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에서 교회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비결|자료………비교종교자료
         

이단에서 교회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비결

 

<마태복음강해>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 좇아 죽였느니라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이다”(마 22:33-41)

 

골고다 십자가의 비유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성전에서 가르치는 예수님의 자격에 시비를 걸어왔다. 주님은 직접 답변하지 않고 세 비유를 들었는데 그 내용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을 통박하는 것이었다. 무명의 랍비가 대제사장을 질책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예수님의 권세가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입증한다. 비유의 의미도 예수님은 모든 인간을 구원과 심판으로 나누는 권세를 가졌다는 것이었다.

 

본문은 그 두 번째 비유다. 첫째 비유처럼 그 내용은 간단하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다.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확대해서 보자면 이 땅이다. 멀리 있는 주인은 한국의 소작농처럼 농부와 계약을 맺어 소출을 나누기로 했다. 농부는 이스라엘 백성, 특별히 그 지도자들이다.

 

주인이 계약대로 과실을 받으러 보낸 종들은 구약시대의 수많은 선지자들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져야 할 성전의 예배가 형식적 기복적으로 바뀌었다.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이방신들을 경배했고 나중에는 대놓고 우상을 음란하게 숭배했다. 선지자들이 와서 그 도덕적 영적 타락에 대해 경고하고 회개하라고 외쳤으나 따르지 않고 죽였다. 포도원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그 아들로 예수님을 보냈다고 한다.

 

첫째 비유에서 유대인들이 이것을 보고 종시 믿지 않는다고 했다.(32절) 주님이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속사역을 사실상 현대에 이르도록 유대인들이 불순종하고 있다고 예언한 것이다. 이 두 번째 비유에서도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좇아내어 죽인다고 했다.(39절) 예루살렘 성 밖의 골고다 언덕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포도원의 주인이 올 때(40절)란 예수님이 재림하여 마지막 심판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 때에 포도원 주인의 종들과 아들을 죽인 농부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멸망을 당할 것이다. 그럼 농부들이 심판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 영원한 멸망을 받는 이유

 

주인의 아들을 죽여서인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 일차적 이유다. 마지막 날 밤에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라고 소리친 유대 대중 모두가 심판을 받았는가? 그 중에 구원 받은 자가 한 명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스데반의 최초의 순교를 주도했고 예수 믿는 신자를 진멸하려고 외국에까지 가서 설친 바울이 심판받기는커녕 구원 받았고 심지어 가장 위대한 사도가 되었지 않는가? 살인죄를 저질렀다고 심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첫째 비유에서 장남이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라도 뉘우치면 구원의 문은 열려 있었기에 뉘우치지 않은 것이 심판의 이유였다. 마찬가지로 이 두 번째 비유에서도 예수님을 살인한 것은 구세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된 이유와 배경은 상속자를 죽이고 포도원마저 차지하려는 욕심 때문이었다.(38절)

 

이전에 주인이 보낸 종들을 죽인 이유도 실과를 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고생은 자기들이 죽도록 했는데 주인은 아무 하는 일이 없이 더 많이 챙기고 거기다 아예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인이 타국에 있어서(33절) 소출을 주지 않았는데도 직접 챙기러 오지 않았고, 보낸 종들을 죽였는데도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점차 포도원이 자기들 것인 양 착각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아예 그렇게 간주해버렸던 것이다.

 

그럼 조금 이상하지 않는가? 포도원은 이스라엘이요 이 땅이다. 인간 세상을 통치하는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그들만큼 잘 아는 자도 없다. 구약성경의 첫 구절이 바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가 아닌가? 유대교 믿음의 출발이자 가장 근본이다. 그 창조주 하나님께 열심히 제사를 드리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차지할 욕심은커녕 꿈도 꾸지 않는다. 지금도 어떻게 하든 예수님으로부터 신성모독의 꼬투리를 잡으려 들지 않는가?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인 이유

 

성경은 반드시 앞뒤 문맥과 연결해서 해석해야 한다. 이 토론의 발단은 전날의 성전정화 사건 때문이다. 그 때에 예수님이 제사장들을 장사꾼과 결탁하여 재물을 밝힌 탐욕의 죄만 야단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바꾸었다는 꾸중만으로 충분했다. 주님은 성전은 반드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성전 본래의 기능을 완전히 훼손시켰다는 듯이다. 성도들 간에, 특별히 하나님께 지은 죄를 성전에서 진심으로 회개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 또 그 용서를 통해 받아 누린 하나님의 긍휼로 이웃도 사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성전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그 거룩한 예배에 더러운 돈을 개입시켰고 대제사장은 성전의 주인 행세까지 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성전을 청소하신 뜻은 신자가 하나님에게 기도하는데 돈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뜻이다. 누구나 언제든 무슨 일이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곳이 성전이라는 것이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업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고 이사야 선지자는 조건 없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선포했다. 이어서 그러려면 성전에서 무엇이든 기도해야 하기에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이라”(사56:7)고 덧붙였다. 주님이 성전을 청소함으로써 이사야 선지자의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 예언된 대로 하늘의 권세를 갖고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는 분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 그런 질타를 받았다면 구약성경의 최고전문가인 대제사장은 이사야 선지자의 그 예언을 떠올렸어야 했다. 아니 그런 깨우침이 없어도 최소한의 인간적 양심만으로도 회개했어야 했다. 그러나 한술 더 떠서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는 권세를 문제 삼았다. 성전의 권세는 자기들이 독점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또 인간이 만든 종교체계가 하나님의 법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대체했다. 아니 하나님 당신마저 대신하는 바람에 여호와 하나님이 성전에서 실종 내지 부재(不在)하는 단계까지 되었다.

 

유대인들과 그 지도자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를 죽인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의 말씀대로 회개하면 우선 지도자들은 부정부패에서 손을 씻어야 한다. 기존의 향유하고 있던 모든 기득권을 날려버려야 한다. 백성들도 세상 쾌락과 이방신을 음란하게 섬기던 풍습을 끊어야 한다. 그들은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그분을 모르는 척 하기로 택했다.

 

멀리(?) 타국에 있는 하나님이 그들을 방치한 것이 결코 아니다. 계속해서 선지자들을 보냈다. 아무리 해도 회개를 하지 않으니 때가 차매 아들까지 보낸 것이다.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이 명목적인 하나님은 자주 찾지만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부재케 만들었다. 자기들을 따르는 백성들을 봉사로 만드는 바람에 이스라엘은 목자 잃은 양떼가 된 것이다. 주님은 그들을 찾아 참 생명을 주시되 더 풍성히 주시려고 참 목자로 오신 것이다.

 

유대 대중들은 예수님을 하늘의 권세를 가진 자로 인정했다.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맡기신 귀한 청지기의 소명을 잊고 자기들 권세가 타고날 때부터 갖고 태어난 자기들의 것인 양 여겼다. 하나님 노릇하는 재미에 흠뻑 빠져 예수님께 이 비유를 통해 질책을 들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어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첫 번 비유의 예수님 예언 그대로 주님의 가르침과 이적과 사역을 보고도 ‘종시’ 믿지 않았다.

 

너무나 흥미로운 결과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은 첫째 비유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장남이 자기들이라고 스스로 시인했었다. 지금 41절과 45절을 연결하면 나쁜 아들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에게 진멸당해야 할 자들이 바로 자기들이라고 인정한 꼴이 된다. 비록 첫 비유 때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해석을 듣기 전이긴 해도 주님의 가르침의 권세가 너무나 대단하지 않는가?

 

주님이 심오하고 어려운 신학이론이나 천국진리를 설파한 것이 아니다. 평소에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일상적 문화와 관습에 빗댄 예화 하나를 들었을 뿐이다. 당시의 최고 지성인이자 권세자들이 자기들이 대답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모른 채 아주 똑똑하고 의로운 양 정답을 알아맞혔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라고 실토한 셈이지 않는가?

 

예수님이 그들에게 최면을 걸거나 미혹시킨 것이 결코 아니다. 사리 분별이 되고 선악 간에 기본적 구분을 할 수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했다. 그들이 그 정답을 맞혔다는 것은 다른 말로 누가 봐도 하나님께 진멸당해 합당한 죄를 바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짓고 있다는 뜻이다. 더 큰 문제는 대중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받고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또 그들을 경건하고 의롭다고 존경하고 칭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 결국 모든 인간이 진멸 당해 마땅한 죄인이라는 뜻이 되지 않는가?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자기들은 진멸 받아 마땅하다고 스스로 인정한 셈이었고 그렇게 인정했다는 점도 분명히 알았다.(45,46절) 그럼에도 또 다시 회개하지 않았다. 지금껏 선지자들에게 해온 대로 거꾸로 예수님을 죽이려 들었다. 비유컨대 시험 성적이 좋지 않게 나온 학생에게 선생이 공부 열심히 해서 다음 시험을 잘 보라고 충고했는데, 그런 말을 했다는 것에만 앙심을 품고 칼로 선생을 찔러 죽인 것과 같다.

 

비유에서 농부들이 주인과의 계약을 모를 리 없고 잊었을 리도 없다. 지금 대제사장과 장로들도 예수님의 비유의 의미를 금방 알아채고 정답을 맞혔다. 그런데도 인간사회 최고의 지성인, 도덕가, 종교인들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자행했다.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한마디로 하나님이 안 보이기 때문이다. 멀리 타국 즉, 하늘에서 인간 세상을 방치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잘못을 저질러도 일일이 벌을 주지 않는 것 같으니까 나중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고 믿었다. 당장 눈앞의 이익과 쾌락에 눈이 어두워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마저 하지 못했다

 

스스로 진멸 받아 마땅한 자라고 자기 입으로 시인한 것이 자기들에게 어떤 선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다. 아무 의미 없는 헛소리만 한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잘못이 무엇인지 알아도 제대로 고칠 수 없다. 어떤 것이 선인줄 알아도 그대로 행할 수 없다.

 

하나님이 정말 없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는 것과 동일하다. 구원과 심판을 하지 않는 하나님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아가 인간이 소원하고 생각하는 대로 안락과 형통을 보장해주는 하나님은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사실상 하나님이 없는 것과 같다. 인간이 주인이고 하나님이 인간의 종이 되는데 어찌 하나님일 수 있는가?

 

하나님이 정말로 실존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이 땅을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길은 무엇인가? 감옥에 가지 않을 만큼, 또 남에게 들키지만 않을 정도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다.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신나게 즐기며 행하는 것이야말로 논리적이고도 합리적인 인간 구원의 길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불신자들에게 물어보면 자기들이 바로 그렇게 살면서도 그것이 인생을 사는 정답이 아니라고 입을 모아 대답한다. 본문의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정답을 맞히고도 그와 정반대의 악을 행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불신자들이 인간답게 사는 길이 논리적으로 합당한 그 정답 외에 따로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바로 인생의 주인이 자기가 아니라 다른 이가 있다는 뜻이 된다. 이 세상, 포도원을 다스리는 주인이 따로 있음을 무의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이 땅에서 행하는 모든 일들이, 체스트톤이라는 신학자가 말했듯이 그 주인인 하나님을 찾으려는 몸부림이다. 술을 먹고 기생집을 찾아가는 일에서부터 고상하고 경건한 도덕과 철학과 종교를 창안하는 일까지 모두가 진정한 주인이자 참부모인 하나님께 돌아가려는 귀소본능(歸巢本能)이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로서 생래적으로 갖고 있는 본성이다.

 

불신자들도 이럴진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절대계시인 구약성경을 소지하고 있다. 그 어떤 민족도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동행을 통해서 엄청난 이적들을 체험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오직 한 가지 이유로 그분께 등을 졌다. 현실적 육신적 안락 즉, 눈에 보이는 것들에 눈이 어두워져 정작 봐야 할 하나님은 보지 못했다. 불신자들보다 더 영악하고 치사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없는 듯이 살고 있었다.

 

본문 비유의 궁극적인 의미가 무엇인가? 살인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하라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안 보이더라도 있다”는 것이다. 또 그것이 인간이 이 땅을 살아가는 가장 첫째가며 근본적인 원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동산 나무의 모든 실과는 다 먹어도 되지만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고 명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에덴동산 즉, 이 땅의 주인이 그분이라는 사실만은 절대 잊지 말라는 뜻이었다. 최초인간인 아담에게 최초로 주신 명령이라면 인간에게 첫째요, 필수요, 최소한의 지킬 바라는 것이다. 삶의 절대적 기준이다. 또 그 기준대로 살지 않으면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불신자들이 아무리 기생집에서 쾌락을 좇아도 경건한 종교를 탐구해도 그 삶이 항상 갈급하고 허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그분은 신자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행하든지 항상 함께 하신다. 신자는 그 진리를 믿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엄연한 사실이기에 그 사실을 아는 것이며, 그런 앎의 바탕 위에 정말로 굳건히 서있다면 이 땅에서 과연 어떻게 살아야할지도 알 수 있다. 구태여 성경을 몰라도 알 수 있다.

 

이 땅에서 누리는 것, 소유한 것, 만나는 것, 겪는 것, 모든 일들이 그 주인이신 거룩하고 온전하며 선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에 감사하며 또 하나님 대신에 그것들을 거룩하고 아름답고 풍성하게 가꾸며 유지 발전시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까닭도 이 간단하면서도 너무나 엄청나고 소중한 진리를, 아니 사실을 다시 한 번 생생하게 인간들에게 깨우쳐주기 위해서다.

 

확정된 십자가 은혜

 

놀랍게도 예수님은 39절에서 농부들이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였다고 과거시제로 말씀하셨다. 헬라원어로 이미 과거에 완전히 일어난 사건이다. 비록 비유이긴 해도 너무나 놀랍지 않는가?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예언한 것이 아니다. 아예 당신이 죽을 것을 기정사실화 하는 것도 넘어서 이미 이뤄진 일이라고 말한 셈이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스스로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인정하고도 회개하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에 당신을 죽이려는 음모로 가득 차있고 곧 결행할 것을 훤히 알고서도 당신께선 반드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갈 것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그들이 이 비유를 듣고 당장 회개하지 않아도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후에라도 제발 깨달아서 당신을 믿고 따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지금껏 참아주셨듯이 다시금 끝까지 참으시겠다는 뜻이다. 당신께서 죽기까지 참고 참으신 것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참으셨다. 인내의 한계에 이르도록 끝까지 참으셨다. 인간의 죄에 대한 당신의 진노를 최대한 억제한 것이 바로 십자가다.

 

포도원의 농부는 그 동안 삯을 주인에게 한 번도 주지 않았다. 종들이 오면 죽였고 아들이 왔음에도 밀린 삯을 주기는커녕 아예 죽여 버렸다. 포도원 자체를 차지하겠다는 뜻이다. 인간이 포도원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답고 귀중한 이 땅 안에서 저지를 수 있는 죄의 한계까지 간 것이다. 더 이상 지을 수 있는 이보다 더 큰 죄는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그 최악의 마지막 절정의 죄까지 참아주신 것이다.

 

하나님만이 가능한 일이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창시한 위대한 인간 예수로 가능한 일이 결코 아니다. 하늘의 권세를 지니고 성육신하신 하나님 본체로서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렇게 하신 이유도 오직 하나다. 죄인을 심판하는 대신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당신의 진노를 최대한 참으셨다는 것은 그 반대의 의미도 동시에 지닌다. 십자가에서 당신의 사랑을 최고로, 최대한도로 실현한 것이다. 자꾸 최대, 최고라고 말하니까 마치 다른 것들도 좋은데 그 중에 가장 좋은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그렇지 않다. 최선(Best)이 아니다. 유일하고(Only) 완전하고 절대적인 사랑이다. 그 사랑 외에는 다른 어떤 사랑도 온전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런 차원의 사랑이다. 당신의 완전한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십자가에서 솟아나오게 해서 그 앞에 겸비하게 엎드리는 자들에겐 누구나 값없이 마시게 한 것이다.

 

이천 년 후에도 여전히 동일한 상황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과거시제로 십자가 죽음을 확정적으로 말했음에도, 또 실제로 그 사건을 보았음에도 주님 말씀대로(32절) 종시 믿지 않았다. 성전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실종되었고 자기들이 구원과 심판을 나누는 자리에까지 올라갔다.

 

너무나 유감스럽게도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이 신약성경에 온전히 계시되었다. 모든 신자들에게 성령이 내주하여서 그 진리를 조명해주신다. 그럼에도 많은 교회들에서 그 머리 되시는 예수님은 점차 퇴색 내지 실종되어 가고 있다.

 

본문의 대제사장과 장로들처럼 담임목사의 전횡과 독선이 세상 권세자들보다 더 심하고 치사한 경우가 왕왕 있다. 성령이 역사하여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내는 십자가 복음의 능력 대신에 인간이 고안한 각종 프로그램과 행사가 성행한다. 종교는 흘러넘친다. 그것도 입술로만 그렇다. 십자가 앞에 진정으로 온전히 깨어지고 낮아진 심령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예수님이 부재한 장소나 시간은 단 하나도 없다. 그분이 교회 안에서 실종될 리는 없다. 그러나 종교적 입술만 번창하기에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온전히 받아서 누리지 못한다.

 

며칠 전에 크리스천 신문에서 신천지 이단에서 활동하다 회개하고 신학 공부를 한 여자 전도사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목회자들을 모아 놓고 신천지를 예방하는 세미나를 했는데 한 목사님이 어떻게 하면 그 이단에서 교회를 지킬 수 있는지 질문했다. 어떻게 대답을 했는지 아는가? “신천지를 막으려 하지 말라. 대신에 성경을 올바로 가르쳐서 예수님을 제대로 알게 해주라. 그래서 주님 뜻대로 살게 하라. 그러면 신천지 아니라 어떤 이단도 절대로 침범하지 못한다.”

 

반면에 작금의 한국교회처럼 기복주의적인 설교를 하고, 성령의 신비한 능력만 추구하는 은사주의가 성행하고, 단 한 명의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 땅 끝까지 가지 않고 교회만 성장시키려는 전도를 해서는 절대 이단을 막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종교체계를 지키고 교세만 확장하려는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헛된 욕심이라는 것이다.

 

본문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과거시제로 표현할 만큼 당신의 진노를 최대한 억제했다. 다른 마땅한 표현이 없어서 자꾸 ‘최대한’이라고 말하지만, 그나마 가장 근접한 표현은 사실 ‘전부’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당신의 진노를 전부 억제하는 대신에 사랑을 최대한 아니, ‘전부’ 드러내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엄청난 것이다. 지금처럼 기독교가 개독교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놀림을 당할 정도로 시시한 것이 절대 아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진 신자 한 명이 세상을 얼마든지 뒤엎을 수 있다. 무엇에나 선하고 거룩해질 수 있다. 그래서 자기 주변부터, 가정과 직장과 사회를 아름답고도 깨끗하게 바꿔나갈 수 있다.

 

본문의 비유는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자꾸 줄어가는 대신에 인간과 종교만 늘어나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들에게 주시는 경고다. 정말로 주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자세로 서야 한다. 그리고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분의 십자가 앞에 진정으로 겸비하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엎드려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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