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예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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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정 교리의 서술

 

 

1. 하나님의 계획

 

예정 교리는 하나님의 목적이 절대적, 무조건적인 것이며, 이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지배되지 않는 것, 또한 진실로 하나님의 마음이 영원의 목적에만 원인을 갖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연의 방향을 정하고 역사의 과정을 세밀한 점에까지 지배하시는 위대하고, 비범하시며, 그리고 강력한 왕으로써 숭앙이 되시는 것이다.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내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4 : 35)

무한의 지혜, 무한의 힘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명확한 계획 없이 세계를 창조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와 같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그 계획은 세계의 모든 부분에까지 닿아 있어야만 되기 때문이다. 단지 하루만에 만들어진 것에 불과한 인간 모든 오류에 빠지기 쉬운 인간마저도 행동하기 전에는 계획을 세우지 않는가? 계획도 목적도 갖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을 바보라고 말한다. 우리들의 기업이 크면 클수록 우리들에게는 면밀한 계획이 더욱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의 모든 사업은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계획 없이 배를 만들고, 계획 없이 철도를 부설하고, 계획 없이 국민을 다스리려고 하는 사람은 정신착란자라 간주될 것이다. 만일 이것이 인간에 관해서 진실하다면, 하나님에 관해서는 더욱 진실하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이 우주에서행하는 전반에 걸친 계획없이이것을 창조하시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만일 하나님이 사건의 과정을 예정하지 않고, 아직 정하지 않은 어떤 것의 성부(成否)를 기다린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제정은 영원도 불변도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주권

 

생각이 깊은 많은 사람들은 어떤 주권이 자기의 생명을 지배하고 있는 것을 인정한다. 그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싶었던가 태어나고 싶지 않았던가 물어보지를 않았다. 또 그들은 언제 어디서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은가도 질문을 받지 않았다. 30세기에 태어나는 게 좋은가, 홍수 전이 좋다든지, 백인이 좋은가 흑인은 어떤가 라든지, 미국에서 나는 것이 좋은가, 중국에서 나는 것이 좋은가 라고도 질문을 받지 않았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일체의 것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의해서, 그 만드신 만물의 절대적 소유자, 구극적 주재자이신 것이다. 만일 이 세상의 왕의 권력이 그 왕국의 법률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의 율법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성경에는 하나님은 우주통치의 왕좌에 앉아계시는 전능의 하나님으로 우리들에게 표명되어 있다. 하나님이 성()이라는 사실이 그가 해 내는 모든 업이 올바르다는 보증인 것 같이 하나님의 전능은 세계의 경과가 하나님의 계획에 일치한다는 것의 확실한 보증이 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전능의 조물주는 한 가지로 또 만들어진 모든 것의 절대적 지배자로서 나타난다 하나님은 영원한 왕으로서 보좌에 앉아 계시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29 : 20)

 

3.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섭리의 업이란 것은, 하나님의 전 피조물과 그 모든 행동의 가장 깨끗한, 슬기로운, 강력한 유지와 통치다.(웨스트민스터 소교리 문답 11)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것을 가지고 그가 바라는 바를 해 내신다. 혹은 신앙을 통해서 구원에 인도되며, 다른 자는 불신앙 안에서 멸망으로 버림을 받는다.

영적이거나 지상적이거나 이러한 하나님의 은사를 받는 자는 순수한 은혜에 의해서 이것을 받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은사를 받지 못하는 다른 자에 관해서는, 단지 하나님이 그것을 주기를 꺼린 것이었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은혜를 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무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고,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목적 달성을 위해서 그들을 쓰신 것이다.

하나님은 단순한 우주의 방관자는 아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고, 그리고 모든 곳에 계시고, 또 활동하신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지하는 기반이며, 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힘이다.

 

4. 하나님의 예지(豫知)

 

예정에 대한 알미니안주의 자에 반대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예지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대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이 아시는 것이라면, 그 본질에 있어서 그가 예정하시는 일과 한가지로 본질적이고, 또 확실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한편(豫定)이 인간의 자유행동력과 모순하는 거라면, 또 한편(豫知)도 마찬가지이다. 예정은 사물을 확정적으로 하지만, 한편 예지(豫知)는 사물이 확정되어 있다는 전제에 서는 것이다.

예지와 예정과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예지는 예정을 필수조건으로 한다. 그러나 예지는 그것 자체가 예정은 아니다. 자유행위자의 행동은 그것이 예견되어 있으니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게 확정적이니까 예견되는 것이다. 내가 나는 내가 할려고 하는 것을 알고 있다라는 경우, 나는 이미 결심하고 있는 것과 나의 지식이 결심에 선행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 따르고, 그 위에 근거를 갖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5. 모든 신앙체계의 개략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길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체계는 사실상 다음의 세 가지가 있을 뿐이다.

(1) 보편 구제주의(유니버셜이즘)

그리스도는 전 인류를 위해서 죽으셨다. 그런고로 전 인류는 이 세상에 있어서든 또는 미래의 시련을 통해서든 결국은 전부 구원되는 것이다.

(2) 알미니안주의

그리스도는 인류 각 개인을 위해서구원되는 자를 위해서와 한가지로, 멸망되는 자를 위해서도공평하게, 무차별하게 죽으셨다. 선택은 하나님의 염원적인 또는 무조건적인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제공된다. 그 은혜를 받느냐 거역하느냐는 그 사람의 자유라는 것이다.

(3) 칼빈주의

모든 인간은 그 자신이 유죄하고, 부패하고, 절망적인 상태가 된다. 이 타락한 집단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신앙에 있어서 어떤 자를 구원으로 선택하고 불신앙 관계로 어떤 자는 버림 받는다. 그리스도는 순수하게 대리적인 속죄에 의해서 그의 백성을 구속하기 위해서 보내신 자였다. 성령은 선택된 자에게 그 속죄를 유효하게 적용하신다. 이렇게 모든 선택된 자는 확실히 구원을 받아들이는 거라 설명한다.

 

원래 인간은 그 목전에서 칭찬하고 그 사람을 추켜 올려서 기쁘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악평하는 것보다는 순진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더욱 환영을 받는다. 알미니안주의가 보다 대중적인 까닭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그 보여 주는 것이 냉혹하고 무섭게 느껴져도 그것이 보다 사실에 접근된 것이다.

이러한 신앙사상 체계가 진리인가 아닌가 하는 의문은 그 어느 편이 우리들의 감정에 의해서 받아 들여지기가 쉽고, 또 우리들의 이해에 보다 그럴 듯 하게 보이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어느 평이 성경의 교리와 경험의 사실과 시종일관 합치되는가에 따라서 결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2

칼빈주의의 5대교리

 

칼빈주의 체계는 특히 다섯가지의 특징 있는 교리를 강조한다. 이것은 전문적으로는 칼빈주의 5대교리“The Five Points to Calvinism"로 알려져 있고 이 초석위에 대건축이 되어 있는 것이다.

5대교리는 T-U-L-I-P(튤립)이란 말로 기억하면 대단히 편리하다. ,

T. Total lnability (全的 無能力)

U. Uncontional Election (無條件的 選擇)

L. Limited Atonement (制限的 贖罪)

I. Irresistible Grace (不可抗力的 恩惠)

P. Perseverance the Saints (窮極的 救援)

<역주> 원래, 칼빈 자신이 그 중심사상을 이와 같은 형으로 나타낸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이 칼빈주의 전체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뒤에 알미니안주의 자가 다섯가지의 반론으로, 거기 항변한 데서 이와 같은 형태로 정돈한 것이다. 다른 용어, 다른 표현을 쓴 자도 있다.

 

1. 전적 무능력(全的 無能力)

 

바울, 어거스틴, 또는 칼빈은, 아담이 범죄해서 모든 사람이 이미 핑계치 못할 것은(2:1)라는 사실을 출발점으로 했다. 바울은 반복해서 우리들은 죄와 허물 아래 죽고, 하나님에게서 이탈되어서 이미 구원될 방법이 없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함이라.(고전 11 : 14).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가 있으리이까(14 : 4).

이 원칙을 따라서 모든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는 가증한 것, 더러운 것이고, 그의 마음을 매혹하는 것은 사악뿐이다.(5 :14-16참조). 인간의 마음의 부패는 이와 같이 깊다. 그런고로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 생활의 개혁에 관한 오직 하나의 희망은 심정의 변화이며, 그 변화는 그 원하는 때와 곳에 따라서 활동하는 성령의 주권적 재창조력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육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8)는 것이며, 인간은 전연 무능력한 것이다.

이상 얘기한 것에 따라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구원은 절대적으로 또 오직 외골수로 은혜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그 주권적인 올바른 의지를 따라서 하나도 구하시지 않을 수도 소수를 구원하시는 것도, 혹은 다수를 구원하실 수도 또 모두를 구원하는 것도 자유이며, 그의 절대적인 완전성과 전연 모순이 안된다.

 

2. 무조건적 선택

 

웨스트민스터의 신앙고백하나님의 경륜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인간과 천사들 중에 어떤 이는 영생으로 어떤 이는 영원한 죽음에 경륜되었다.(33)

하나님은 선택된 자를 영광에서 예정하는 것과 한가지로 그의 의지가 영원하고 가장 자유로운목적에 의해서 수단도 미리 정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 스스로가 물어야 할 제 1의 문제는 이 교리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였으니(1:4-5)

, 로마인의 편지 8:29-30절에는, 영원부터 영원에 걸친 속죄와 황금의 사슬이라 할 만한 가르침이 있다.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성경은선택을 개인의 공적과는 관계 없이 그것을 과거에 있었던 일과 같이 또 전연 주권적인 것으로 해 주신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문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구원은 인간의 소원이나 노력에 의하는 것은 아니며, 불쌍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에 의하는 것이다.(16) 왜 그가 구원되는가, 왜 이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구원되는가? 다만 그 이유는 만물을 자기 의지가 있는 곳을 따라 정하시는 하나님의 의향에 의해서만 발견되는 것이다.

이 영원, 무조건의 선택의 교리는 때로는 개혁주의 신앙의 심장이라 일컫는다. 이것은 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알마니안주의는 제공된 은혜의 수용을 결정하는 바 인간의 신앙과 순종하는 행위를 강조한다. 신비중의 신비는 무한의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 이 유죄한 인류의 전부를 구원에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고 그 몇 사람이라도 구원에 선택하셨다는 사실인 것이다.

알미니안 주의의 견해는 선택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서 인간의 손으로 넘겨진다. 이것은 전능자인 하나님의 목적을 배신한 인간의 불확실한 의지에 의해서 조건이 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일시적인 사건을 영원적인 행위의 원인이 되게 할려는 것이 된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옳은 일을 하도록 고심을 하면서도, 언제나 그들의 사악한 의지로 배신당하는 마음씨 좋은 아버지와 같이 취급할려고 한다. 이처럼 바보 같은 교리는 다만 비성경적이고 불합리일 뿐 아니라 정녕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라고 말해야만 된다. 원래 인간의 신앙도 또 하나님의 은사이며 회개도 또 하나님의 은사였다. 하나님은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이방인에게도 주셨다(11:18)는 것이다. 또 세례 요한의 유아에 관해서 말한다면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15)라 한 것과 같이 그가 그렇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사인 것이다.

 

선행이 구원의 근거는 아니다. 그것은 구원의 열매 또는 증거로서 절대적이며 본질적인 것이다. 그것은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여는 것 같이 자연스럽게 신앙에 의해서 산출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구원은 행위에 의하는것이 아니고,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인 것이며, (2:9-10) 선한 행위는 그리스도 신자에 있어서는 호흡과 같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호흡하는 것이며, 여기서 살고 있는 이상은 호흡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기묘하게도 31체의 교리를 배울려고 하는 사람은 그 모든 선입관을 버리라고 주장하며 또 하나님이 진리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데 도움이 없는 인간 이성에 의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또 성경을 의심 이 권위 있는 지도자로서 받아들여야만 된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한 번 예정 교리의 연구가 되면 그러한 것들의 규칙에 따를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많은 죄인을 용서하므로 그의 궁휼을 나타내려고 영원 전부터 정한 것을 바른 일이라 한다면 하나님이 다른 죄인을 처벌하는데 있어서 그의 정의를 나타내려고 영원으로 정한 일에 왜 강한 반대를 할 사람들이 있는 것일까? 사실 하나님의 행위는 하나님의 영원부터의 행위라는 진리와 인류의 일부만이 구원된다는 진리와 이 두 개의 진리는 선택과 정죄의 교리를 완성하는데 충분하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2:12).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가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10:13-14)

 

이것을 바꾸어 말한다면 구원의 오직 하나의 길인 그리스도에 관해서 아직 들은 일이 없는 이교도가 어찌 구원되겠는가 하는 의미이다. 사실, 복음을 갖지 않는 이방인은 멸망한다는 신념은 외국전도의 열의를 갖게 하는 가장 강한 이유이다. 만일 우리들이 그들 자신이 갖는 종교가 그들을 구원하는데 충분한 빛과 진리를 포함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는다면 그들에게 복음을 설명할 필요성은 전연 없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자의 외국전도에 대한국내전도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태도는 거의 이 질문에 대한 해답에 의해서는 대부분은 결정이 되는 것이다. 중국 서부의 오지의 암흑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라디오, 비행기, 근대 천문학, 기타 그들이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받지 못한 것과 같이 구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조건에 하나님이 인간을 두실때에 확실한 것은 일년 내내 동결되어 있는 시베리아의 북부에는 조금도 밀농사가 안되는 것 같이, 하나님은 그들이 구원되어야만 한다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이 만일 다른 계획을 가지셨다면 그 목적을 위해서 무엇인가의 기회를 주실 것이다.

 

3. 제한적 속죄(制限的 贖罪)

 

지금 여기서 제한적 속죄라는 토픽아래 논의하려는 문제는 그리스도는 전 인류를 위해서 차별도 예외도 없이, 모든 개인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으로 바친 것인가, 혹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선택된 자에게만 특별한 관계를 갖는 것인지, 바꾸어 말한다면 그리스도의 희생은 모든 인간의 근원을 가능케 하는 것인가, 혹은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자의 구원을 확실하게 하는 것인가 어느 쪽인가이다. 이 교리가 선택의 교리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임을 곧 분간이 가능할 것이다.

속죄의 가치는 전 인류를 구원하는데 충분하지만, 선택된 자만을 유효하게 구원하시는 것이다. 알미니안주의의 교리에 의하면, 속죄는 단지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해서 그들 자신을 구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데 불과하다만일 그들이 원한다면이란 것이 된다.

속죄는 그 본질상 범위가 있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단순히 구원을 가능케 한다는 정도의 것이라면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속죄가 유효적으로 구원을 보증한다면 그것은 선택된 자만이 관계를 갖는다고 말해야만 될 것이다.

칼빈주의는 이것을 양적으로는 제한하지만 질적으로는 불변이다.

칼빈주의 자에게 있어서 속죄는 좁은 다리이긴 하나 이것은 완전하게 건널 수 있는 다리이다. 알미니안주의 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강의 중간까지 밖에 갈 수가 없는 크고 넓은 다리이다. 사실 알미니안주의는 칼빈주의 보다도 훨씬 신랄한 제한을 그리스도의 사업에 가하고 있다.

만일 속죄의 은혜가 보편적이고 무제한일 것 같으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요구한 것 같은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더욱 낮은 구원을 보여주셨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은혜에 물을 타서 지극히 쉬운 길이 제공되게끔 한다. 말하자면 지불능력이 없는 죄인에게 한 달에 15센트를 탕감해 주는 것 같은 안이한 은혜가 되는 것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8)

주의해야 할 것은 주 예수가 여기서는 많은 사람을 위한 구속이라 하고, 모든 사람의 구속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은 일이다. 구속의 성질은 이와 같은 것이다. , 구속이라 말하는 것은 그것이 지불되고, 받아들여질 때에 그가 지목한 사람을 자동적으로 자유케 하는 것이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0:15)라고 예수가 말했을 때에 예수 자신은 그 죽음의 목적을 제한하신 것이다. 그런고로 만일 그가 자신의 목숨을 양을 위해서 버리신 것이라면 그의 사업의 속죄적 성격은 결코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보고,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10:26). 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8:44)라 말한다. 주 예수께서 이와 같이 그들을 지적하고 제외한 것을 알면서, 도대체 누가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서 그 존귀한 목숨을 버리셨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요셈에게 나타난 천사는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 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1:20-21)라고 고하고 있다. 이것은 결코 모든 백성은 아니며 자기 자신의 백성이라 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17:9)

 

 

4. 불가항력적 은혜(不可抗力的 恩惠) -유효적 은총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불가항력적 은혜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명으로 예정된 모든 사람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들만을 자기가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인정한 때에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실제로 불러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총과 구원의 자리에 들어가게 하신다. 또한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일을 알 수 있도록 영적으로 또한 구속적으로 계몽하신다. 돌과 같이 굳은 마음을 없게 하고 살과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셨다. 선을 원하게 하는 절대적인 전능으로써 그들의 뜻을 새롭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실제로 가까이 나오게 하신다. 이 때에 그들은 가장 자유롭게 나아오며 은총으로써 그것은 원하도록 변화를 받는다.(10 : 1)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인간은 그 자연의 상태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부패하고, 그 자신의 어떠한 힘에 의해서도 깨끗해질 수가 없고, 또 행복하게 될 수도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영적으로 죽은 것이다. 구원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 의할 수 밖에 없다. 만일 죄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려면 그는 새로운 성질을 받아야만 된다. 그는 위로부터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3:3). 그런고로 죽은 사람은 자기가 자기 몸을 운신(運身)할 수가 없는 것 같이 구원의 최초의 행동은 안으로부터 일어날 가망이 없다. 죄많은 인간은 자기를 구원하기 위한 유인(誘因)이나 원조(援助)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도록 충고하고, 격려하고, 호소하고, 도와주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었다.

구원은 마음의 변화를 분명히 포함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 변화를 갱신(更新)이라 부르고 있다. (3:5) 이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하게 한 것과 한가지로 큰 능력에 의해서 행해지는 영적부활이다.(1:19,20)

갱신은 성격의 변화를 포함한다. 좋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나무를 좋게 할 필요가 있다. 우리들은 자기의 육체적 탄생에는 전연 관여하지 않는다. 자기의 탄생을 다만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로 받는 것 같이 우리들의 영적인 탄생도, 우리들 자신이 아무일도 하지 못하고, 다만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로 받을 뿐인 것이다. 이 영과 육과의 탄생은 어느거나 우리들 자신의 힘, 혹은 우리들의 동의가 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으니(28:18)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4:35)

유효적 은총이라 하는 특별은총은 때로는 불가항력적 은혜라고도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불가항력적 은혜란 말은 인간위에 있는 압제적인 힘이 가해짐으로서 인간이 그 뜻에 위반되어 행동할 것을 강요당하는 것 같은 암시를 받기가 쉽고 잘못되기 쉬운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의미하는 바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선택은 하나님의 힘에 의한 감화이며 자비로운 선택의 행위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5. 궁극적 구원

 

성도의 지키심의 은혜에 관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자 안에서 용납하시고 실제로 부르시고 또한 성령으로써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자리에서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타락할 수는 없다. 그들은 마지막 날까지 그 상태에 있을 것이며 또한 영원히 구원을 받을 것이다.(17 : 1)

만일 하나님이 인간을 절대 무조건적으로 영원한 생명에 선택하시고 성령의 구속의 은혜를 그들에게 유효하게 적용한다면 그들은 반드시 구원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은 불가피적인 결론이다. 하늘에 있는 성도들은 현재 이 세상에서 생활하는 신자들 보다 행복하긴 하지만 안전성에 있어서는 어느거나 한가지이다. 이와 같은 선물의 수여(授與)는 그것을 받는 자를 구원하실려는 하나님의 목적의 계시이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하나님의 손에서 떠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바울은 믿는 자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고 가르치고, 그러므로 신자는 율법아래 있지 않는고로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정죄하는 일이 없다고 말하고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니라(6:14)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11:6)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4:15)이라 가르치고 만일 행위에 의해서 가르침의 최소 부분이라도 할려고 하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은, 그는 율법의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자라(5:3)말하고 있다. , 그들은 자기의 힘으로 완전하게 순종하고 그것으로 자기의 구원을 얻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보전의 교리는 기독교 신자가 일시적으로나마 범죄하고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슬픈 일이긴 하나 우리들은 너무나 빈번하게 범죄한다. 가장 훌륭한 신자라도 일시적인 배교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전연 패배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 위에 그의 은혜를 부어주시므로 가장 약한 성도도 최후적으로는 배교에서 확실히 지켜주지 때문이다.

기독교 신자가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그의 상태는 전쟁과 같은 것이다. 그는 일시적으로는 실패하는 일도 있고, 어떤 때는, 전연 신앙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만일 그가 한 번 참으로 구원된 자라면 그는 은혜에서 전연 이탈할 수는 없다.

참 그리스도 신자로 보이는 자가 최후적으로 배교로 떨어져버린 경우의 취급도 절대로 해석이 곤란한 것은 아니다. 성경도 우리들의 경험도, 친구에 대한 우리들의 판단은, 곧잘 잘못되는 것을 가르친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참 그리스찬인가 아닌가를 확실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외적인 고백이 반드시 영혼이 구원되었다는 보증은 못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가 아무리 교묘하게 사람들을 속일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회라(2 : 9)라고 더러운 사실을 아시는 것이다. 요한은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다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라고 말하고 있다. 타락해서 영원히 떠나가는 모든 자를 바로 이와 같은 따위의 것들이다. 이와 같이 신앙 고백으로부터 떨어지는 자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서 떨어지는 자는 없는 것이다.

자유의지의 교리와 은혜로부터의 타락의 교리와를 지니는 철저한 알미니안 주의는 이 세상에 있어서는 결코 그의 영원한 구원을 확신하지 못한다. 진실로 그는 현재의 구원의 확신은 가질 수 있겠지만 궁극적인 구원에 관해서는 희망을 가질 수가 있다는데 불과하다. 만일 알미니안주의가 진리라면 그리스도 신자의 장래는 그의 피조물적인 의지가 바른 길을 계속 선택한다는 공산(公算)위에 서 있기 때문에 지극히 불안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3

예정 교리에 대한 반론

 

 

1. 예정론과 운명론

 

예정론에 대해서 그것은 일종의 운명론이라고 논박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의 예정론과 이교의 운명론과를 혼동하는 데서 오해를 한다. 예정 교리는 영원한 옛날부터 하나님이 하나의 통일적 계획 또는 통일적 목적을 가지시고 그것을 이 세상의 형편의 이법(理法)통해서 완성시키시는 거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예정론은 그 계획 안에 결정된 목적이 첫째로 하나님의 영광, 둘재로 하나님의 백성의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과 반대로 운명론은 구극원인(究極原因)의 이론을 받아들이지를 않는다. 운명론은 우주통치의 고삐를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사랑에서 빼앗아 맹목적 필연에다 맡기시는 거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것은 자연이 가는 길과 인류의 경험과를 미지의 불가항력적인 힘에다 돌리는 것이요, 그 힘에 대한 항쟁은 헛되고 여기 대해서 불평을 말하는 것은 유치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운명론에는 종교에 사랑, 궁휼, 거룩, 정의 지혜 등을 넣을 여지가 없고, 또 그러한 것들을 자극하는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예정론은 이러한 것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강한 근거를 준다 그런고로 예정론과 운명론과는 마치 인간의 행동과 기계의 활동이 다른 것 같이, 혹은 하늘의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의 다할 수 없는 사랑과 지구의 중력이 서로 다른 것 같이 다른 것이다. 칼빈은 이 예정론의 교리가 운명론이라는 비난을 극력부정하고 있다.

 

 

2. 예정론과 도덕적 책임

 

예정론은 인간의 자유행동력과 도덕적 책임이 양립되지 않는다는 반론에 대해 여기서 우리들이 직면하는 문제는 만일 인간의 행동이 영원부터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자유롭게 책임이 있는 행동자일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에 관한 난문제의 참 해결은 그 어느 편인가를 부결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두 가지 모두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모든 사건을 결정하신 하나님이 그러한 사건들 안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를 결정하셨으며, 이 자유는 다른 모든 사건과 한가지로 확정되어 있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인간의 자유가 분명한 것을 인정하고 있다.

하나님은‧‧‧‧‧‧일어날 모든 것을 자유롭게 또한 변함없게 제정하셨다라고 언명하고, 그 후에 그러나 하나님이 죄를 조성하시거나 인간에게 허락하신 의지를 부정하시거나 또는 이미 제거된 제2의 원인에 대하여 아무 관계가 없거나 우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확립하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금 예를 들어보겠다. 유대인이 예수를 거절한 일, 로마병들이 예수의 옷을 제비뽑은 일,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 일, 닭이 우는 것, 예수의 시체를 창으로 찌른 것, 예루살렘의 함락과 유대인이 타국의 포로로 끌려가는 일 등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예지는 비록 유다와 베드로의 경우라도, 절대로 그들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았다적어도 그들 자신도 그렇게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유다는 그리스도를 판 후에 후회하고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27:4)라고 말했다. 또 베드로도 닭이 우는 것을 듣고, 예수의 말을 생각해내고 밖에 나가서 통곡했다. 여기 한 사람의 강직한 재판관이 뇌물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혹은 또 어떤 수전노가 금덩이를 집을려고 하는 것을 예지한다고 해서 그들의 성질을 고치고 그들의 행동의 자유를 저해할 것인가? 그런고로 어떤 행동의 확실성은 그것을 실행하는 행동자의 자유와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러한 행동을 확실한 것으로서 예지하지를 못하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의 교리는 함께 서든지 함께 넘어지든지 한다.

다시 다른 이유에서 확정성은 자유행동과 모순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줄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아버지는 어떤 사정으로 그 아들이 어떻게 행동하는 가를 알고 있고, 그 사정을 제어함으로서 그 자녀들의 행동을 미리 결정한다는 것은 곧잘 보는 일이다. 그러나 영원히 자녀들의 행동은 자유이다. 하나님의 성정(聖定)은 사건을 낳은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생기는 것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사람은 그 선택의 자유, 또는 그의 당연한 책무를 방해하는 바, 외부적인 강제 아래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만 자유를 갖는 것이 된다. 사람은 그 타락의 상태에 있어서는 우리들이 노예의 자유라 부르는 자유를 가질 뿐이다.

피조물의 행동은 하나님이 그것을 창조해 주실 때에 특별한 성질을 그 위에 각인하므로써 대개의 범위를 결정하신다. 알기 쉽게 말한다면 인간은 말과 같이 네 발로 걷지 아니하고 말과 같이 울부짖지 않게 미리 정하신 것이다. 행동이 외부에서 결정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그러나 만일 행동이 내면에서 이성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유다. 하나님의 예정은 바로 이와 같이 활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 관해서 우리들은 이렇게 믿고 있다. 인간의 자유행동을 파괴하는 일 없이, 손상하는 일도 없이, 하나님은 그들 위에 특별한 섭리를 주어 또 성령에 의해서 그들의 내면에 활동하고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와서 또 그리스도를 섬기며 변치 않도록 해 주는 것이다.

 

3. 예정론과 죄의 책임

 

예정론은 하나님이 죄를 만든 자라는 반박이 있다. , 만일 하나님이 이 세계에 일어나는 일을 모두 예정하신 거라며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죄의 문제는 논리나 이성을 기본으로 해서는 절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비논리적 비이상적인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악에 관한 무서운 신비를 취급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성질에 어떠한 약간의 죄도 암시하는 일이 없도록 지극히 조심스럽게 설명하고 있다.

죄의 깊이는 피조물에서만 발생하는 것이며 하나님에게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가장 거룩하고 또 가장 바르게 계시고 죄의 작자 혹은 승인자가 아니며 또 그렇게 될 수도 없다.(5:4)

죄의 부분적인 해석은 인간은 성경에 죄를 범하지 말라고 명하셨지만, 그러나 만일 그 사람이 죄를 선택한다면 그것을 범하는 것도 용납된다는 사실로 발견된다.

성경전체를 통해서 죄있는 행위가 허용되고 그리고 그것을 통제하여 선을 향한 막대한 실례를 발견할 수 있게 한다. 예를 들면 야곱이 눈 먼 늙은 아버지를 속인 것은, 그것 자체가 죄의 행위였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용납되었고 형이 아우를 섬긴다는 하나님이 이미 계시한 계획 수행의 말하자면 쇠줄의 하나의 고리로서 쓰여진 것이었다. 또 이스라엘 위에 선언한 발람의 저주는 축복이 되었다.(24:10) 나사로의 죽음은 마르다, 마리아 그 밖에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의 인간적 입장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큰 불행이었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것이었다.(11:4)

아담의 타락과 아담에게 시작되는 인류의 타락도 결코 우연이나 갑자기 생겨난 사건이 아니고 하나님이 숨겨두신 또 안에서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알려지고 있었지만세상의 죄를 위해서 그 희생으로 오신 것이었다.(벧전1:20 참조) 바울은 죄의 구속이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말했다.(3:11)

속죄의 계획이 이와 같이 영원한 옛날 창세 이전까지 소급해 간다고 하면 인간을 구속해 낼 죄에 빠지는 것을 용납하는 계획도 영원한 옛날까지 소급해 갈 수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구속의 기회는 없는 것이 된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구속은 영원한 옛날부터 하나님의 자유로 은혜 같은 계획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타락한 폐허에서 최초의 창조보다도 더욱 영광스러운 영적 창조의 사업을 세우신 것이다.

성경이 교리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죄를 어느 한도내에 억제해 두고 그 뜻하는 바 악으로부터 선을 가져오며, 또 그 악까지도 영광을 위해서 사용한다는 것이다. 만일 또 죄가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과 그 허락아래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연한 때에 생기는 것이라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되면 악이란 독립되어 제어할 수 없는 원리가 되고, 그리고 이교적 이원론적인 우주관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악마의 사업조차도 하나님의 목적에 이바지가 되도록 지배하고 제한한다. 첫재로 악한 자가 고통을 받게 되도록 정한 것은 하나님이다. 사탄은 단지 그 허락아래 그들 위에 벌을 내리는데 불과하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 같이 하나님은 선의(善意)를 가지고 있고 사탄은 악의(惡意)를 가지고 있다. 세상의 죄로부터 구원을 위해서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바로 그에 적중한 예가 될 것이다.

 

4. 예정론과 인간의 노력

 

예정론은 인간의 노력의 전반적인 동기를 저해한다는 반론이 있다. 이와 같은 반론은 목적과 수단에 관계 없이 정해져 있다는 그릇된 사고에 입각되어 있는 것이다. 예정이란 다만 단지 여기 저기에 고립되어 있는 약간의 일만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고 전사상(全事象)이 전체적으로 연결 되어 있고 내적 관계로 관련되면서 예정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구원되는 것을 예정하신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이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는 것까지도 정하시는 것이다.

본래의 사건은 우리들에게 숨겨져 있고, 미지(未知)의 것인 까닭에 거기 관해서 전혀 결정된 것이 없는 것같이 우리들은 자기들의 사업에 힘을 쓰고 열심히 우리들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에게는 미래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결과에 있어서는 확실하다. 그런고로 전도서에,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11:6)

라고 되어 있는 것 같이 우리들은 이 이유미래가 우리들에게 확실하지 못한 것 같이 한층 더 활동할 것을 명령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의 실제의 경향은 노력을 배가하도록 힘을 내게 하는 것이다. 이성도 경험과 함께 그의 성공의 희망이 크면 클수록 노력하는 동기가 강대해질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확고한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된 수단에 순종하고 경건하게 이용하는 자가 축복을 받는다는 약속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노력에 대한 최고의 가능한 동기를 갖는 것이다.

 

5. 예정론과 하나님의 공평

 

예정론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편견(偏見)이 있다는 것, 불공평한 사랑을 하는 것이라는 반론이 있다. 모든 인간이 죄로 죽고 자신의 힘으로 영적인 생명을 회복할 수 없다고 한다면 왜 하나님은 그 전능의 힘을 움직여서 어떤 자는 갱신시키고, 그리고 다른 자는 멸망가운데 남겨두느냐고 질문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어려운 문제에 대해 반칼빈주의적 제 체계는 아무런 회답도 주지 않는다. 칼빈주의 자도 이것이 난문제(難問題)인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이것이 칼빈주의 체계에만 특유한 문제가 아닌 것을 주장하고, 그리고 그들은 성경에 주어진 부분적 해결로서 만족하고 있다.

사람에게 편견을 갖는다는 것은 심판자로서 행동하며 그 앞에 서는 자를 그들의 성격에 따라 취급하지 않고, 어떤 자에게는 정당하게 그들의 것이 되어야 할 것을 젖혀놓고 또 다른 자에게는 당연히 그들의 것이 아닌 정의와 법률에 의하지 않고 편견과 악의에 의해서 지배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런 의미에서 사람을 편견(偏見)하는 자라는 의견을 단호하게 부정한다. 만일 예정론이 하나님을 이와 같은 자로 나타낸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불의한 하나님이라 비난하는 것이 된다고 인정할 수 있다.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과 사이에 구별을 두지 않으며 편견을 갖지 않는다고 베드로는 말했다. 유대인은 그 전 역사를 통해서 자기들이 단일 민족으로 독점적이 하나님의 돌보심의 대상이라고 믿고 있었다. 에베소서 65-9절에는 노예와 주인은 서로 바르게 지내야 된다. 그들의 주되신 하나님은 사람에게 편견이 없으신 하나님이라고 가르친다. 야곱은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부한 자의 사이에 구별을 두지 않으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와 더러운 옷을 입은 자를 차별하지 않으신다고 말했다.(야고보서2:1-9 참조) 이상의 모든 장절에 있는 사람이란 내면의 사람이 아니고 영혼도 아니며 곧잘 우리들에게 영향을 주는 외모의 사람이다. 그런고로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편견이 있다고 말할 때에 그것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과 한 가지로 취급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계서 이 사람은 구하고, 저 사람은 버린다는 이유란, 이 사람이 유대인인가, 이방인인가, 또는 부하고 가난하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은 약소하고 순종하지 않는 민족이지만 하나님은 세계의 어떠한 민족에게도 주지 않은 은혜를 주었다. 마태복음11:25, 26에 주 예수께서,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라고 기도하신 것을 우리들은 읽는다. 이러한 말로 예수님은 알미니안파가 부정(不正)이라 떠들고 불공평하다고 비방하는 그 일을 하늘의 아버지에게 감사하시는 것이다.

사실은 이 타락된 인류중에 어느 누구도 조물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분수에 맞지 않는 대접을 받는 자는 없다. 만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반대하는 자가 있으면 외부의 초청은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는 것이라 대답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나님은 왜 하나라도 어떤 자가 영원한 멸망에 빠지는 것을 용납하느냐는 것은 하나님이 왜 다른 자가 아니고, 이 사람을 구원하는가 하는 문제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는 이해하기 곤란하다. 하나님이 어떤 자를 처벌한다면 모든 사람을 처벌해야 마땅하다는 주장이 논리상 가능하지만, 그러나 아무도 그와 같은 극단의 주장은 아니한다.

구원의 계획에 포함되지 않은 자에 대해서 하나님은 불공평하게 행하신다고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이렇게 이의를 말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이 단순한 피조물로써 인간을 다루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을 요구하는 모든 권리를 잃어버린 죄 있는 피조물로 대하신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생각해 보면 우리들이 하는 모든 일은 불공평 하다. 우리들이 어떤 자에게 사랑을 받는다해서 우리들이 모든 자에게 그것과 한 가지 사랑을 평등하게 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까닭은 없다.

 

6. 예정론과 도덕

 

예정론은 좋은 도덕을 손상한다는 반론이 있다. 예정론은 사람들이 자기는 이미 영원한 행복을 확보하고 있다는 이유에서 그 도덕행위와 은혜 안에서 성장에 관한 부주의와 무관심하게 된다고 이의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 논박은 본래 선택과 성도를 지키는 은혜의 교리에 대해서 주로 말할 수 있는 주장이다.

만일 하나님이 어떤 사람의 밭에 옥수수의 수확을 미리 예정하신단면 한 가지로 그 사람의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기르고 그 밖에 옥수수의 수확에 필요한 모든 일을 하도록 예정하시는 것이다. 선택 예정된다는 것은 제 멋대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개인이 영원한 생명에 예정되는 것은 거룩하고 유덕한 사람으로서인 것이다. 바울이 알기 쉬운 말로 선택의 참 목적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1:4)라고 가르치고 있는 그대로인 것이다. 또 우리들은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8:29)는 것이다. 그리고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다(13:48)는 것이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목숨을 15년 연장하기로 결정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 건강을 함부로 하지 않고 그 식사에도 조심을 했다. 그는 나는 비록 불에 뛰어들거나 물속에 들어가거나 독을 마셔도 괜찮다. 나는 틀림 없이 오래 살 것이기 때문이다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성경은 거룩에 있어서 지켜주시는 지키심 이외는 알 바가 없다. 또 성경은 현재의 나날이 늘어나는 거룩과 무관계한 안전감 같은 데는 아무런 고무도 주지 않는다. 하나님은 영원한 세계에 있어서 모든 사람을 위한 안전한 행복을 작정하고 이 세상에서 이 행복의 일부를 작정하고 계신다.

칼빈주의는 예정론이 좋은 도덕을 해친다는 비난에 대해서 이론으로 반박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거짓된 주장에 반대되는 전 세계적으로 이름 높은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답변하겠다. 루터칼빈쯔윙글리, 그리고 그들의 직접적인 협력자들은 모두가 철저한 칼빈주의 자였다. 그리고 어느 세대에도 그 가장 큰 영적인 부흥은 그들의 영향아래 일어났던 것이다. 영국에 있어서 청교도, 스콧트랜드에 있어서 카베난타(Covenanters) 프란스의 유그노 등은, 같은 신앙과 같은 도덕적 성격을 지닌 사람들이었따. 마크페트릿지(Mcfetridge)는 청교도에 관해서 미국에 있어서 그들 뉸잉그랜드의 칼빈주의 자, , 청교도는 도덕적으로 비길 데 없는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그들의 종교는 진실로 그들의 생활이었다. 그들의 사상과 생활에는 모두가 그 신앙에 녹아 있었다. 그들은 근면, 검소, 진취적이고 결과는 부유해지고, 그리고 그들의 자식 또 자손엑까지 전해진 것이었다고 말했다.

헨리, , 비쳐(Henry, Ward, Beecher)도덕적 탁월과 품성의 순결과의 이념을 극도까지 강화하는 점에 있어서 칼빈주의를 따른 체계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칼빈주의는 사람을 부도덕과 절망에 이끄는 체계가 아니라 일상생활에 있어서 전연 그 정 반대의 걸음을 계속해 온 것이다. 개혁주의 신앙이 퍼져간 곳에는 어느 곳이나화란이건, 스콧트랜드건, 미국이건 가난한 나라들을 장미가 피는 동산과 같이 발전시킨 것이었다. 이 사실은 마코레(Macaulay)와 그 밖의 다른 많은 학자들도 인정한 것이며 지극히 위안을 주는 사상이다.

 

7. 예정론과 복음전도

 

예정론은 복음 전도의 성질을 가로막는다는 논이 있다. 복음은 이것을 원치 않는 자, 또는 극단적인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는 많은 자에 대해서도 제공된다. 더구나 그것은 지극히 성실하게 제공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앞으로 올 모든 것을 위해서 넉넉하게 마련이 있을 것과 또 성실하게 받아들이는 바 모든 자의 구원될 것을 확신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입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예화로서 말씀하신 비유를 알고 있다. 아버지는 그 방탕한 아들이 돌아왔을 때에 아직 먼 곳에 있는데도 뛰어가서 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하나님은 이 방탕한 아들을 환영함과 같이 어떠한 탕자도 기쁨으로 환영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아놓고 바로 왕에게로 가서 삼일간의 여행을 하고 광야에 가서 제사를 드림과 하나님께 희생 드리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하도록 명하셨다. 더구나 그 다음 구절에 하나님 스스로 그러나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너희가 가는 것을 애굽 왕이 허락하지 아니하다가(3:19) 거절당할 거라 알고 있는 초대라도 성실하게 못할 것은 없다. 하나님은 사람이 좋은 믿음으로 공물을 바디는 것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강제적으로 사람들에게 하게 하는 힘을 가지셨음에도 불구하고 슬기 있는 이유에서 결코 그들의 동의를 강제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어느 사람의 가족이 다른 많은 자와 함께 포로가 되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 가족에게 대한 사랑에서 그들의 몸값을 지불했다. 그러나 그 몸값은 그러한 포로의 전부를 석방하는데 충분한 액수였다. 그러면 그것은 특히 일부의 포로들만을 위해서 의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몸값 때문에 전원의 석방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복음이 전체적으로 인류에게 주어질 때에 그것을 받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을 막는 사람은 사람들 측에서 그것을 받기를 거역하는 죄에 불과한 것이며, 어떻게 막고, 어떻게 넘어짐의 돌로 그들의 길에 놓여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알미니안파는 반대하여 하나님은 그의 숨겨진 목적 안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결정된 자에게는 복음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이 바로 이일을 하실 것을 분명하게 성경 안에서도 발견하는 것이다. 바로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이미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마찬가지지만 에스겔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집에 가서 말하도록 파견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듣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셨다.(3:4-11) 선택의 결정은 비밀이다.

따라서 설교자가 선택된 자에게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선택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제공하지 않으면 안된다. 성경에는 명백히 모든 자에게 그것을 제공하도록 명하고 있다. 그러나 주의 깊은 독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부름이란 전반적인 사실은 아니다. , 목마른 자」「굶주린 자」「바라는 자」「지친 사람」「무거운 짐을 진 사람에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어떤 필요도 의식하지 않는 회심을 원하지 않는 자에게는 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청중 가운데 누가 선택되었으며 누가 선택되지 않았는지 설교자에게는 감춰져 있기 때문에 설교자는 누가 구원에 이르도록 알아 들었는지, 혹은 누가 심판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알 수가 없다. 설교의 효과는 설교자의 손에는 없다. 그것은 전혀 하나님의 수중에 있기 때문에 설교자의 자유로는 안된다. 그래서 실패라 생각되는 설교가 성령의 힘으로 효과적이 되어 힘을 발휘하는 일이 사실은 곧잘 경험하는 바이다.

최후에 선택되지 않는 자에게도 설교를 하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니다. 그 까닭은 이와 같이 그들은 제 멋대로 범할 죄에서 그들을 억제하고 또 지도하는 감화력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8. 예정론과 만인 구제설

 

예정론은 성경의 만인 구제 장절(章節)과 모순된다는 반발이 있다. 이러한 반대자는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또는,전 세계를 위해서 죽으시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확실히 디모데전서 3 : 4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라고 명기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리 많은 사람의 구원을 바란다 해도 그것을 작정하신 것은 아니다. 만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작정하고 또는, 명령적으로 바란다 해도 그것을 작정한 것은 아니다. 만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작정하고 또는 명령적으로 의도한다고 가르치는 장절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지배하는 것 또, 어떤 자는 형벌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임을 나타내는 성경의 다른 부분과 모순된다. 바람=Will이란 말은 성경에 있어서도 또 우리들의 일상의 대화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다른 의미로 쓰여진다. 어느 때, 그것은 명령또는, 목적의 의미로 쓰여지고, 어떤 때에는 욕구또는, 소원의 의미로도 쓰여진다. 바란 재판관은 사람이 옥에 들어가거나 사형에 처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욕구그러나 동시에 또, 그는 죄 있는 자가 바르게 처벌되기를 바란다. , 선언, 판결한 가지 의미로 상당한 이유아래 사람은 그 수족을 절단한다든지 혹은 눈알을 후벼내기를 바란다. 혹은 결심한다고는 하지만 그는 그것을 절대로 바라지는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이란 말도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어떤 경우에 그것은 깡그리 개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온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1 : 5) 고 세례 요한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 또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켜 세워주었을 때에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더라(4:21)는 경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21:17)라고 예언하였을 경우, 결코 문자 그대로의 모든 개인을 말한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12:32)고 선언했을 때 분명하게 전 인류를 의미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역사는 결코 인류의 모두가 그가 있는 곳에 오지 않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분명히 복음과 참 하나님에 관하여 무시한 가운데서 죽은 자를 하나님 나라에 허락지 않는다. 그의 모든이란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전 세계 각국과 각 계급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22절은 아마 알미니안파가 칼빈주의를 공격할 때에 가장 빈번하게 인용하는 구절인 것이다. 그것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모든 사람이 산 것임이라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연 합당하지 않다. 이 구절은 바울의 유명한 부활장의 인용이며, 그는 여기서 이 세상의 생명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 생명도 영적 생명도 아니며 진실로 부활의 생명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바울이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생명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과거의 일이 아니고 또 현재의 일도 아니며 미래에 관한 일이다. 그런고로 이것은 알미니안파와 칼빈주의와의 논쟁에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모두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의미는, 구속된 자가 어린 양의 보좌 앞에서 부르는 노래(5:9), ,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에 의해서 보다 한층 분명하게 되어 있다.

어떤 경우에는 모든이란 말이 복음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차별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데 사용되고 있다. 이방인의 구원이란 전 시대에는 알려져 있지 않던 신비였다. 하나님은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이방인이게도 주셨다고 되어 있다 (11:18, 3:4-6).

때로 세상이란 말은 다만 세계의 대부분을 말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자동차 제작업자가 모든 사람에게 자동차를 판다는 경우, 그것은 실제로 각 개인에게 판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값을 지불하고 살려는 사람들에게 파는 것이다.

만일 디모데전서 2:4절에 있는,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말씀도 알미니안적으로 해석 한다면, 하나님은 그 소원을 달성할 수가 없어 실망하든가 또는 예외없이 모든 인간이 구원되는가 하는 그 어느 편이어야만 된다. 이미 제한적 속죄의 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는 전 인류를 위해서 죽으셨다. 그것은 시대 또는 나라, 성격 또는 환경 등 일체의 것에 대해서는 타락하고 그리고 집합적인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 되었다. 그의 사업은 전 인류에게 지상적이고, 또 물질적 축복을 가져오며 또 그것을 듣는 모든 자에게 복음을 제공하기 위해 기초를 세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수미일관 모순이 없는 것이다. 만일 그 자체가 두 개의 해석이 가능한 장절을 발견하고, 그리고 그 해석의 하나가 성경의 다른 부분에 조화된다고 해도 다른 하나가 조화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그 전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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