들에게 커다란 호응을 얻게 된 것이다.
여성이 성령운동 확산의 주체였다면 음악은 성령운동 확산의 주된 매개 수단이며 예배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콕스는 특별히 성령운동과 재즈음악과의 동질성과 상응성을 주장한다. 둘 다 미국의 하류사회에서 태어났으며, 여러 민족의 언어가 함께 사용되는 도시 로스엔젤레스와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무시당하고 조롱받았으나 나중에는 미국적 색채를 띤 세계의 정신을 지구상 모든 곳으로 전달하는 수단이 되었다.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이 당시 바흐의 합창곡과 회중 찬송이라고 하는 새로운 음악의 탄생과 함께 이루어졌듯이, 오늘날에는 재즈음악이 성령운동의 새로운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콕스는 재즈가 이제 인류 역사상 진정한 최초의 보편적 음악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어셈블리아 데 데우스(Assembleia de Deus)라는 브라질 성령운동 교단은 현재 1,100만 내지 1,500만의 교인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브라질의 학자들은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성령운동 교인들이 주일미사에 참석하는 카톨릭 교인들보다 더 많다고 평가한다. 이것은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가톨릭 세력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소위 ‘영적 정복’이 오늘날 반전되어 가톨릭 세력이 성령운동에 의해 영적으로 정복당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콕스는 성령운동이 중남미인들에게 엄격한 도덕적 감각과 신앙적 주체로서의 자신감을 불어넣어 줌으로써 그들의 삶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주었다고 본다.
콕스는 1991년 2월 8일 호주 캔버라에서 열린 WCC 세계대회에서이화여대 정현경 교수가 보인 춤과 강연에 대해서 보고하였다. 정현경은, 한국의 민속전통에는 한(恨)의 영이 있는데, 우리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성령의 임하심을 느끼고, 맞닿고, 맛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한의 영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녀는 “나는 더 이상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 대신 “나는 파괴되어 가는 생명들의 고통 속에서 우리와 함께 눈물을 흘리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녀는 성령이란 불교의 보살과 같이 득도한 존재로, 자비와 지혜의 여신이라고 말했다. 정현경에 대한 반응은 우레 같은 박수와 우레 같은 침묵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진정한 아시아 기독교의 확인이라고 환호하고, 어떤 이는 모든 것에 신성을 부여하는 범신론과 기독교가 이교도 문화에 굴복한 종교혼합주의라고 일축하였다. 콕스는 성령운동 교인이 아닌 정현경 교수가 성령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는 것 자체가 성령운동의 에너지가 성령운동 그 자체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원초적 영성의 분출로서 이 사건의 의의를 해석하고 있다.
콕스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특징을 두 가지로 지적하였다. 첫째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사라져가는 것처럼 보이던 전통적인 한국 종교 문화의 특징적 요소들을 사람들이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것은 콕스에 의하면 ‘무교적 기독교’라고 규정될 수 있는데, 한국의 전통종교와 기독교가 결합된 형태를 말한다. 그는 여의도 순복음교회 예배에서의 축귀와 안수, 신유기도, 열광적인 춤, 통성기도 등을 무속종교와 유사한 것으로 본다. 둘째로, 새로운 정치 경제구조와 폭발적인 도시화가 초래한 심각한 사회 부조리 문제에 사람들이 적절히 대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콕스는 한국의 괄목할 만한 경제발전과 폭발적인 교회성장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고, 그 근거를 한국 성령운동 교회들의 놀랄 만한 조직훈련에서 찾았다. 그는 80년대의 대규모 전도집회들을 예로 들고 각 교회에서 실시하는 총동원주일 등의 전도행사, 철야기도회, 성경공부, 구역예배 등을 예시하였다. 그는 이러한 교회성장을 위한 조직화 작업을, 회사를 확장해가는 기업적인 정신으로 해석하고, 이러한 한국 교회가 결국은 윤리적인 비판의 힘을 잃어버리게 될 것을 우려하였다.
콕스는 성령운동의 발상지가 미국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일종의 정서적인 애착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재즈와 함께 성령운동을 미국적 정신의 세계화라고 해 제국주의적인 발상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단순한 애국심의 차원인지 그 이상인지는 명료하지 않다. 콕스는 미국의 성령운동 가운데 염려스러운 부분들이 있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는 저열한 자기 자랑과 쇼맨십으로 포장된 허위의 성령운동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와 함께 건강과 물질축복의 신학이 만연하는 것에 대해서도 우려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진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20세기 성령운동을 20세기 말에 살펴볼 때, 여성해방에서 괄목할 성과를 이룩했으며, 음악이라고 하는 도구를 활용하여 이 운동을 크게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인종갈등의 극복은 실패한 것으로 보이고, 종말론은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초기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종교가 이제는 중산층의 세속적인 욕구충족을 위한 축복종교로 변질되었으며, 따라서 이 운동이 21세기에 과연 계속해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해 갈 것인지 의심스럽고 우려스럽다.
하비 콕스는 여성들이 이 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았으며 여성해방을 성령운동의 성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운동 교회가 여성목사와 여성장로제도 시행에 소극적인 것을 보면 여성의 역할과 지위는 여전히 제한되어 있는 것 같다. 또 개인의 내적인 변혁에 치중한 나머지 제도와 조직의 변혁에는 소극적이고 무관심한 것으로 생각된다. 오히려 지성적 계몽을 강조하는 진보적 교회들이 여성의 해방과 지위향상에 좀더 적극적이고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다.
콕스는 재즈가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보편적 음악으로서, 성령운동을 세계화하는 도구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으나 과연 재즈가 교회음악으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아직까지 재즈는 예배음악이라기보다는 전도음악 또는 준비찬송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스펠 송에 대한 심각한 우려의 목소리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콕스의 시각은 미국의 문화 식민주의적 발상이 아닐까?
콕스는 방언기도를 무아적 소리의 표현으로, 다른 종교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종교 다원주의적인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과연 종교 다원주의적인 관점을 가진 비교종교학이 성령운동을 해석할 수 있는 잣대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성령운동에 대한 종교학적, 사회학적 해석으로 성령운동을 정당하게 이해하고 분석해 낼 수 있을까? 성령운동과 한국의 무교나 이방종교와의 외형적 종교현상의 유사성에 기초하여 기독교와 타종교 간의 화해나 대화를 시도한다면, 성령과 세상의 영을 구별하지 못하는 영적 무지를 노출하게 될 것이다. 정현경 교수의 경우가 하나의 실례(實例)이다. 성령운동의 사회학적 이해의 결과는 결국 성령운동의 도덕적인 해이라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수준을 넘어갈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지적은 콕스의 성령이해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콕스는 성령운동의 현상만을 다루고 있을 뿐 성령운동의 내적인 의미, 즉 하나님의 구속사의 전개로서의 성령의 역할과 존재를 해명하는 데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창조자요 주님이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성자시대를 이어서 교회시대를 주관하는 성령시대의 주체로서 성령을 이해하고, 성령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친교 안에서 이해하는 전인적 이해(全人的 理解)(A holistic understanding, 全體論的 理解)가 필요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