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근본주의 신학(Fundamental Theology)
근본주의 신학(根本主義神學, Fundamental Theology)이란 현대(現代) 과학(科學)과 과학적(科學的) 세계관(世界觀)에 보조(補助)를 맞추려던 1850년대 유럽에서 들어오기 시작한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神學)에 대한 반동(反動)으로 생긴 20세기 초 기독교(基督敎)의 근본교리(根本敎理)를 고수(固守)하려는 보수주의(保守主義) 신학운동(神學運動)이다.
기독교(基督敎)의 전통적(傳統的)인 신앙(信仰)을 지키고자 하는 운동(運動)이 특히 미국(美國) 개신교회(改新敎會)를 중심(中心)으로 일어났다. 이것은 특히 미국(美國)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교회에서 격렬(激烈)한 논쟁(論爭)을 일으켜 마침내 근본주의(根本主義)와 신보수주의(新保守主義)로 교파(敎派)의 분열(分裂)을 일으키게 되었다. 기본적(基本的)인 교리(敎理)로 삼는 5가지 교리(敎理)는 그리스도의 처녀탄생(處女誕生), 그리스도의 육체부활(肉體復活), 성경의 문자적 무오설(無誤說), 그리스도의 대속적(代贖的) 죽음 및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再臨) 등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재한(在韓) 미국선교사(美國宣敎師) 가운데서 이 신학사조(神學思潮)에 호응(呼應)한 사람이 나타나 선교직(宣敎職)을 사면(辭免)하고 만주지방(滿洲地方)으로 가서 전도(傳道)하다가 1945년 해방(解放) 후 한국(韓國)에 다시 돌아와 부산(釜山)에서 고려(高麗)신학교를 세우고 전통주의(傳統主義) 신학을 표방(標榜)하고 신학사상의 투쟁(鬪爭)을 개시하였는데 이것이 한국 장로교 분열(分裂)의 시작이 되었다.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神學)에서는 성서의 많은 부분 특히 창조(創造)와 기적(奇蹟)에 관한 기록을 신화나 설화(說話)로서 이해하고자 했는데, 이에 반하여 근본주의(根本主義) 신학에서는 성서(聖書)는 그 글자까지도 하나님의 영감(靈感)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 Verbal inspiration 을 주장하였다. 즉, 성서(聖書)는 정확(正確)하고 오류(誤謬)가 없으며, 역사(歷史)와 과학적(科學的) 사실(事實)을 담고 있다고 해석(解釋)한 것이다. 그 실례로 한국교회(韓國敎會)에는 구약성서(舊約聖書)의 창조(創造)이야기를 과학적 사실로 해석하여, 진화(進化)와 같은 과학적 사실들을 부정(否定)하고 의사과학(擬似科學, Pseudoscience)을 주장하는 창조과학회(創造科學會)라는 의사과학(擬似科學) 단체(團體)가 있기도 하다.
계몽주의(啓蒙主義) 사상(思想)의 영향(影響)을 받아 독일과 영국에서 일어난 자유주의(自由主義)는 19세기말 미국(美國)에서 강(强)한 세력(勢力)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성경의 객관적(客觀的) 계시(啓示)와 정확무오(正確無誤)한 권위(權威)에 정면도전(正面挑戰)하고, 그리스도의 처녀탄생(處女誕生),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대속교리(代贖敎理), 육체부활(肉體復活) 등에 대하여 회의(懷疑)를 느꼈다. 모세오경(五經, Pentateuch)의 저작권(著作權), 구약(舊約)의 연대적 순서, 복음서(福音書) 기록의 정확성(正確性), 바울서신의 저작권 등을 의심(疑心)하기 시작했다. 신학적(神學的)인 공격(攻擊)만이 아니라, 과학적(科學的)인 공격(攻擊)도 아울러 퍼부었다. 다윈의 진화론(進化論)이 인류와 세계에 대한 역사적(歷史的)이고 성경적인 견해(見解)를 불신(不信)하는데 사용되기 시작했다. 인간(人間)은 부패(腐敗)하고 타락(墮落)한 존재(存在)가 아니라, 완성(完成)을 향하여 진보(進步)하여 가는 것으로 해석(解釋)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비평(批評)에 대하여 역사적(歷史的)인 기독교(基督敎) 신앙(信仰), 즉 초자연적(超自然的)인 복음(福音)의 변호(辯護)와 전파(電波)를 위하여 일어난 것이 곧 근본주의(根本主義, Fundamentalism)운동이었다. 그러나 신학적(神學的)인 배경(背景)은 다양(多樣)하여, 이 운동(運動)에는 칼빈주의자(Calvinists), 알미니안파(Arminians), 침례교도(Baptists), 장로교(Presbyterians)도, 그리고 세대주의자(世代主義者)들이 한데 뭉쳐 있었는데, 그들은 20세기 초까지 공동(共同)의 적(敵)인 자유주의(自由主義)를 대항(對抗)해서 싸웠다.
1. '근본주의(根本主義, Fundamentalism)'라는 말
'근본주의'라는 말은 근본주의(根本主義)라는 말은 1915년 근본주의자들이 자신(自身)들의 신앙변증서(信仰辨證書)인 '근본(根本, Fundamental)'을 출판(出版)하면서, 1920년 침례교(浸禮敎) 기관지(機關誌) 「The Watchman Examiner」의 편집인(編輯人) 커티스 리 로우즈(Curtis Lee Laws 1868~1946)가 북침례교 총회안(總會案)의 반현대주의자(反現代主義者)들을 가리켜 사용(使用)한데서 비롯된다. 이 용어(用語)는 현대주의(現代主義) 신학(神學)과 현대문화(現代文化)의 세속화(世俗化) 양상에 대항(對抗)하여 싸우는 복음주의(福音主義) 개신교도(改新敎徒)들을 총체적(總體的)으로 넓은 의미(意味)에서 묘사(描寫)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예를 들자면, 이 용어는 첫째로 복음주의적(福音主義的) 개신교도(改新敎徒)들에게요, 둘째는 반현대주의자(反現代主義者)들에게다. 그들은 전통적(傳統的), 초자연적(超自然的, Supernatural), 성경적(聖經的)인 기독교(基督敎)의 원리에 동의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앞에서도 말한 바 있는 반현대주의자(反現代主義者)나 혹은 세속화(世俗化)에 대항하여 싸우는 사람들에게 적용(適用)되었다. 이 용어는 넓은 의미에서도 사용(使用)되고, 좁은 의미(意味)에서도 사용되기 때문에 그 묘사(描寫)는 다소 복잡(複雜)하다.
때때로 이 말은 일반적(一般的)으로 어떤 종교상(宗敎上)의 반현대주의자(反現代主義者)를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혹은 근본주의(根本主義)를 반대(反對)하는 사람들이, 남미에서 흔히 볼 수 있는대로, 복음적(福音的) 부흥운동(復興運動)에서 도를 지나치거나 반지성주의적(反知性主義)的)인 사람들을 가리켜 막연(漠然)하게 사용하기도 한다. 이 말을 그렇게 사용하게 될 때, 근본주의(根本主義)와 부흥운동을 혼동(混同)하게 되고, 따라서 부흥운동가(復興運動家)들의 뿌리와 밀접(密接)한 관계(關係)를 가지고 있는 몇몇 운동(運動)들과 혼동(混同)을 초래(招來)하게 된다.
예를 들면, 19세기 후반기(後半期)에 일어난 '성결운동(聖潔運動)'은 완전무죄생활(完全無罪生活)로 인도하시는 성령(聖靈)의 역사에 대한 체험(體驗)을 강조하였다. 20세기 초에 일어난 '오순절운동(五殉節運動)'은 영적능력(靈的能力)을 극적(劇的)으로 받아야 한다고 강조(强調)하였다. 이들은 반현대주의자(反現代主義者)인 근본주의자(根本主義者)들의 호전성(好戰性)을 채택하였기 때문에 근본주의적(根本主義的)이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들은 교회(敎會)와 관계(關係)에서는 독립성(獨立性)을 유지(維持)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이 모든 운동(運動)들의 공동 기원(起源)을 19세기 미국(美國) 부흥운동(復興運動)의 다양(多樣)한 유산(遺産)에 두고 있는 것이 확실(確實)하며, 그래서 그들은 보통 근본주의자(根本主義者)로 불려 졌지만, 좀 더 정확(正確)하게 말하면 부흥운동가(復興運動家)들이었다.
영국(英國)에서 근본주의(根本主義)라는 말은 더 넓은 의미에서 사용(使用)되고 있다. 여기에서 근본주의(根本主義)는 성경의 고등(高等)한 견해와 근본적(根本的)인 주장들을 가지는 복음주의적(福音主義的) 보수주의(保守主義)를 가리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제임스 팩커(J. I. Packer)는 이런 의미(意味)에서 그의 저서(著書) 「Fundamentalism and the Word of God」(London, 1958)에서 근본주의(根本主義)를 변호(辯護)했으며, 제임스 바르(James Barr)는 「Fundamentalism」(London, 1977)라는 저서에서 근본주의(根本主義) 운동(運動)을 비판(批判)하면서 보수주의적(保守主義的) 복음주의(福音主義)의 대부분의 분파(分派)들을 하나로 묶어 말하였다.
한편 미국(美國)에서는 근본주의(根本主義)가 호전적(好戰的)인 반현대주의적(反現代主義的) 백인(白人) 복음주의자(福音主義者)들을 가리켜 좁은 의미(意味)로 사용되었다. 미국(美國)의 흑인 복음주의자(福音主義者)들은 흔히 스타일에서는 부흥사(復興師)이고, 교리(敎理)면에서는 근본주의(根本主義)이며, 윤리(倫理)면에 있어서는 반현대주의(反現代主義)에 속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근본주의자(根本主義者)'라고 부르지 않는다.
2. 근본주의의 역사(曆史)와 특징(History and Characteristics of Fundamentalism)
근본주의 운동(運動)의 특징(特徵)들은 그 역사(歷史)에서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다. 에네스트 샌딘(Ernest. R. Sandeen)은 그의 중요한 연구서 「The Roots of Fundamentalism:British and American Millenarianism 1800~1930」(Chicago, 1970)에서, 근본주의(根本主義)의 주요한 근원(根源)은 다비(J. N. Darby)와 그 밖의 사람들의 저작(著作)에서 볼 수 있는 천년기전 재림예언운동(千年期前再臨豫言運動)이라고 지적하였다. 비록 영국(英國)에서 이 운동이 전통적(傳統的)인 교회를 떠난 플리머스 형제단(The Plymouth Brethren)을 만들어내기는 하였으나, 19세기 후반 미국(美國)의 장로교(長老敎)와 침례교(浸禮敎)같은 중요한 교파(敎派) 안에서도 근본주의(根本主義)의 표현(表現)들이 나타났다.
세대주의(世代主義, Dispensationalism)가 이 운동(運動)의 특징(特徵)이었으며, 스코필드(C. I. Scofield)의 관주성경(Reference Bible)은 거의 정경(正經)처럼 인정되었다. 또한 미국(美國)의 많은 세대주의자(世代主義者)들은 영국의 케직사경회의 온건(穩健)한 성결운동(聖潔運動)의 교리를 채택하였다. 세대주의(世代主義)는 이 시대에 교회의 파멸을 예고하면서, 20세기 초의 공격적(攻擊的)인 현대주의(現代主義) 신학(神學)의 발생에 대하여 투쟁(鬪爭)할 것을 고무(鼓舞)하였다.
특히 현대주의가 강했던 미국(美國)에는 현대주의(現代主義)에 대항하여 신앙(信仰)의 근본원리(根本原理)들을 옹호(擁護)하고자 하는 세대주의자(世代主義者)들이 많이 있었다. 북장로교(北長老敎)에서는, 보수주의자(保守主義者) 프린스톤 신학교(神學校)의 지성적(知性的)인 지도자(指導者)들 찰스 핫지(Charles Hodge), A. A. 핫지(A. A. Hodge), 워필드(B. B. Warfield), 메이첸(J. G. Machen)에 의해 강하게 유지(維持)되었다.
보수주의적(保守主義的) 장로교인(長老敎人)들은 우선 근본교리(根本敎理)를 옹호(擁護)하는 전략을 전개하였다. 특히 1909년부터 1915 년까지 12권으로 된 근본주의(根本主義) 총서(叢書) 「근본원리들(The Fundamentals)」이 출판되어 전통적(傳統的)인 교리들이 옹호(擁護)되었다. 이 총서(叢書)는 라이만 스튜어드(Lyman Steward)와 밀턴 스튜어드(Milton Steward) 형제가 희사한 25만 불과 19세기 후반의 가장 위대(偉大)한 부흥사(復興師)였던 드와이트 라이먼 무디Dwight Lyman Moody(1837-1899) 기념교회(記念敎會) 딕슨(A. C. Dixon) 목사의 편집(編輯)으로 이루어졌고, 집필자(執筆者)들은 당시 세계적으로 권위(權威)있는 미국과 영국의 보수주의 신학자(神學者)들이었으며, 전국적으로 300만권 이상이 무료로 배부되었다(George M. Marseden,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Oxford University Press, 1980, p. 118).
이 총서는 성경의 축자영감(逐字靈感)과 무오성(無誤性)을 강조하는 29편의 논문들을 중심으로, 기독교의 근본교리(根本敎理)들을 변호(辯護)하는 총 90편의 논문(論文)들로 구성되어 있다. 많은 근본주의(根本主義) 단체(團體)들이, 비록 한 가지도 표준적(標準的)인 것은 아니었으나, '근본주의적(根本主義的)' 교리들을 소유(所有)하고 있었다. 가장 공통(共通)된 요점(要點)은 성경(聖經)의 무오성(無誤性).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동정녀 탄생, 대리속죄(代理贖罪), 그리스도의 부활(復活)과 재림(再臨)이었다.
1920년대에, 현대주의(現代主義)자들을 대항하여 열심히 싸운 근본주의자(根本主義者)들은 주요한 북장로교(北長老敎)와 침례교(浸禮敎) 교단(敎團)들 안에서 세력(勢力)을 확보(確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작은 규모(規模)의 근본주의 논쟁(論爭)들이 다른 교파(敎派)들 안에서도 발생(發生)하였으며, 보수주의자(保守主義者)들과 자유주의자(自由主義者)들 사이에 이와 비슷한 분열(分裂)들이 미국(美國)과 캐나다에 있는 교회 안에서 발생(發生)하기도 하였다. 한편 근본주의자(根本主義者)들은 제1차 세계대전(世界大戰) 후의 도덕적 부패(腐敗)를 공격함과 동시에, 교회(敎會)와 문화(文化)의 부패(腐敗)도 공격(攻擊)하였다. 윌리엄 브라이언(William J. Bryan, 1860~1925)이 주도한 바 있는, 미국공립학교에서의 진화론(進化論) 교육(敎育) 금지운동(禁止運動)은 그러한 관심사(關心事)의 주요(主要)한 표현(表現)이었다.
그런데 1925년 미국(美國) 테네시주 데이튼(Dayton)시의 고등학교(高等學校) 생물(生物) 교사인 존 스코우프스(John Scopes)는 이 법을 어기고 진화론(進化論)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100불 벌금형(罰金刑)의 유죄판결(有罪判決)을 받은 바 있다. 근본주의자(根本主義者)들은, 진화론 교육(敎育)의 보급은 미국인의 생활에서 성경의 권위를 손상(損傷)시키며, 도덕적(道德的) 상대주의(相對主義)로 조장(助長)시키는 결과를 초래(招來)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공산주의(共産主義), 로마교회(Roman Catholic Church), 술, 담배, 춤, 도박(賭博)과 극장(劇場) 구경도 근본주의자(根本主義者)들이 공격하는 또 다른 중요한 표적(標的)들이었다. 이러한 투쟁(鬪爭)속에서 근본주의(根本主義)는 미국의 남북부전지역(南北部全地域)과 그밖의 영어권 나라들, 그리고 그들의 선교지역(宣敎地域)에서, 여러가지 전통(傳統)을 가진 반현대주의(反現代主義) 크리스천(Christian)들의 연합(聯合)으로 성장(成長)하였다. 그 연합의 중심(中心)에 미국의 세대주의자(世代主義者)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근본주의(根本主義)는 다른 전통(傳統)들의 영향(影響)을 가장 적게 받았다.
1930년대에 와서 근본주의(根本主義)는 어떤 특수(特殊)한 교회적(敎會的)인 표현(表現)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효과적(效果的)인 근본주의자(根本主義者)들은 점차로 현대주의자(現代主義者)들이 들어있는 단체(團體)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교회(獨立敎會)나 교파(敎派)로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들 대부분이 침례교도(浸禮敎徒)와 세대주의자(世代主義者)들이었다. 분리주의(分離主義)가 참된 신앙의 시금석(試金石)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20년대의 호전적(好戰的) 반현대주의자(反現代主義者)들의 광범한 연합은 1940년대에 와서는 분열(分裂)하기 시작하였다. 미국(美國)에서 한 주요한 집단(集團)은 호전성(好戰性)을 완화하고, 중요한 교파(敎派)들과의 접촉(接觸)을 유지(維持)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집단은 해롤드 J. 오켄가(Harold John Ockenga), 칼 F. H. 헨리(Carl F. H. Henry), 에드워드 J. 카넬 (Edward J. Carnell)과 같은 대변자(代辯者)들이 주로 이끌어왔으며, 그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을 '신복음주의자(Neo-Evangelicals)'라고 불렀다. 그들이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의 협력(協力)을 얻은 것은 복음주의적(福音主義的) 전(前) 근본주의자(根本主義者)들의 발전을 알려주는 신호가 되었다.
한편 존 R. 라이스(John. R. Riee, 1895~1980), 밥 존스(Bob Jones, 1883~1968), 그리고 칼 맥킨타이어(Carl Mcintire1906~2002)와 같은 호전적(好戰的)인 분리주의(分離主義)자들은 자신들만이 참된 '근본주의자(根本主義者)'라고 주장하였다.
초기의 근본주의(根本主義) 운동(運動)과 달라진 이 분리주의적(分離主義的) 근본주의(根本主義) 운동(運動)을 미국(美國)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간하배(Harvie Conn)교수는 '신근본주의(新根本主義)'라고 불렀다(ContemporaryWorld Theolog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77. p. 120).
1960년대 이후의 미국(美國)의 '근본주의(根本主義)'는 이 소수의 분리주의적(分離主義的) 근본주의자(根本主義者)들이 아니라, 넓은 복음주의(福音主義)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넓은 복음주의에는 전 근본주의자(根本主義者)들과 여러가지 전통의 성경(聖經)을 믿는 크리스천들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1980년대에 침례교(浸禮敎)의 근본주의자(根本主義者)인 제리 포웰(Jerry Fawell)의 Moral Majority(미국의 보수적 그리스도교도 정치단체)의 시작과 함께, 미국인(美國人)의 공적생활(公的生活)에서 전통주의적(傳統主義的) 크리스천의 관습을 그대로 보존(保存)하려는 근본주의자(根本主義者)들의 정치적(政治的) 관심은 1920년대에서처럼 다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근본주의자들의 정치운동(政治運動)은 역시 현재 세대주의(世代主義)적 예언 해석(解釋)에 중요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강력(强力)하게 지원하고 있다.
3. 근본주의와 한국교회(Fundamentalism and the Korean Church)
한국장로교회(韓國長老敎會)는 처음부터 청교도적(淸敎徒的) 개혁주의(改革主義)를 선교사(宣敎師)들에게서 전수(傳受)받았다. 그러나 역사가 흐르는 동안에 이 청교도적(淸敎徒的) 개혁주의(改革主義) 전통 속에는, 경건주의(敬虔主義), 신비주의(神秘主義), 세대주의(世代主義)와 함께 근본주의(根本主義) 등, 성경사상에 미흡한 요소들이 들어와 사상적 혼란(混亂)을 가져왔다. 특히 근본주의적 요소(要素)를 대한 예수교 장로회(고신, 합동) 안에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일반은총(一般恩寵)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개혁주의적(改革主義的) 장로교회는 세상학문(世上學問)에 대한 노력을 강조(强調)하지 않았고, 그러다보니 반지식주의(反知識主義)에 흐르는 경향(傾向)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계시종교(啓示宗敎)와 과학(科學)은 서로 충돌(衝突)하지 않는다. 칼빈은 계시종교(啓示宗敎)를 알게 될 때 하나님의 창조세계(創造世界)를 바로 알게 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영원적(永遠的)인 것만이 아니라, 시간적(時間的)인 것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으로 믿고 아울러 존중(尊重)하며 강조하는 것이다.
한국교회(韓國敎會)가 또한 잘못된 경건주의적(敬虔主義的) 분위기 속에서 자라왔다는 것도 근본주의(根本主義)의 영향(影響)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크리스천이 하나님 앞에서 경건(敬虔)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마땅하나, 그것이 경건생활(敬虔生活)이 못되고, 경건주의(敬虔主義)에 빠지게 될 때, 형식주의(形式主義)가 되고 율법주의(律法主義)가 된다. 경건주의는 어떤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하기 위하여 성경(聖經)에 없는 생활표준(生活標準)을 세우고, 그 표준이 마치 성경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고, 마침내는 논쟁(論爭)을 일으켜 덕(德)을 세우지 못하게 된다.
4. 근본주의에 대한 평가(An evaluation of fundamentalism)
근본주의(根本主義)가 초자연주의(超自然主義)를 강조하고, 성경(聖經)의 권위(權威), 처녀탄생(處女誕生), 그리스도의 신성(神聖), 대속교리(代贖敎理), 부활(復活), 재림(再臨) 등 기독교의 근본교리(根本敎理)들을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나, 거기서 몇가지 약점(弱點)을 발견(發見)하게 되는 것은 유감(遺憾)스러운 일이다.
첫째로, 근본주의(根本主義)는 하나님의 주권교리(主權敎理)를 강조(强調)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주권(主權)은 다른 모든 교리를 싸고도는 중심 태양이다. 하나님은 우주(宇宙)의 절대적(絶對的)인 최고(最高)의 통치자(統治者)이시며, 작정(作定)과 창조(創造)와 섭리(攝理)와 구속(救贖)에서 주권적(主權的)으로 일하시는 것이다.
둘째로 근본주의의 약점(弱點)은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連續性)을 깊이 보지 못하는 점이다. 구약시대의 신자들 가운데는 율법(律法)으로 구원을 얻고, 신약시대(新約時代)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보혈(寶血)로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은 다 같이 은혜언약(恩惠言約)에 속하는 구원방법(救援方法)의 계시(啓示)이다. 구약이 은혜의 약속에 대해 계약(契約)이라고 한다면, 신약은 그 성취(成就)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양자(兩者)는 연속성(連續性)과 통일성(統一性)은 갖는 것이다.
셋째로, 근본주의의 약점(弱點)은 위에서도 말했지만, 일반은총(一般恩寵)(자연은총(自然恩寵))에 대한 이해(理解)가 부족(不足)하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세속학문(世俗學問)에 대한 노력(努力)을 게을리하여 마침내는 반지식주의(反知識主義)로 흘러가고 말았다.
넷째로, 근본주의는 개인(個人)의 종교경험(宗敎經驗)을 강조하는 경건주의적(敬虔主義的) 경향을 보이면서 기독교(基督敎)의 사회적(社會的), 문화적(文化的) 명령(命令)을 무시(無始)한다. 종교는 개인의 기도생활(祈禱生活)과 성경공부(聖經工夫), 그리고 교회출석(敎會出席)에 국한(局限)되고, 경제학(經濟學)이나 사회학(社會學), 그리고 자연과학(自然科學)이 제기(提起)하는 문제(問題)들에 대하여는 무관(無關)한 생활(生活)을 한다. 그러므로 문화(文化)·과학(科學)은 성경신학(聖經神學)에 의하여 지도(指導)받지 못하고 오히려 한정(限定)되고 제약(制約)을 받는다.
다섯째로, 초기근본주의(初期根本主義)와 후기신근본주의(後期新根本主義)가 다 같이 복음(福音)을 전파(傳播)하고 옹호하려는 열심(熱心)은 대단하나, 옹호(擁護)하려는 면이 전파(傳播)하려는 면보다 더 우세(優勢)하다. 적극적(積極的) 자세에서 부정적(否定的) 자세로, 당당한 싸움에서 사사로운 다툼으로, 은혜(恩惠)로움과 예절(禮節)에서 비난(非難)의 언어로, 그리고 운동에서 인물로 그 호전성(好戰性)을 나타낸다(간하배, 현대신학 해설, p. 165).
5. 근본주의자 칼 맥킨타이어(Carl Mcintire, 1906-2002)
칼 맥킨타이어(Carl Mcintire, 1906-2002)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8년 장로교목사가 되기 위해서 프린스턴 신학교(神學校)에 입학하여 메이천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메이천이 설립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옮겨서 1931년에 졸업했다. 그리고 미국장로교회(PCUSA)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는데, 1936년에 조직된 정통장로교회(Orthodoxy Presbyterian Church, OPC)에 합류했다. 그리고 1년 뒤 1937년 OPC를 떠나서 성경장로교회(Bible Presbyterian Church, BPC)를 조직(組織)했고, 페이스신학교(Faith Seminary, 1937년)을 설립했다.
프랜시스 쉐퍼는 1935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神學校)에 입학(入學)했는데, 1937년 매킨타이어(Mcintire)가 주도(主導)하는 성경장로교교회(Bible Presbyterian Church)의 페이스 신학교(神學校)로 이적(移籍)해서 첫 졸업생(卒業生)이기도 했다. 그리고 매킨타이어(Mcintire)는 미국기독교협의회(American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1941년, ACCC)와 국제기독교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1948년, ICCC)를 설립했다.
매킨타이어(Mcintire)는 WCC(세계교회협의회)에 대해서 적극적(積極的)으로 반대(反對)를 추구(追求)했다. 주된 사상(思想)은 공산주의사상(共産主義思想)에 대한 배격(排擊)이었다. 매킨타이어는 한국에 30회 이상 방문하며 한국교회 특히 예장합동 교단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WCC를 배격하던 매킨타이어(Mcintire)는 1959년 장로교가 합동과 통합으로 분리될 때 방한하여 박형룡 박사와 함께 영향력(影響力)을 발휘(發揮)하기도 했다. 1959년 매킨타이어는 합동교단 설립과 총회신학교를 설립(設立)할 때에 재정(財政)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 후에도 ICCC가 후원하는 재정으로 총회신학교 운영을 도왔다. 1963년에 백남조 장로가 사당동 산 31번지를 헌납했고, ICCC가 교사(校舍) 건축 자금을 도와서 지금의 총신대학교 사당동 캠퍼스가 세워졌다. 총신대학교 설립과 동자동 합동총회(지금은 대치동) 건물(建物) 구입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95세인 2002년에 소천(召天)되었다.
그의 신학(神學)은 박형룡 박사와 함께 근본주의(根本主義) 신학(神學)으로 평가되며 전투적(戰鬪的)인 성향으로 부정적(否定的)인 인상(印象)을 깊게 남겼다. 칼 매킨타이어(Mcintire)는 근대주의(近代主義)에 맞서는 우익(右翼)의 저항(抵抗)을 조직한 지도자(指導者)로서 원래 교양(敎養) 있는 근본주의자(根本主義者)인 J. 그레셤 메이천(J. Gresham Machen, 1881-1937)의 제자(弟子)였다.(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미국의 반지성주의>에서) 미국(美國)에서 근본주의(根本主義)는 반지성주의(反知性主義) 라인으로 볼 수 있다. 모두가 매킨타이어(Mcintire)를 근본주의(根本主義)라고 평가하는 가운데, 라은태 목사는 “매킨타이어(Mcintire)는 장로교(長老敎) 목사(牧師)이고 성경주의자(聖經主義者)”로 존중한다.
칼 매킨타이어(Mcintire) 박사는 공산주의(共産主義)와 종교적(宗敎的) 자유주의(自由主義)의 지칠 줄 모르는 적수이었다. 그는 흔히 자유주의자(自由主義者)들에 의해서와 많은 신복음주의자(新福音主義者)들에 의해서 혹평(酷評)을 받았으나, 2002년 3월 매킨타이어(Mcintire)의 죽음 이후 풀러신학교 교장 리차드 모우는 솔직하게 매킨타이어(Mcintire)를 보다 더 호의적인 빛으로 논평하였다. 그는 매킨타이어(Mcintire)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미국 교회협의회와 세계교회협의회의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이 소비에트 진영의 정교회들로부터 온 방문자들을 따뜻하게 영접했을 때 원수에게 도움과 위로를 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러분, 이들은 공산주의(共産主義) 정부의 공작원(工作員)들입니다!'라고 주장하려 했다.(중략) 에큐메니칼 지도자들과 같이, 나도 그의 비난들을 광신적(狂信的) 폭언들이라고 물리쳤다.(중략) [그러나] 우리는 지금 저 러시아 정교회(正敎會) 지도자들의 다수가 참으로 그들의 마르크스주의 정부의 의식적(意識的) 지도자(指導者)들임을 알고 있다.(중략) 내가 아는 한, 에큐메니칼 개신교계(改新敎界)에서 아무도 그들이 그의 비난(非難)들을 물리쳤던 그 신사적(紳士的) 태도에 대해 사과(謝過)하지 않았다. 나는 비록 한 사람이지만 우리가 그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믿었다.(중략) 매킨타이어(Mcintire) 박사, 당신이 옳았다!"(Christianity Today, 21 May 2002; Calvary Contender, September 2003).<김효성의 “매킨타이어(Mcintire) 박사가 때 늦은 사과를 받음”, 합정동교회 홈페이지에서)
서울 장신대 정병준 교수는 "칼 매킨타이어(Mcintire)는 한국교회(韓國敎會)에 근본주의(根本主義) 신학(神學)을 확장시켰고 재정지원(財政支援)을 통해 장로교(長老敎) 분열과 침례교(浸禮敎) 분열, 성결교(聖潔敎) 분열(分裂)에 개입했고 교회 분리주의자(分離主義者)들을 양산(量産)했다"면서,
"냉전 상황에 있는 한국교회(韓國敎會) 안에 WCC에 대한 흑색선전(黑色宣傳)을 일삼았다"고 지적했다.(한국기독공보, “'WCC=공산주의?' 발원지는 어디인가(上)”에서)
2013년 부산 WCC 총회가 개최(開催)되자 예장합동 교단은 자체적(自體的)으로 WCC에 대한 자세에 대해서 토론을 갖기도 했다. 이젠 공산주의(共産主義)에 대한 대립이 아닌, 종교다원주의(宗敎多元主義)에 대한 대립으로 전환되었다. 1950년대 용공 논쟁이었지만, 1960년대 이후에는 네오막시즘(Neo-Marxism)과 연관한다.
칼 매킨타이어(Mcintire)는 극우(極右) 보수주의(保守主義)이고 분리주의적(分離主義的) 성격이 있는 것은 거의 모든 진영에서 인정(認定)한다. 또한 매킨타이어의 후대의 모습이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분리주의자로 매도(罵倒)당하기도 했지만 결코 이단적(異端的)이라고 규정한 신학자와 진영(陣營)이 어디에도 없다. 칼 매킨타이어(Mcintire)는 메이천과 프란시스 쉐퍼를 연결(連結)하는 고리이고, 예장합동 교단(敎團)의 탄생(誕生)과 총신대학교에 중대(重大)한 기여(寄與)를 한 사실(事實)에 대해서는 결코 부인(否認)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