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스트라스부르에서 칼빈의 3년간의 활동
피난민들을 위한 목회사역
프랑스 피난민들을 위한 목회사역은 칼빈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칼빈이 스트라스부르에 왔을 때가 1538년 9월초였는데 첫 설교를 한 날은 9월 8일이었다. 이때부터 칼빈은 목회자로서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종교적 자유를 찾아온 프랑스인들의 공동체를 칼빈은 ‘작은 프랑스 교회’라고 불렀는데 교인수는 400명에서 500여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이 성 니콜라스(St. Nicholas) 교회당에서 회집하였기 때문에 ‘성 니콜라스 교회’라고 불리기도 했다.
칼빈은 정기적인 설교, 성경 강해 외에도 예배의식의 확립, 교회음악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칼빈은 부처의 예배의식을 모방하여 프랑스 피난민교회 예배의식을 확립하였는데, 이것은 후일 개혁교회 예배의 모형이 되었다. 교회음악에 있어서 칼빈의 강조점은 시편 송이었다. 그는 영창이나 오르간 음악보다는 시편 송을 선호하였고 시편송이 예배음악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1539년에는 ‘시편찬송’(Psalmody)을 불어로 편찬, 출판하였다. 칼빈은 시편송은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을 높이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서 노래하는 것처럼 말씀을 우리 입술에 주신다고 본 것이다. 칼빈은 음악이나 음악적 기교보다는 가사와 가사의 내용을 특히 강조하였다. 그가 시편 송을 강조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복음적 내용 없는 음악적 기교는 무의미한 것으로 보았다. 곡조는 가사를 위한 것이지, 그 반대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칼빈은 월 1회 성찬식을 거행하였다. 칼빈은 성찬식을 미리 예고할 뿐만 아니라 성찬식에 참예할 이들도 미리 신청하도록 하였다. 그 이유는 성찬 참예자들에게 신앙을 독려하고 범죄한 이들에게 회개케 함으로써 합당한 성례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칼빈은 성찬식을 통한 삶의 변화, 곧 성화적 삶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스트라스부르에서 칼빈의 저술활동
칼빈의 중요한 사역은 저술활동이었다. 그의 저술활동은 그의 계속된 연구의 결과였는데 저술활동은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정립하고 이를 공표, 확산해 가는 중요한 작업이었다. 이곳에서의 저술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1536년에 출판했던 「기독교 강요」를 증보하여 제 2판을 출판한 일이다. 「기독교 강요」 제 2판은 1539년(라틴어판) 출판되었고 불어역본은 1541년 출판되었다. 이 책은 1536년도의 초판에 비해 3배정도의 지면으로 증보되었는데 전 17장중에서 6장은 전혀 새로운 장이고 다른 6개장은 수정, 증보된 장이다. 나머지 5개의 장은 1536년도 판의 2개장을 확장시킨 것이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볼 때 「기독교 강요」 제 2판은 초판(1536)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증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성경연구와 성경강해, 신학과 교회사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큰 도움을 주었지만 특히 부처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미국 칼빈신학교 교수였던 루이스 벌꼬프(L. Berhof)교수는 칼빈의 「로마서주석」 영역본 서문에서 “만일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쓰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지 않았다면 「기독교 강요」 개정판은 쓸 수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루터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 2판을 읽고 크게 기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 칼빈은 성경주석 집필을 시작하였는데, 그가 최초로 쓴 성경주석은 「로마서주석」이었다. 이 책은 1539년 출판되었는데, 이 저술은 칼빈이 제네바에서 시작하였고 스트라스부르에서 계속했던 바울서신 강의의 산물이었다. 칼빈은 단순히 후대 사람을 위해 주석집필을 시작했다기보다는 자신의 성경연구와 스트라스부르에서의 성경강해의 결과로 주석이 이루어져 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주석집필은 일차적으로 목회적 필요에서 저술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석은 학문적 깊이가 있는 주석으로 많은 칭송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그의 주석은 루터의 그것에 비해 역사적이고 철학적 깊이가 있으며, 멜랑히톤의 그것과는 달리 난해 구절 해설에 치중하지 않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칼빈의 「로마서주석」은 루터에게 있어서처럼 복음적 신앙의 기초이자 칼빈 신학의 구원론적 요체를 해명해 주는 책이 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로마서의 주제(Argumentum)들을 교리적으로 분석하고, 그 신학적 의미를 해명하였다. 칼빈은 제롬의 라틴어 성경(the Vulgate)에 의존하지 않고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희랍어 신약성경」(1527) 등 원어성경을 근거로 주석한 것은 당시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칼빈의 주석집필은 그의 생애동안 계속되었는데, 요한 계시록을 제외한 거의 모든 성경의 주석서를 집필하였다. 신약성경주석은 대부분이 1550년대까지 출판되었고 구약주석은 1551년에 출판된 이사야서가 첫 주석이었다. 칼빈은 약 20년에 걸친 긴 기간 동안 방대한 주석서를 집필하였는데, 그가 쓴 마지막 주석은 여호수아 주석이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저술한 칼빈의 또 한 가지 중요한 저서는 「사돌레토에 대한 답변」(Reply to Satoleto)인데, 이 책은 칼빈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특히 칼빈이 남긴 논쟁적 저술 중에서 이 책은 교회개혁의 의의와 목적, 필요성을 설득력 있는 필치로 서술하였다. 자코프 사돌레토(Jacopo Sadoleto of Modena, 1477-1547)는 도피네에 있는 카펜트라스(Carpentras in the Dauphine) 주교이며 1536년 이래로 추기경이 된 인물인데 칼빈과 파렐이 제네바를 떠난 틈을 타서 제네바 시민들에게 로마가톨릭으로 복귀하라는 강력한 권고의 서신을 보냈던 것이다. 라틴어로 쓴 이 편지에서 사돌레토는 개혁자들의 활동을 비판하고 로마 가톨릭에로의 복귀를 요구하였다. 이 편지는 스트라스부르크에 있는 칼빈에게 전달되었고 격분한 칼빈은 사돌레토 추기경의 편지에 답변하는 형식의 글을 썼는데 이것이 「사돌레토에 대한 답변」이다. 1539년 9월 1일자로 된 이 편지 형식의 글은 6일만에 쓰여진 글로서 사돌레토의 주장과 요구를 명쾌하게 반박하였다.
이상의 책들 외에도 칼빈은 1540년 기도서(Form of prayers), 「우리 주님의 성만찬에 관한 소논문」(Little treatise on the Holy Supper of Our Lord)을 각각 집필하였다. 후자의 책 성만찬에 대한 견해차가 개혁을 지지하는 이들을 분리하고 있는 현실을 염려하면서 쓴 작품인데 이 책은 60개항으로 이루어진 간단하고도 명료한 저술이다. 성찬교리에 대한 평신도들의 지침서로 적절한 것이었다. 칼빈은 이 책에서 로마 가톨릭의 성찬관을 비판하였고 루터와 쯔빙글리간의 견해차에 대해 상호이해와 동의를 모색하였다. 특히 이 글에서 성찬의 빈번한 시행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경외심 없는 성찬참여가 죄악임을 강조하였다. 이 책은 1545년 라틴어로 출판되었는데 루터는 이 책을 읽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멜랑히톤의 사위였던 크리스토프 페첼(Christoph Pezel)의 기록에 의하면 루터는 이 책을 읽고 크게 칭찬하면서 ‘나의 논적이 이전에 이와 같은 훌륭한 저서를 발간했더라면 우리는 그들과 일찍부터 화해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특히 주목할 한 가지는 이 성만찬에 관한 칼빈의 글 속에는 성례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주장한 마틴 부처의 영향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는 점이다.
다른 개혁자들과의 교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의 개혁자들, 특히 마르틴 부처와의 교제를 통해 예배와 교회론에 대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에 체류하는 동안 부처, 카피토 등과 긴밀히 교제함으로써 많은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스트라스부르를 대표하여 프랑크푸르트(Frankfurt, 1539), 하게나우(Hagenau, 1540), 보름스(Worms, 1540-1541),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 1541) 등지의 종교토론회에 참여함으로써 여러 개혁자들과 교제하며 종교개혁가로 성장하였다. 교회연합을 모색하던 이와 같은 회의에 참석한 것은 칼빈이 부처와 마찬가지로 교회연합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던 점을 알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회의는 독일황제 찰스 5세(Charles V)가 기독교 연합을 위한 목적으로 소집한 회의였는데 칼빈이 이 회의에 참가했을 때는 1539년 2월 21일이었다.
이 회의에서 칼빈은 비로소 멜랑히톤(Philip Melanchton)을 만났다. 사실 칼빈은 르페브르(Lufevre), 파렐(Farel), 올리베탄(Olivetan)등을 통해 프랑스 종교개혁에 대해서는 친숙히 알고 있었지만 독일 종교개혁에 대해서는 깊이 알지 못했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로 이주해 온 이후 부처를 통해서 독일에서의 개혁운동을 접하게 되었고 멜랑히톤을 통해 특히 많은 유익을 얻게 되었다.
칼빈은 멜랑히톤의 교제를 통해 루터의 개혁운동의 진수를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회의에서 처음 만난 칼빈과 멜랑히톤의 교제는 서로에게 유익을 끼쳤고 개혁의 정신을 고양해 가는데 상호 격려를 받았던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교제를 통해 칼빈의 박학함과 신학적 깊이를 확인한 멜랑히톤은 칼빈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신학자라는 점에서 ‘그 신학자’(The theologian)라고 불렀던 일은 잘 알려진 일이다. 후일 칼빈은 멜랑히톤의 「신학요의」(Loci Communes)를 불어로 번역하였고, 멜랑히톤은 칼빈이 세르베투스(Servetus)사건으로 비난받았을 때 칼빈의 입장을 지지했던 점은 두 사람의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칼빈은 프랑크푸르트회의 이후 1540년에 하게나우, 보름스, 그리고 1541년에는 레겐스부르크회의에 참가하였는데, 이런 회의를 통해 다른 개혁자들과 교제를 하면서 자신과 다른 프로테스탄트 동료들과의 신학적 일치와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칼빈은 루터와 만난 일이 있는가?
루터와 칼빈 양자는 서로를 만나기를 희망하였다. 양자는 서로의 작품을 읽으며 문서와 서신을 통한 교제는 있었으나 직접 만난 일은 없었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 칼빈은 그가 참석하는 종교회의에서 루터를 만나기로 약속했었으나 루터가 신병으로 불참하였으므로 두 사람간의 역사적인 대면은 무산되었다. 현재 칼빈이 루터에게 보낸 한 통의 서신이 남아있는데, 1541년 1월 21일자로 된 이 편지에서 칼빈은 “그리스도교회의 위대한 목사 마르틴 루터 박사에게, 나의 가장 존경하는 사부(師父)에게”(To the very excellent pastor of the Christian church, Dr. M. Luther, my much respected father)라는 글로 시작하였다. 칼빈은 자신의 저작들 몇 편을 루터에게 보내면서 동봉한 이 편지에서 칼빈은 루터의 지문과 충고를 요청하고 있는데 이 편지 마지막 부분에서는 루터를 “가장 저명한 분이자 그리스도의 가장 탁월한 사역자이며 나의 가장 존경하는 사부”(most renowned sir, most distinguished minster of christ, and my ever honoured father)라고 호칭하고 있다. 루터와 칼빈, 양자는 비록 직접 대면하지는 못했으나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