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과 목회

 


 

 

 신약성경은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의 시대, 성령의 시대가 이미 이 세상에 들어와 역사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기록했다. 그들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위대한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 수난과 핍박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던 예언자들이 멀리 바라보며 즐거워하던 주님의 은혜의 시대가 이미 우리 가운데 도래하였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직후에 베드로는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소리 높여 외친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라”(행2:16).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말세의 성령시대가 바로 너희들 앞에 열린 것이 아니냐? 어찌하여 머뭇거리느냐?』고 베드로는 그들에게 선포한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소수의 택한 종들에게만 성령을 보내어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게 하셨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그 마음이 완악하여 우상숭배에 빠지고, 폭력과 정욕의 노예가 되었다 성령의 사람들, 즉 하나님의 종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외쳤으나 그들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성령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낙심과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내가 너희를 ……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정결케 하되, 곧 너희의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내신을 너희 속에 두며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36:24-27; 렘31:31-34, 욜2:28-29등 참조).

드디어 하나님께서 옛 선지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 주어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겔36:26), 생수의 강을 흐르게 하는 역사(요7:37-39)을 이루기 시작했다. 누구든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 들여서 예수님을 자기의 주님이요, 구세주로 고백하는 자는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다(행2:27-39).

성령은 그들의 몸을 성전 삼아 그들 안에 거할 것이요(고전6:19), 그들에게 은사를 주어(고전12:7, 7:7, 벧전4:10등) 하나님의 사명과 책임을 감당케 하고, 인격적인 열매를 열리게 하여(갈5:22-23), 사랑, 희락, 화평의 시대를 열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엄청난 것이요(요7:38-39, 4:14, 10:10등), 기뻐 뛰며 찬송하는 새 시대를 열어 주실 것이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7-39).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성령의 새 시대가 이미 도래하여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있지만 오늘 한국교회 가운데는 아직도 성령의 소문도 듣지 못한 것처럼 근심과 우려와 패배의식이 짙어가는 교회들이 많이 있다. 그 이유를 찾아보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첫째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시대의 진정한 의미와 성령의 역사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둘째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베푸시는 은사의 체험과 목적등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본 장에서 성령세례, 성령충만, 성령의 은사와 그 목적, 성령의 열매등을 고찰하면서 성령께서 이 시대에 어떻게 역사하시며, 신자들에게 어떠한 은혜로 넘치게 하는지 규명하고자 한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교역과 목사들의 목회에 새로운 활력을 더하게 하기를 희망한다.


1. 성령세례


⑴ 성령을 받는다는 말과 성령세례


사도행전 1장은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기 전에 사도들 사이에 일어난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사도행전 1:4-5절 말씀은 오순절 성령 이해에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 말씀은 오늘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는 것과 어떤 연관성을 지을 수 있을까? 오순절 교단의 신학은 이 말씀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중생한 신자들에게 성령은 기다리라고 하는 권면의 말씀으로 받아 들인다. 그들은 이 말씀이 중생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구하여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근거로 삼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말로 오순절 교단의 신학이 주장하는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믿고 중생한 후에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이 말씀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의 질문에 먼저 대답을 하여야 할 것이다. ①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에 제자들과 마가의 다락방에 합심하여 기도하던 다른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일이 있는가? ② 그들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에도 중생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여기에는 중생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도 포함된다. ③ 중생과 성령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여기에는 성령을 받는 것과 성령세례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하는 질문이 포함된다. 이제 이 질문들을 하나하나 살펴봅시다.


1) 언제 제자들이 성령을 받았을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강림이전에도 성령을 받았을까?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구절이 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질문했을 때, 베드로는 담대하게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대답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이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라고 거듭거듭 말씀한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고전 2:10; 요16:8, 고전 12:3등 참조).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이 세상신의 유혹을 받아 그 마음이 혼미해 졌기 때문에(고후4:4),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아 알 수 없는 것이다.

복음서에 따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이 세 가지가 있었다고 암시한다. ①귀신들린 자들은 영적 존재인 귀신들의 암시를 받아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 곧 오실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막1:23-24; 1:34, 행19:15, 약2:19등 참조). 이 경우에 귀신들이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다. ② 사람들은 예수님 자신의 말씀과 표적과 기사를 보거나 또는 예수님 자신과 함께 거함으로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고백한다. 요한복음 6:25절과 6장 69절, 그리고 요한복음 1장 35-51절, 요2:1-11등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게 된 다양한 이유들을 제시한다. ⅰ)세례요한의 제자로 있다가 예수님을 좇은 두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거하며 교제를 나눈 후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증거한다. ⅱ)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는다. ⅲ)요4:48과 요6:25절은 예수님의 표적과 기사를 보고 예수님을 믿을 것이라고 암시하며, 실제로 왕의 신하는 자기 아들이 고침을 받는 기적을 듣고 그와 온 집안이 예수를 믿는다(요4:53). ⅳ)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리이까”(요6:68)하고 고백하므로서,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고 암시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 가운데 이처럼, 예수님과의 인격적 교제, 표적과 기사를 경험함, 예수님의 말씀을 들음등으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은 모두 결함이 있는 신앙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구약이 예언한 정치적 메시야로 받아 들이는 경향이 있었고(막10:35-42, 마11:2-5, 마16:21-22),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온 인류를 구속하시며『나』를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였고(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감사와 감격으로 눈물 흘리기 보다는 두려워하고 도망하였다.) 특히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이 십자가를 거절한 이유는 아직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뜻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마16:21-22).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섬김과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막10:42-45, 눅 22:23-27등)

③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깨닫는 또 하나의 방법은 성령께서 오셔서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줄 때이다. 예수님은 여러번 반복하여 앞으로 그들에게 오실 보혜사가 그들을 진리가운데로 인도하며, 예수님을 깨달아 알게 하며,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 가운데 한가지만 보아도 그 내용은 분명해 진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16:7, 12-14).


사도바울은 더 직접적으로 이 말씀을 이해한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성령은 예수님을 깨달아 알게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시라고 시인할 수 없다(고전 12:3).

그렇다면 베드로는 성령을 받아서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하고 대답했을까? 우리는 마태복음 16:17절 말씀 “이를 네게 알게 한 것은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이다”를 읽고 “그렇다”하고 대답하기가 어렵다. ①베드로는 이 고백 후에 즉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절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자로다”(마16:23)는 예수님의 책망을 들었다. 성령을 받은 자가 그 즉시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자가 될 수 없다. ②베드로는 그 이후에 계속하여 섬김과 고난을 통한 예수님의 구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③ 그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다시 옛날처럼 고기 잡으러 갈릴리로 내려갔다. 이 모든 사실들은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에 성령을 받았다고 결론 지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결정적인 단서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발견된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반영하면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신다. 요한은 이 예수님의 말씀이 예수님을 믿는자들이 받을 성경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7:39)고 주석을 달고 있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는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문맥에서 예수님의 받을 영광은 십자가의 고난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진정한 영광의 출발이며, 구속의 장이며, 사탄을 물리치신 전승 기념비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진 절정의 순간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고난을 영광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패배를 승리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셨다. 예수님은 저주의 십자가를 영광의 십자가로 바꾸셨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고난은 예수님의 영광이다(요11:4, 12:16, 33, 13:31등 참조).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요한은 거듭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 이후에야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강림할 것이며, 그들은 성령을 받아 성령의 사람이 될 것을 예고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할 것이요(요15:26).

그러하나 내가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요16:7).


예수님은 마지막 날 밤의 설교에서 4회에 걸쳐 “내가 가면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라”고 성령강림과 제자들이 성령받을 것을 강조한다. 모두가 미래형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며 승천하신 후에야 제자들이 성령을 받게 될 것을 가르친다.

누가복음에서 우리는 성령의 약속에 대하여 더욱 분명한 말씀을 읽는다: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눅24:49).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약속은 사도행전 1:4-5, 2:33 등에서 성령의 약속이라는 사실이 명백하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4-5).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행2:33).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 때이며, 그 이전에는 성자 예수의 말씀과 표적과 기사와, 인격등에 의하여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의 예수님 지식은 결핍이 있는 것이요, 제자들마저도 완전한 그리스도의 지식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순절 성령강림의 날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2) 제자들은 언제 중생하였을까?

중생이라고 함은 성령의 역사로 죽음의 몸을 가진 인간이 영원한 새 생명을 얻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중생은 칭의와 회심과 밀접하게 연관된 경험이지만 서로 구별되는 개념이다. 칭의(justification)는 우리가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예수님의 피로 씻어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과 사이에 막혔던 담이 무너지고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중생은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새 생명을 가진 변화된 영적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회심(conversion)은 경험적으로는 칭의와 중생과 동시적으로 일어날 수 있으나 강조의 초점이 인간의 행위, 즉 회개와 믿음으로 예수님을 받아 들이는 결단을 강조한다는데에서 중생과 칭의와 구별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회심에서 인간적인 결단을 강조한다고 하나 그 결단도 어디까지나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에 중생과 회심은 강조점에서의 차이지 실제로는 동일한 사건을 의미할 수 있다.

제자들의 중생의 시점이 언제인가? 이 질문은 대답하기가 매우 어렵다.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대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이전에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성령을 받지 못했는데 중생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반면에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이미 만났고, 그분께 배웠고, 그분을 영접하였고, 그 분을 따랐다. 중생은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님의 새 생명을 함께 나누는 것이므로,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중생하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질문들에 합당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 어떠한지를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구약시대에 성령은 소수의 선택받은 하나님의 종들에게만 임하여 역사했으며, 하나님의 성령을 선택된 소수에게 보내어 예언하게 하시고, 성경을 기록하게 하시고, 기적을 행하게 하시고, 또는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하시고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이야기할 때에 우리는 선지자, 왕, 제사장들을 하나님의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은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그 뜻은 선지자, 왕,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하나님의 교역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 가운데 수행한 하나님의 종들이요, 그들은 성령을 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교역을 수행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 대부분은 성령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며, 죄의 길을 걸었다. 후기 구약의 예언자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백성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어 그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청종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미래를 예언하였으나 예언자 자신들도 그 시대를 멀리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 속에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36:25-27).


구약시대는 세례요한까지 이어지며, 신약성경에 기록되었으나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가랴(눅1:67), 엘리사벳(눅1:41), 마리아(눅1:35), 시므온(눅1:25), 세례요한(요1:15)등은 아직도 구약에 속한 사람들로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는 하나님의 사명들을 수행한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사건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가지의 대략 3년 기간을 의미한다. 이 기간에 성령은 오직 예수님위에 집중적으로 임하여서 역사하신다.

누가는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눅 3:21-22).


세례요한도 이 사실을 증거한다: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요1:32-34).


예수님은 홀로 다니시지 않으셨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예수님이 성육신 하신 순간에도 삼위일체이다. 예수님의 나심 자체가 그러하지만(눅1:35),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동안에 성자 예수님 위에 성령하나님이 강림하여 머물러 계셨고, 예수님 자신의 교역은 곧 예수님과 함께 계시는 성령의 교역이었다.(마12:28, 눅4:17-21등). 또한 예수님은 성부와 별도로 역사하는 것이 아님을 거듭 강조하면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14:11)고 권고 하고 있다. 즉 예수님의 교역은 그 안에 계신 성부의 교역이요, 그 위에 머물러 계신 성령을 통하여 이루시는 교역이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공생애는 기간동안에는 성령께서 예수님에게만 집중적으로 역사하시고 제자들에게는 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우리에게 새시대의 도래를 선언한다. ① 사도행전 2:1-21에서 언급하는 바에 따르면, 새 시대에 와서 성령은 택한자와 평신도,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와 노인을 구별하지 않고 모든 믿는자에게 임한다. ② 구약시대나 예수님의 공생애 시대에 선지자들과 예수님 자신이 예언한 성령 시대가 도래하였다. ③ 모든 믿는자는 성령을 받은 자요, 예수님을 믿음이 성령 받음의 필요충분조건이 되었다. ④ 믿는 자들은 아버지의 약속한 성령을 받을 뿐 아니라 성령의 권능으로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었다.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경륜에 따라서 오순절 이후시대는 성령의 시대가 되며, 모든 믿는자는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교역에 참여하며, 하나님을 영화스럽게 하는 새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에 중생하였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해 보자. ① 제자들은 성령을 받지 못하였으나 예수님과 함께 머물면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단편적으로 경험하였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고 말씀하셨다. 즉 예수님의 교역 그 자체가 성령의 능력으로 수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본 자는 성령의 역사를 단편적으로 깨닫는다. 하나님의 성령은 받지 않고 예수님 위에 계신 성령의 역사를 목격함으로 단편적으로 성령을 깨달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되 단편적으로만 이해하였다. ② 하나님의 성령을 받지 않고 예수님 위에 계신 성령의 역사를 목격함으로 단편적으로 성령을 깨달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되 단편적으로 이해하였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절하여 사탄의 일을 한다.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의 고백에 동의했으나 예수님의 구원의 길과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는 단편적인 지식에 머물렀다(행1:6-7, 마28:17, 26:56등).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님께 영접을 받고, 예수님안에서 훈련을 받았으나 그들의 믿음의 결함으로 그들은 예수님을 완전히 믿지 못하였다.

베드로는 자기가 진정으로 예수를 믿은 시점을 오순절 성령강림과 연관지어 이야기 한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행11:15-17).


이 말씀 가운데서 우리가 분명히 추론할 수 있는 것은 ① 지금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임한 성령사건을 오순절 성령사건에 비추어서 이야기하고 있으며, ② 예수님이 예언한 성령세례는 오순절날 120명이 성령받은 사건 뿐 아니라 고넬료 가정이 성령 받은 것까지도 포함하고 있으며, ③ 베드로가 주 예수를 믿었다고 진정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시점은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시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입으로 “우리가 주 예수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하고 말씀하심으로 요한복음 7장 39절 말씀 “이는 그를 믿는자의 받을 성령을 말씀하신 것이라”와 같은 말씀을 하고 있다. 즉 성령과 믿음은 하나의 동전이 양면같이 성령이 오셔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을 수 있고, 믿음이 있어야 성령을 받는다. 성령을 받는 것과 믿음을 가지는 것은 하나속에 다른 하나가 있는 것으로 이 양자는 분리할 수 없는 것이고 다만 구별지을 수만 있다.

우리가 이상에서 고찰한 바에 따라서 ①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이전에도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였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며, ② 그들의 성령인식과 예수님 신앙은 아직도 결함이 있는 신앙이었고, ③ 제자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은 시점은 오순절 성령강림시이다.

이것은 성경적으로 뿐 아니라 우리가 고백하는 신조와 신학에도 일치하는 것이다. 장로교 신조 8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성부와 성자로부터 오신 성령이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에 참여하게 하신다. 사람으로 하여금 죄와 비참함을 깨닫게 하시며, 그의 마음을 밝혀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그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권하시며, 권능을 주셔서 복음을 값없이 주시겠다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게 하시며, 또 그 안에서 역사하여 모든 의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대한예수교 장로회 헌법, 28면)


그리고 요리문답 30번과 31번등은 성령의 교역을 말씀하시는데 신조 8과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 성령은 예수님을 알게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하며 믿게 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알 수도, 영접할 수도, 믿을 수도 없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님을 주시라 시인할 수도 없고 따라서 중생할 수 없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에 제자들이 성령을 받지 못했다면, 그들은 중생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3,5).


3) 성령과 중생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중생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이다. 중생하기 전에 우리는 죄와 사탄의 지배 아래 있었으나 중생과 더불어 죄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워졌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성령의 인도를 받아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서 힘쓴다.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처럼 중생은 전적으로 성령의 교역이며,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

중생은 그리스도밖에 있던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는 것인데 중생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들은 무엇일까? 그 대답은 말씀의 전도와 성령의 역사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지 않으면 중생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성령은 말씀의 전도되는 그곳에 역사하여, 그 말씀을 듣는 자의 마음을 열게 하시고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아 알게 하시며, 그분을 영접하게 하신다. 장로교 신조 8번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성령이 오신 목적과 그 분의 교역은 불신자들의 마음을 열어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하시며 믿게 하는 것이요, 신자들을 성화시키며 하나님의 은사로 무장시켜 하나님의 교역을 담당케 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듣는 자들 가운데 회개와 믿음을 창조하신다. 회개는 죄에서 돌아서는 것이요, 이제까지 예수에게 가지고 있던 잘못된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바울이 회개하였을 때에 그는 과거의 죄를 회개하는 일 뿐 아니라 그 때까지 잘못 알고 있던 예수님에 관한 모든 지식들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회개는 ∼로부터 돌아서는 것만 의미하지 않고 ∼향하여 돌아서는 것까지 암시한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을 향하여 돌아서서 그 분을 영접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회개는 믿음의 시작이요, 믿음은 회개의 마침으로 이 둘은 하나의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둘을 종합하여 우리는 회심(conversion)이라고 말한다. 중생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회개와 믿음을 창조하시고 우리 안에 새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의미한다. 즉 중생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나 그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도와 연관된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생각할 때마다 특수한 상황을 본다. 그들은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성육신하신 말씀을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고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로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다. 사실 그들은 성령이 오셔서 그들의 눈을 열어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실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앞에 하나님 말씀으로 서 있었고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교제하며, 배우며, 성장하였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특권을 소유한 자들이었다. 우리가 볼 수 없던 것을 보고, 우리가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진 분들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들의 예수님 지식에 결함이 있고 그들은 중생하지 못한 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의 육체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고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외모밖에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혼동하며 당황하고 있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도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하고 질문하였다.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야, 곧 정치적인 메시야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민을 구속하시는 구세주로 믿은 것은 베드로의 말대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때였다.(행11:15-17). 그러므로 그들은 아직도 성령을 받지 못한 자였고,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여 중생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우리와 다른 특수한 상황에 머물러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성령을 받기 전에는 중생하지 못하였으며, 오순절날 성령을 받음으로 비로서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어 중생하였다는 점에서 우리와 다를 바 없다. 요약하면 성령을 받을 때에라야 인간은 예수님을 올바로 깨달아 알 수 있으며, 그 분을 온전히 믿어 중생에 이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제일 먼저 제기했던 질문 “성령을 받는다는 것과 성령세례는 같은 사건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별개의 사건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위에 언급한 것을 토대로 결론을 지어 보자. ① 사도행전 1장 4-5의 “너희는 몇날이 못 되어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말씀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의미하며, 베드로는 이 사건을 성령 받는 것이라고 해석하며,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내려와 성령 받은 사건과 동일시하고 있다. 따라서 성령세례와 성령받는 것은 동일한 사건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② 제자들도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전에 성령을 받지 못했으며, 그들이 최초로 성령을 받은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라고 한다면, 성령을 받고 중생한 자들이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그 기초를 잃어 버린다. 성령을 받아 예수님을 믿는 사건을 우리는 성령세례라고 해야 할 것이다. ③ 따라서 우리는 성령세례는 예수님을 믿고 받아 들여 예수 안에서 새 삶을 살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라고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⑵ 성령세례의 증거

오순절운동과 성령운동(Charismatic Movement)에 속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은 중생한 후에 방언을 표지(Sign)로 하여 성령 세례를 받는다고 믿는다. 이 주장은 19세기 성결운동 (Holiness Movement)과 그 신학에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성결운동의 요체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사함을 받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으로 만족해서 안되며, 윤리적으로 성결함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준 R. A 토레이(Torrey)박사의 『성령론』은 성결운동의 성령론을 대표하는 책이다. R.A.토레이의 성령론은 3단계 성령론이다. ① 성령의 제 1차적인 역사는 중생사역으로 성령은 불신자에게 감화하여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여 죄 씻음을 받게 하신다. 이것은 성령의 외적인 역사로 제1의 축복이다. ② 성령의 제 2차적인 역사는 성령세례이다. 성령세례는 놀라운 체험과 함께 오며, 성결의 축복을 받는다. 성령세례를 받은 신자들속에는 성령이 내주한다. 제 2의 축복으로 신자들은 성령의 사람이 된다. ③ 성령의 제 3차적인 역사는 은사의 체험이다. 성도들은 제 3차 축복을 받을 때에 성령의 은사들을 받아 하나님께서 위임하시는 사명을 이 땅에서 수행할 수 있다.

R.A. 토레이의 성령론에 따르면 성도들은 다같은 축복의 사람들이 아니다. 성도들은 ① 단순히 중생하여 죄 용서만 받은 성도들, ② 성령세례를 받아 성결의 축복까지 받은 성도들, 그리고 ③ 성령의 은사까지 받아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성도들로 구분되고 차별된다. 성도들은 언제나 더 큰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여야 하며, 제 3의 복을 받아야 진정한 하나님의 일꾼이 된다.

현대 오순절 운동의 효시가 된 미국 캔사스 주 토페카시에 소재한 성경학교에서 일어난 방언 운동은 바로 19세기의 성결운동의 맥락에서 일어났다. 파함(Charles Parham)목사는 감리교 목사였으나 성결운동에 깊이 참여하였다. 그는 신앙체험을 부흥시키려는 목적으로 토페카시에 성경학교를 개설하였다. 파함 목사의 영향을 받은 학생들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세례를 받는 방법을 열심히 연구하였다. 그들은 사도행전을 읽고 토론하던 중에 성령 세례를 받을 때마다 방언이 언급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사마리아의 성령 받는 사건에서만 방언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때에 사람들이 성령 받는 것을 보았다고 암시하는데 이것은 틀림없이 방언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학생들은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합심하여 방언과 함께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열심으로 기도하던 중에 1901년 1월 1일 새벽에 오즈만(Agnes N. Ozman)이라는 여학생이 방언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하여 현대 오순절 운동의 문이 열린 것이다.

그들은 엄청난 체험과 함께 방언을 받은 후에 이것을 성령세례라고 믿었다. 그들은 성결운동의 맥락에서 자기들의 경험을 해석하였다. ① 방언을 받은 모든 성도들은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으며, 예수님의 피로 죄 씻음을 받았다고 믿었다. ②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은 방언체험과 함께 새로운 신앙의 단계를 체험했으며, 이것은 중생과 구별되는 성령세례로 방언을 그 표지로 하여 받는 것이다. ③ 모든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은 방언을 표지로 하는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며, 방언은 성령세례의 증거이다.

이러한 주장은 성경에 기초한 것이라기 보다는 경험을 기초로 하여 성경을 재해석한 것이다. 그들은 경험에 대한 인간의 갈망과 방언체험이라는 놀라운 경험이 먼저 있었고 그 경험을 토대로 성경을 다시 읽으면서 이러한 교리를 만들어 내었다. 이것은 성경해석 방법의 하나로 받아 들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다시 한번 성경을 순수하게 연구하면서, 즉 우리의 경험적 사실을 비우고,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를 정확하게 찾아내고 우리의 경험을 그 말씀에 의해서 재해석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말씀의 종이요, 말씀에 의하여 새로 태어나고, 말씀에 의하여 거룩하여 지는 말씀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순절 교단의 2단계 성령이해는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데가 많이 있다. 사도 요한은 성령을 “믿는자가 받을 성령”이라고(요7:39)말씀한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하고 말씀하신다(요14:16). 이 말씀은 포괄적인 말씀이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성령세례를 받고 다른 이들은 성령세례를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어떠한 가능성도 배제한다. 이 약속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성령을 받아 성령이 자기 속에 내주하는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못한 그리스도인을 나눌 수 없게 만든다.

바울은 더욱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정 3:16).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성전 같이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고 권면하면서 믿는 자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따라 거룩하지 않으면 안될 이유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육신에 속하여 시기와 분쟁을 일 삼고 있다고 책망한다(고전 3:1-3).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 중에 어느 한 사람도 성령의 전이라는 말씀에서 제외시키지 않는다. 그들이 비록 육신에 속하여 시기와 분쟁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들은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은 더욱 분명하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줄을 알지 못하느냐?”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몸에 그리스도의 성령이 흐르고 있으며 그러므로 성도의 몸은 성령이 거하는 전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비유가운데서 그리스도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요2:21)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지체인 성도들에게도 그 몸에 거하는 성령이 계시지 않겠는가? 몸의 지체에 피가 흐르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라. 몸에만 피가 흐르고 몸의 지체에는 피가 흐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피가 흐르지 않는 지체는 죽은 지체이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있는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계신 성령이 거하는 전이요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며, 믿는 자는 모두 성령을 받은 자들이다. 바울은 이것 때문에 논쟁을 일으키고 있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단호하게 선언한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였느니라”(고전 12:13).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모든 자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이다. 한 몸의 지체가 되어 있는 모든 성도는 한 성령을 마셨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제 모두 한 성령을 받아 한 몸이 되었다.

그러면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어떤 증거들이 우리에게 있을까? 성령이 오시면 성도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성령이 성도들에게 오신 증거들이 있을까? 바람은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지만 바람이 불 때에 일어나는 현상들을 보면서 바람의 방향과 강도를 알 수 있듯이 성령이 오시면 그 분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의 결과를 보면서 우리는 성령 받았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 첫째로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의 죄를 책망하신다(요16:8). 성령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이 누구에게든지 임하면 그는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간혹 정욕을 따라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사탄의 시험에 빠질 수 있으나 성령께서는 우리의 양심을 자극하여 통회하게 하고 죄를 뉘우치게 하신다. 만일 당신이 지금 죄를 짓고도 아무런 가책이 없다면 당신의 양심은 죽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죄를 짓고서 얼굴이 붉어지며, 남 보기가 부끄럽고, 양심에 찔리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는다면 즐거워하라. 성령께서 이미 당신 안에 오셔서 당신의 죄를 책망하기 시작한 것이다. 죄를 책망받을 때에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신 증거라고 해야 할 것이다.

2) 성령께서 오신 두 번째 증거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임을 깨달아 알게 된다는 것이다(요16:9). 간혹 인간이 짓는 다른 모든 죄는 성령이 오시지 않아도 깨우침 받을 수 있다. 공자는 성령의 사람이 아니지만 하루에 세번 반성하며 죄를 뉘우쳤다고 한다. 세조대왕은 성령을 받지 않았으나 말년에 조카 단종을 죽인 죄 때문에 괴로워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오직 성령께서 그에게 오셔야만 가능한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지식인도, 종교인도,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임을 깨달을 수 없다. 지금 당신이 예수님을 바로 믿지 못한 것 때문에 안타까워하며, 예수님께 더 헌신하고 더 충성하여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바로 그 마음이 성령께서 당신에게 주시는 마음이요, 당신은 성령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3) 우리가 성령을 받지 못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원의 십자가요, 나를 위해 흘리시는 예수님의 보혈이요, 하나님의 영광이요, 구원의 능력임을 깨달을 수 없다.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다.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로마인들에게는 저주의 십자가이다. 그러나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이요 하나님의 능력이다. 어떻게 십자가의 참 의미를 알 수 있을까?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과 2장에서 오직 성령의 사람만이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깨달아 알 수 있다고 거듭하여 가르친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느니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8, 10,13).


예수님의 십자가의 비밀은 오직 성령으로만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보혜사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시기 전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성령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책망하며(마16:22),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예수님을 반대하며(막14:46-48), 도망가며(막14:50), 슬퍼하여 울며(눅23:26-29), 비웃었다(눅23:35-37). 그러나 성령께서 강림하여 120명이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을 때에 그들은 한 목소리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높이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선포하기 시작하였다(행2:1-39).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신 결정적인 증거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십자가이며,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임을 깨닫는 것이다.

4) 성령께서 오시지 않으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할 수 없다(고전12:3). 고린도 교회는 방언의 은사 때문에 혼란한 교회였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이들은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자들을 향하여 성령을 받지 못한 신자라고 꼬집고, 방언을 못하는 신자들은 자기들이 정말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인지 방언하는 자들이 지나치게 열광주의자들인지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정을 들은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4장까지 3장을 성령과 성령의 은사에 관해서 설명하는데에 사용하였다. 바울은 이 부분을 시작하면서 누가 성령받은 사람인가를 이야기하며 시작한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고린도교회의 전통은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심을 믿습니다”하는 고백을 하여야 세례를 베푼다. 그러므로 세례받아 그리스도의 몸이 지체가 된 자는 누구든지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심을 믿습니다”하고 고백하였다. 바울은 이것을 증거로하여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성령을 받았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당신이 당신의 입으로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심을 믿습니다”하고 고백할 수 있느냐에 있다. 당신이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다면 당신은 곧 성령을 받은 성령의 사람이다.

5)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신 성령께서 우리안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가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 곧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다고 말씀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5-1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4:6-7).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 하나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하고 부르짖을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신 증거요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이다.

6) 성령의 또 하나의 증거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공적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네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이 없는 자는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고백하지 못한다. 안디옥의 폴리캅 감독처럼 “80평생을 살아오는 동안에 우리 주님이 나를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주님을 배반할 수 있느냐?”고 죽음을 앞에 놓고도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그에게 오셨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확신있게 고백할 수 있는가? 그러면 당신은 이미 당신 안에 성령께서 오셨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

7)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는 권능을 받고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하는 사람이 된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오는가? 예수님의 증인이 되지못함을 안타까워 하는 마음이 어디서 오는가? 그리스도의 교역을 하고자 하는 열망과 소명이 어디서 오는가? 성령이 임하여 권능을 베풀 때에 그들은 어디에서든지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가운동, 하나님의 선교, 진정한 증인 운동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 중요성을 강조하거나 방법을 연구하기 전에 성령으로 충만케 되어야 한다. 초대교회 제자들이 선교대학을 다녔는가? 전도학 강의를 들었는가? 그러나 그들이 강력한 그리스도인의 증인이 되지 않았는가? 그 비밀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성령 충만을 받았기 때문이다. 전도는 성령의 증거이다. 증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성령께서 일으키신다.

성령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오셨다(요16:14). 그러므로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을 믿게 하고 고백하게 하며 그분을 증거하며 그분께 헌신하여 살게 한다. 어느 누구도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고 그 분을 믿을 수 없으며, 그 분의 형상을 닮는 성화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순종하는 것 자체가 결국 성령의 증거이다.  




2. 성령충만


⑴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항상 선물로서 성령을 최초로 받는 것을 지칭한다. 그러나 성령충만을 받는다는 말은 최초로 성령을 받아 충만하게 채워졌다는 것을 의미할(행2:4; 9:17; 눅1:15) 뿐만 아니라 이미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에게 새롭게 성령으로 충만하는 것(행4:8; 4:31; 13:9등)과 계속적으로 채움을 받는 과정을 의미하거나(행13:52; 엡5:18),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성령충만의 상태(행6:3,5; 7:55; 11:24;눅4:1등)등을 기술한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최초로 성령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다는 말은 좀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어, 중생시에 최초로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과 동시에 그 후에 일시적으로나 또는 계속적으로 다시 성령을 채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의 역사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의 중생시의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을 알게 하고, 그 분을 믿어 영접하여 새 생명을 얻게 하는 성령세례의 측면이다. 다른 하나는 계속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받아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 받게 하며, 그리스도의 교역에 참여하게 하는 성령충만의 역사이다. 이것은 한 성령의 두가지 역사요, 한 성령의 두가지 측면이다. 성령세례는 성령께서 최초로 성도들에게 임하는 것을 강조하며, 성령충만은 그 성령께서 성들 안에서 머물면서 계속적으로 역사하는 것을 강조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받았지만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보다 자기들의 삶의 영역을 더 많이 성령께 바치고 순종하여 살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자기들의 삶을 전적으로 성령께 바치고 완전히 성령께 순종하여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라고 특징짓고 있다(행6:35, 5, 11:24) 성령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들의 삶의 영역 가운데서 더 많은 영역을 그리스도께 헌신하며 살며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자체 모순이 없다.

초대교회에는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여 사는 사람들이 있을 뿐 아니라, 특정한 때에 특정한 목적으로 신자들이나 교회공동체를 성령으로 충만케한 경우들도 있다. 사도행전 4장 8절에서 이미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과거에 예수를 부인하였던 공회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증거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때에 이러한 특정한 목적으로 성령충만을 받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례는 사도행전 4장 31절일 것이다. 여기에 보면 이미 중생과 함께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공동체가 간절한 기도의 결과로 그들이 처한 심각한 위험에 대처할 수 있게 새로이 성령의 충만을 받는다. 예루살렘 교회는 당국자들의 박해에 부딛쳤고, 그들은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그 결과로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성령충만을 받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수 있었다(행4:8, 7:55, 13:9, 13:52등과 비교).


⑵ 성령의 내주와 성령충만

성령의 역사의 두 형태, 즉 선물로서의 성령을 받는 최초의 성령의 역사와 새로운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그리고 새롭게 성령충만을 받는 것과 사이에 발견되는 문제는 성령자체의 특성을 이해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안에 살아 계시며, 신자들 안에서 역사하신다. 성도들 안에 내주하신다고해도 한 인격으로서의 성령은 인간이 마음대로 통제하거나 소유할 수 없다. 그 분은 인간안에 거하시되, 사람들이 계속하여 자신들을 성령께 드릴 때에만 우리 안에서 온전히 역사하신다.

여기에서 “성령이 우리 신자들 안에 거주하신다”는 말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와서 우리 주님이 되신다”는 말의 관계를 잠시 생각해 보자. 바울은 이 문제에 관해서 가장 적절한 대답을 주고 있다. 그는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또는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성령안에 있다는 것을 육신에 있다는 것과 대조되는 삶으로 보았다(롬8:4-8; 갈5:16-17과 비교하라). 이러한 대조는 근본적으로 두가지 서로 다른 삶의 양태를 일컫는다. 사람은 육신을 따라 살든지(즉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를 떠나서 죄와 노예와 죽음의 옛사람을 따라 살든지), 또는 성령안에서 생명과 자유의 새 사람으로 살든지 할 수 밖에 없다.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은 성령의 영역안에 있다는 것이요, 성령께서 새 삶을 주시는 새 시대안에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성령의 새 시대에 믿음을 가지고 살아 간다는 것은 곧 성령이 믿는 자들 안에 들어오셔서 거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성령의 새 시대안에 사는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라고 가르친다(갈3:5, 엡3:16-17). 그는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인들 안에 거하시며,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안에 없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선언한다(롬8:9).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 안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신다. 한 편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영은 곧 성령이시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인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영으로 계신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오셨다는 말과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는 말은 같은 사건의 다른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 같이 들린다. 그러나 성령과 그리스도는 인격적으로 동일시 될 수 없다.  3위 일체의 신앙에 따르면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 성부, 성자가 함께 계시고, 성자가 역사하는 곳에 성부, 성령이 함께 역사한다. 그러나 3위 하나님은 각기 독자적인 인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이 곧 그리스도라고 할 수 없다. 래드(Ladd)는 “성령안에서 자기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는 그리스도”(George Eldon Ladd, Theology of New Testament, 482-484)라고 표현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우리 안에서 무엇을 하시는가?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살게 하는 원천이 될 뿐 아니라 새 삶을 살게 하는 능력이다. 성도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새로운  욕망과 능력을 받는다. 바울은 초대교회와 함께 성령을 초자연적인 능력의 원천으로 이해하였다. 성령과 능력, 프뉴마와 듀나미스는 함께 서로에게 속해 있다. 바로 이점이 로마서 8장에서 율법이 명하기는 하지만 행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오셔서 능력을 주신다고 선언한 이유이다(롬8:1-11). 성령은 주님의 영이기 때문에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그리스도인의 형상을 따라 살도록 변화시킨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는 것이 -삶과 교역가운데서 - 곧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변화의 역사의 목표라고 할 것이다(고후3;17-18).


신자의 삶의 직설법이요 명령법인 성령

신자의 삶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며,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는 새 삶의 능력으로서의 성령은 신자들의 의지에 반해서 또는 신자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신자의 삶을 변화시키며 새롭게 고쳐 나가는 항거할 수 없는 능력이 아니다. 새로운 삶은 충동적인 삶이 아니다. 그 삶은 신자의 의지가 변화를 받았기 때문에, 신자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한 삶이다. 성령이 내주하셔서 새 삶의 능력을 주심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아직도 새 삶을 결정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내주하시는 성령은 복음으로 인간의 심령을 변화시켜 율법이 할 수 없었던 그 일을 할 수 있게 하셨다.

여기에는 우리는 직설법과 명령법사이의 역설을 본다. 한 편으로 성령은 신자들 안에 거주하시면서 새 삶을 살게 하는 원천이요 능력이라고 선언한다.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는” 것을 오직 하나님의 성령은 하실 수 있다(슥 3:6). 성령은 우리에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등의 열매를 열리게 하시며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갈5:22-23). 이것은 직설법이다. 성령께서 시작하신다. 성령께서 성취하신다. 성령께서 완성하신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을 하는가?

그런데 성경은 다시 명령법으로 우리에게 권면한다:


너희는 성령을 쫓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5:16, 18, 롬8:2, 10-13 비교).


우리는 끊임없이 명령법의 권면을 받는다. 성경은 우리에게 순종의 삶을 명령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의 열매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들의 순종의 열매인가?

성령은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시면서 힘으로도 아니되고 능으로도 아니되는 것을 성취하시는 새 삶의 능력을 부여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성령은 우리안에 새 사람을 명하며 권고하여 성도들 안에 새 삶의 욕망을 일으키고 새 사람의 방향을 제시하신다. 성령은 직설법을 주시며 동시에명령법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성령은 권면하며 명령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본 받아 살 수 있게 욕망을 주시고 방향을 제시하시고 규범을 주실 뿐 아니라 성령 자신이 명하는 삶을 순종하는 성도들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권면(엡5:18)의 말씀 가운데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성령의 충만은 성령께서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는 것을 전제한다. 이 명령은 성령을 받은 신자들을 향한 명령이기 때문이다. 이 명령은 곧 성령을 받아 새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의지가 변화를 받아 새로운 피조물(직설법)에게 주시는 권면이다(명령법). 그리고 이 명령에 순종하여 계속하여 성령께 자신을 드리고 헌신하는 자들 가운데 성령은 충만하게 역사하여 더욱 성령의 열매로 가득하게 만드신다. 성령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성도들에게 (직설법에 기초하여)성령의충만을 받으라는 명령법을 주시며, 이 명령을 순종하여 주님께 헌신하는 자들에게(명령법에 근거하여) 더욱 직설법이 성취된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더욱 헌신할 때에 더욱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누린다.


성령충만 - 그리스도께 절대 헌신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은 우리의 모든 삶을 주 예수님이 완전히 지배하시도록 허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게 계속하여 주 예수님의 완전한 지배를 받고자 우리 자신을 헌신할 때, 우리는 아직도 자기 중심적인 영역을 발견하며, 이 영역을 항상 주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영역을 지속적으로 발견하여 주 예수께 드릴 때,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주님은 더욱 더 완전하게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순종과 헌신의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성령충만은 받는 것은 단 일회적인 주님과의 관계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의 본래의 뜻은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의미이다. 성령충만은 지속적으로 성령을 통하여 주 예수께 헌신하여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과정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갈3:5)과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하여 하나님께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충만케 하신다(눅11:13, 행4:23-31). 부르너가 다음과 같이 지적한 것은 합당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섬기기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며 성령을 구할 때에는 그들은 언제든지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선물을 받을 것이다……  에베소 5:18은 ……    바로 지금 이 순간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지속적인 책임과 특권을 보여주고 있다.(Bruner, 1970, 171 면)



3. 성령의 은사


용어 정의


먼저 여기에서 사용할 용어들을 간단 간단히 정의하고자 한다. 성령운동은 Charismatic Movement의 우리말 번역이다 1901년 미국 캔사스주 토페카시의 조그만 성경학교에서 시작된 20세기 오순절 운동(Pentecostal Movement)은 1961년부터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그 이전까지는 방언체험과 함께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하거나 그러한 교리를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속해 있던 교단을 떠나서 오순절 운동에 속한 교단에 들어갔다. 그러나 1961년 이후부터는 이러한 사람들이 자기가 속한 교단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고, 방언을 체험했다고 주장하며 성령충만한 삶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 후자에 속한 사람들을 일괄하여 교단오순절 운동자, 신오순절 운동자(Neo-Pentecostals), 또는 성령운동 (Charismatic Movement)에 속한 자 라고 칭한다.

카리스마(Charisma) 또는 은사는 같은 것으로 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독특한 삶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며, ② 교회와 교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로 넘치게 하는 통로요, ③ 그리스도인 각자가 교회와 교역에서 담당해야 할 책임을 부여하고, 기능을 갖게 해 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으로 사용하겠다. 은사(Charisma)를 정의하면 『성령께서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분배해 주신 교역 또는 재능으로 교회의 덕을 세우며, 세상을 섬기는 목적을 수행하는 수단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고 할 것이다.

목회라는 말은 교역(ministry)의 한 가지로 목양의 관점에서 목회자와 교회가 하는 모든 교역을 의미한다. 목회는 영어의 Pastoral Care의 우리말 번역이다. 교역(ministry)은 목회보다 더 포괄적인 용어로 1952년 룬드(Lund)에 개최된 세계 기독교 협의회 신앙과 직제 위원회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다음 세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① 교역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수행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교역이다. ② 성령의 능력으로 기독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수행되어온 역사적인 연속성을 갖는 교역이다. ③ 기독교공동체 속에서 사도적 전승을 계승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해 주는 교역으로 그 중심은 ⅰ〇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하여 구속받음, 〇ⅱ주님의 모범과 가르침을 따라 살게함, ⅲ〇 성령안에서 계속적으로 임재하시는 주님에 의하여 인도되는 삶을 살도록 돌보는 일을 교역이라고 한다.

교역은 세가지 사명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① 선교적 사명 : 새로운 시대와 장소에서의 복음증거와 동시에 세상 가운데 편재해 있는 그리스도인 아닌 사람들을 결신시키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시키는 일, ② 양육의 사명 :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새로 결신한 자들을 양육시키기 위해 수행하는 모든 일, ③ 교회 일치의 사명(Oikodome의 사명) : 에베소서 4장 12절과 16절에서 지적해 주는대로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온 몸의 지체들이 질서와 일치를 이루어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등이다. 이러한 교역의 사명은 교회전체에게 주신 사명으로 안수 받은 목사들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가 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담당해야 할 사명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일반 교역자들이다. 목사는 교회가 안수를 통해 특정한 일을 수행하도록 위임받은 교역자들이기 때문에 특별교역자 또는 안수 교역자라고 부른다.


⑵ 한국교회 교역진단

다음에 이야기할 네가지 패턴들은 과학적인 연구조사에 근거한 것이라기 보다는 경험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현장 조사를 통하여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양극성들이 한국교회 교역현장에 깊이 베어 있다고 생각한다.


1) 율법적 교역과 복음적 교역

율법적이라 함은 인간 개체의 특수성을 고려하기 보다는 경전화되어 있는, 또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도덕적 기준이나 신조, 교리에 근거해서 인간 개체를 보는 태도이며, 따라서 율법적 교역은 교역대상이 되는 개개인의 특수한 필요, 욕망, 문제등 그의 주관적 경험과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법과 질서와 올바른 도리와 신앙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고 인간 개인을 그러한 기준에 맞추어 나가는 교역을 말한다.

반면에 복음적이라 함은 인간이 모든 범죄와 약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찾아와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교역에 근거한 말이며, 따라서 복음적 교역이라 함은 인간 개개인의 필요, 욕망, 문제등 그의 주관적 경험과 상황에 주요 관심을 두고 행하는 교역을 말한다. 그가 어떠한 신앙, 사상, 감정, 행위를 갖고 있느냐 하는 것 때문에 교역자는 영향을 받지 않으며, 하나님의 아가페를 자신의 교역 속에서 육화시켜 교역대상이 되어 있는 개인, 즉, 필요와 욕망과 문제를 안고 있는 자들의 전인적인 인간회복을 위해 힘쓰는 교역을 말한다(Brister, 1976, 36-40)


2) 분리주의적 교역과 통합적 교역

이 구분은 교역자가 인간과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른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주의자들이나 오늘날의 오순절 운동에 참여한 어떤 그리스도인들처럼 세속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들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을 그어 놓고 세속적, 물질적, 자연적인 것들 위에 성스러운 것, 영적인 것, 초자연적인 것을 세우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에 근거해서 수행하는 교역을 분리주의적 교역이라고 부르겠다.

반면 구약성경의 계속적인 하나님의 창조개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시고 법과 계명을 제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계속적인 창조를 통하여 끊임없이 피조된 세상을 돌보고 지탱하고 섭리하시면서 세상을 보존하고 계시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계속적인 창조사역을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서 세상에 속한 물질적이요 자연적인 것을 볼 수 있다. 동시에 바로 그 속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숨결을 찾을 수 있다고 성경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구약성경이 가르쳐 주는대로 한다면, 이 세상은 동시에 물질적이요 영적이어서 이것들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을 그을 수 없다. 이러한 통합적인 관점에 근거하여서 수행하는 교역을 통합적 교역이라고 부르겠다.

따라서 통합적 교역은 현대과학이나 철학에서 초자연과 자연을 구별지어 말하는 것에 구애받음이 없이 모든 존재와 사건과 사역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를 식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최종적인 목표를 갖고 교역한다. 즉 이것은 자연과 초자연,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 세속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 등을 이중 구조로 보지 않고 하나의 구조를 보는 두개의 다른 관점이라는 전제하에서 교역하는 것이다.


3)부분적 교역과 전인적 교역

예수님께서 무엇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으며 무엇을 위해 교역을 하셨는가의 질문에 여러가지고 대답할 수 있겠으나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려 오셨다고 하는 대답은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히브리적 인간 개념으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한다고 하며, 히브리인들은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구분된 두개의 요소로 보지 않고, 육체와 영혼의 양면성을 가진 통합된 통일체로 보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이라 할 때에 전인적인 인간 전체를 지칭하되 특히 영혼의 측면에 강조점을 갖고 말하는 것이다. 히브리인에게는 육체가 매우 중요하여 최종적인 인간 구원은 육체의 부활(고전 15장 참조)에서 완성된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을 구원한다는 말을 헬라적인 개념에서 이해한다면 전혀 그 양상이 달라진다. 헬라사상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중 육체는 열등하고 멸망에 종속하는 것으로 영혼의 감옥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헬라적인 인간이해는 이원론적이요 부분적이다. 그러므로 헬라철학의 개념으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한다면, 전인적인 구원이 아니라 육체를 무시하고 영혼(인간의 일부분)만을 구원한다는 말이 되며 이러한 관점에 서서 교역한다면 인간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보고 교역할 수 없다. 이러한 교역에서는 영혼 구원에 필요한 신앙, 죄, 용서등의 문제만을 심각하게 다룰 것이며, 구체적인 인간의 실존문제인 육체, 가정, 정신, 사회적인 문제들은 소홀하게 다루게 되어 부분적인 교역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적 인간관은 인간 자체가 관심의 초점이므로, 그의 육체, 정신, 사회, 영혼등의 모든 문제들을 구별하지 않고 어느 부분에서 문제를 갖고 있든지 그 문제해결을 통하여 전인적인 회복과 성장을 목표로 하는 전인적인 교역을 하게할 것이다.


4) 지도자 중심교역과 교회중심교역

하나님께서 각 교회에 양들을 치고 감독할 교역자들과 지도자들을 세우신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세움을 받은 지도자들의 교역에서의 위치와 역할을 이야기 한다면 매우 다양한 대답이 나올 것이다. 카톨릭(Catholic)교회는 성례중에 서품(Ordination)의 성례를 따로 시행하기 때문에 특별히 거행되는 서품의 성례를 통하여 안수받은 지도자로 성별되면 그는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에 성직을 맡은 특별한 지도자가 되며 그가 행하는 모든 교역은 성역이 되고 성직자를 중심한 교역 패턴이 생겨냐게 된다.

반면에 개신교(Protestant Churches)는 성례를 오직 세례와 성만찬으로 제한시키고 안수식(Ordination)을 성례에서 제외시키는 한편, 만인 사제직(The Priesthood of All-believers)을 주장하기 때문에 안수식을 통해 구별된 지도자라 할지라도, 그 직의 질(quality)에서의 구별이 아니라 오직 특수한 기능을 담당하게하는 기능에서의 구별에 불과한다. 제 4차 세계기독교협의회 신앙과 직제위원회에서 발표한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에게 가입되며(incorporation aspect), 동시에 그리스도의 교역을 공유하여 그리스도로부터의 근본적인 사명을 부여받는다(ordination aspect). 그래서 모든 세례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교역에 참여하는 교역자들이요, 이것을 수행할 책임을 지게 된다. 이러한 신앙에 근거한 교역은 교회중심 또는 평신도 중심교역이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지도자 중심교역은 지도자를 돕기 위하여 교인들을 훈련하고 지도하나, 교회중심 교역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각자 맡은 바의 사명을 감당하여 수행할 수 있도록 교역자가 교인들을 도와주는 기능을 맡는다. 이제까지 한국교회는 목사중심의 교역을 수행하여 왔으며, 목사나 특별한 지도자 그룹이 중심이 되어 교회의 교역을 주도해 왔다. 그래서 지도자들의 계획을 온 교회가 수행하는 교역이 되었다. 그러나 미래의 한국교회는 교회의 지도자들은 전 교인들이 하나님께 받아가진 목적을 파악하고, 그들 각자의 재능과 은사를 발견하고 개발하여 교인들 각자가 하나님께 받은 목적을 성취시킬 수 있게 돕는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교인들을 훈련시켜 목사와 지도자들의 목회계획을 돕는자로 세웠으나 앞으로는 목사와 지도자들이 교인각자를 도와 그들이 하나님께 받아 가진 목적을 수행할 수 있는 하나님의 교역자(일반교역자)로 훈련하고 지도하는 교역을 해야 할 것이다.


모든 교역자가 행하는 교역들을 위와 같은 교역의 패턴에 기준하여 평가한다면 우리는 양극단 사이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다양한 한국교회의 교역전체를 하나의 틀에 담아서 양극단 사이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가를 진단하는 것은 현실을 너무 단순화시키는 것이요 환원주의(reductionism)의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이나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교역을 진단하는 것은 우리의 교역이 전체적으로 어느 방향으로 기울어졌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한마디로 한국교회의 교역은 복음적 교역보다는 율법주의적 교역 쪽으로, 통합적 교역보다는 분리주의적 교역으로, 전인적 교역보다는 부분적교역으로, 그리고 교회중심교역보다는 지도자 중심교역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지 한 쪽 극단을 택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은사의 이해와 활용으로 양극화된 한국교회의 교역을 균형있는 교역으로 새로운 중심을 잡을 수 있다고 믿는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은사와 교역의 관계

신약에 나타난 은사의 개념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구약성경에 나타난 은혜의 선물의 개념과 교역의 상호관계를 논하는 첫째 이유는 신약성경 저자들이 물려받은 가장 중요한 유산이 구약성경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에 의하여 시작된 새 시대를 해석하고 그 의미를 부여하는데에 구약성경은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신약성경의 주요개념인 자비, 사랑, 심판, 죄, 은혜, 계약, 그리고 메시야 사상 등도 구약에 그 기원을 갖고 있다. 두 번째로 신약성경 저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새로움’에 관심을 집중시켰기 때문에 구약에 계시된 것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반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구약성경 전체에 나타난 성령에 관한 교리를 모두 취급하려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에 관련된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을 하나님의 교역의 입장에서 고찰하려는 것이다. 환언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고 돌보시는 교역이 필요할 때에 은혜의 선물을 인간에게 주셔서 그 일을 수행시킨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밝히고자 한다.


1) 창조적 성령(The Creative Spirit)과 보편적 은사

구약성경의 성령을 의미하는 단어 ruach는 “숨”이라는 뜻과 “바람”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ruach가 전자의 의미(Breath)로 사용될 때에는 가끔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목숨의 개념과 관련을 가지며 이 때에 성령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 생명을 부여하는 본질(life-giving principle)을 의미한다. 숨을 쉬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ruach가 “바람”의 의미로 해석될 때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의 개념이 지배적인 데에 반하여 숨(breath)으로서의 ruach는 생명부여의 힘이라는 신비적 개념과 연관된다(Eichrodt, 1967, 46-47). 생명을 주는 숨(breath)은 하나님의 호흡(the breath of God)과 직접적으로 관계된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호흡에 의하여 부여된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이 구절은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진 육체와 하나님의 생기인 영혼의 이원론적 구조를 증거하는 성서적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본문은 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을 부여하는 호흡(breath)에 의한 창조적인 개입으로 어떻게 생령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데에 그 목적이 있다(Eichrodt, 1967, 47). 하나님의 성령을 통한 생명부여의 능력은 비단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대소의 모든 생물들과 창조된 우주 전체속에 침투된다(시편 104:25, 27-30). 사실 어떠한 피조물도 하나님의 졔속적인 창조를 통하여 생명과 그 존재를 부여 받지 못한다면 그 존재와 생명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그 존재와 생명을 부여 받고 있는 것이다(창2:7, 시104편, 욥34:14-15등).

시편 139:7-12은 지탱하며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단절되어 버리면 어떠한 자연적인 과정이나 모습도 존재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시편 8편은 피조물 위에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인식하며 모든 자연계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있다. 즉 구약성경의 기자들은 자연계 속에서 그곳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므로써 자연계에 영적 차원을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상의 모든 존재와 생명은 하나님께 존재와 생명을 은혜의 선물로 받고 있으며,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영적인 존재라고 구약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요약하면, 모든 인간은 이미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고 있으므로 인간은 누구나 보편적인 은사를 받고 있다. 즉, 모든 존재가 성령을 통한 재창조의 선물로 말미암아 존재를 부여 받고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영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이것은 교역에 중요한 암시점을 제시한다.


2). 이스라엘 민족의 선택과 하나님의 사명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창조와 재창조의 보편적 은사를 소유함과 동시에 그들은 다른 민족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상의 다른 모든 민족들과 구별된 민족이며 특수한 사명과 특권과 책임을 부여 받은 민족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특별한 하나님의 선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민족의 특수 신분을 지니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서의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기 시작한 것은 아브라함에게서 부터이며 그 이후 이 약속과 축복은 반복되면서 이스라엘민족 역사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창세기 12:1-3가지의 축복과 약속은 이스라엘의 독특성과 특수 신분을 부여하지만 동시에 세상을 위한 책임과 사명, 즉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3절)게 해야하는 하나님의 교역(ministry of God)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비록 이 약속은 신약시대에 와서야 성취되기는 했지만 구약의 역사를 통하여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구약성경의 밑바탕을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은 결코 인간의 성취나 어떠한 공적에 근거해서 부여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스라엘이 민족으로 성장하면서 겪는 고난 속에서도 민족의 아이덴티티(indentity)를 지속시켜 준 것 자체가 그 민족위에 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고 있다(Koenig, 1978, 25-29).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과 율법과 예배와 약속과 그리고 조상들과 심지어는 그리스도까지 저희 민족 가운데서 태어나게 하셨으며(롬9:4-5) 이 모든 것들을 Charismata로 분류하므로서(롬12:29) 이스라엘 민족을 『charismatic people』로 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특별한 은혜의 선물은 세상에 대한 책임을 수반하는 것이다(창12:1-3;ㅇ 출19:5-6등). 수난받는 하나님의 종(The Suffering Servant of God)의 사상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개발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말미암아 독특한 신분을 가진 백성이 되었으나 그 특권을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세상 모든 민족을 향한 사명 감당에 사용하지 않고, 교만과 우상숭배 속에서 자신들의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에 이스라엘은 실패와 비운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실패의 경험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특권인 은혜의 선물은 곧 봉사의 선물이며 은사받은 이스라엘은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구원하며 봉사하는 종으로서의 사명을 깨닫게 된 것이다(사 40-60장참조).

요약하면, 하나님의 은사들을 지닌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은 그들이 받은 은사들을 가지고 세상 모든 민족들을 구원하며 봉사하도록 소명을 동시에 받았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신앙과 비젼은 곧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서 온전한 성취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사42:1-7, 53:1-12등).


3)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종들(The Charismatic Spirit and Servnats of God)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다른 민족들과 구별된 민족으로 특권과 사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선택된 백성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계몽하고 지도할 목적으로 특정한 개인들에게 성령의 선물을 주어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다른 개인들과 구별시키셨다. 그 사명과 임무에 따라서 잠시 동안만 성령이 그 위에 머물러 있기도 했고 장기간 역사하기도 했다. 구약시대의 개인에게 임재하시는 성령의 선물은 조건적인 것과 무조건적인 것의 두자기 범주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다.

조건적 은사들

삼손은 나실인으로 남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은사가 그 위에 머물렀으며, 사울에게 임하신 성령은 그가 순종하지 않았을 때에 그를 떠났다(삿13:5; 16:20; 16:28; 삼상 15:35; 16:14). 사무엘의 탄생은 그의 어머니 한나의 간구로 태어났으나, 한나가 그를 나실인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위해 바치기로 서약한 후에 태어났다(삼상1:5-17). 솔로몬은 말할 수 없이 큰 복을 받았으나 그 이유는 솔로몬이 하나님이 주신 기회에 자신을 위한 선물을 구하지않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평하게다스리기 위한 지혜를 구했기 때문이다(왕상3:4-15).

조건적 은사의 개념은 특히 신명기적 법전(삼상12:13-15; 왕상9:1-9; 신명기 28장등)에 잘 나타났으며,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교역(ministry)하는데에 사용되는 동안 하나님의 종들 위에 머물렀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은 그은사를 받은 자를 특별히 구별하여 그의 신분과 특권을 확인해 주지만 그것이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과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교역을 대신 수행하기 위하여 부여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명을 수행하고 있을 동안에만 주어졌다. 조건적 은사의 개념은 은사의 참 목적과 그 사용의 책임과 사명을 명시함과 동시에 모든 교역(ministry)의 근원이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상으로 발전되었다.


무조건적 은사들

욥기서는 『어째서 의인들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의 질문을 제기하면서, 신명기적 전통 내지는 조건적 은사 부여의 개념에 근본적인 도전을 하고 있다. 사실 구약의 족장들을 볼 때에 그들이 무엇 때문에, 무슨 조건에 근거하여서, 하나님께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다만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나단은 다윗에게 “네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존되고 네 위가 영원하리라”(삼하7:15-16)고 약속했는데 그 후 다윗이 중대한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은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고 영원한 메시야 왕국의 기대와 함께 살아 남는다(사11:1-3등).

이러한 흐름은 이스라엘 전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의 신앙으로 발전했으며,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기에 근거하여 하나님에 의해 이룩될 새로운 언약사상과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였다(렘31:33이하). 에스겔 선지자는 소수에게만 부어주던 하나님의 성령을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부어줌으로써 새로운 시대는 성령으로 충만한 시대가 될 것을 내다 보았다(겔36-37장). 요엘은 말세에, 메시야에 의하여 열려질 새시대에 모든 사람에게, 부어줄 성령과 하나님의 교역이 선물로 성령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하여 성취될 것을 예언했으며,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도래한 시대가 바로 요엘이 예언한 말세임을 선포하고 있다(행2:14-21; 요엘2:28-32).

이상에서 언급한 구약성경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의 개념을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구약성경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성령의 교역을 통한 재창조의 역사로 존재하며 따라서 세상의 모든 존제속에서 성령의 임재를 발견할 수 있다는데에서 모든존재는 영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② 보편적 은사를 받은 모든 인간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여 은사의 백성(charimatic people)으로 삼으시고 그 중에서 다시 은사받은 종들(the charismatic servants)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교역(ministry) 을 대신 수행케하였으며, ③메시야가 오셔서 열어줄 새시대에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어 모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교역을 대신하여 수행케 하실 것이다.


은혜 공동체․ 초대교회

신약성경은 예수의 교역(ministry)을 통해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고 느끼며 확신하는 자들이 기록했다(koenig, 48). 그들은 현재 차고 넘치는 풍성함의 시대에살고 있으며, 예수님의 재림으로 장차 상상을 초월한 풍성함을 받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초대교회신자들과 신약성경 기자들이 풍성한 삶을 선물로 받았다고 확신하고있었다는 사실은 신약성경에 기술된 단어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말씀 가운데 선물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헬라어로는 doma, dosis, dorea, dorema, doron, charis, charisma 등이며, ‘즐거워한다’는 단어 ‘chairo’, ‘감사’를 의미하는 ‘eucharistia’, ‘eucharisteo’등이 있으며, 선물의 동사형인 ‘didomi’는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을 주어로 100회 이상 나온다. 이러한 사실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성삼위 하나님께 계속적으로 선물을 받으며 살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들은 성도들과 만나는 기쁨, 주님을 만나는 기쁨등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받아 들였으며,(행16:34, 벧전1:8, 눅24:41, 행2:46등) 음식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로 받아들였고(행27:35),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모든 것은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받으면 거룩하여 진다고 믿어(딤전4:4-5), 피조된 자연계가 영적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것은 얼마동안 잃어버렸던 구약의 신앙을 회복하는 것으로 구약의 기자들과 신약기자들의 세계관의 일치를 고찰할 수 있다. chairo와 eucharistia와 관련해서 언급된 대부분의 은사들은 수평적이요, 대인관계의 charisma였다(구제헌금:고후9:11이하; 복음전파:행11:23;15:3; 빌1:8; 지혜와 능력과 평화; 골3:15-17; 믿음과 사랑:롬1:8; 살전 1:2등 참조).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역(ministry)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롬1:5; 엡2:8; 요1:14-16; 행20:32; 롬3:24; 5:1이하; 고전 15:10; 고후8:9등) 그 은혜가 그들 속에 머물고 있다고 믿는 자들이었으므로(롬8:9이하),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연적이라고 경험하는 것들과 사건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임재와 역사를 식별할 수 있는 독특한 의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즉 그들이 갖고 있는 은혜의 인식이, 과학적인 기준과 철학적인 기준에서 자연적인 것이라고 분류하는 모든 사건들과 교역들과 존재들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임재를 경험하게 했고, 그것들을 영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받아들이게 했다(바울의 사도직:롬1:5; 15:1이하; 고전15:8-11등; 존재자체:고전15:10; 특별한 은사들: 롬12:6이하; 고전 1:4-7; 엡4:7-8; 11-12; 벧전 4:10등; 생명구조:행27:24; 충성스러운 증거:막13:11; 독신:고전7:7; 선행:엡2:8; 고후9:8; 고난:고후12:7; 구제헌금과 감사:롬15:29).

영국의 성령운동의 기수 지(Donald Gee)는 우리가 상상하는 만큼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분별해 내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자연과 초자연의 경계선에 까지 와 있다.”라고 말한다. 지(Gee)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모든 하나님의 은사들 속에서 귀중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지만 동사에 그 모든 은사들 속에서 피할 수 없는 인간적인 요소들도 함께 발견해 낼 수 있으므로 …… 우리는 초자연의 개념을 우리가 보통 자연이라고 부르는 영역에까지 확장하지 않을 수 없다(Gee, 1963, 34).

  

이러한 지(Gee)의 주장은 바울의 사상과 먼 거리에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자연적 은사와 초자연적 은사들을 결코 분류해서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오히려 은사 자체를 구분하지 않고 그 은사들을 체험하는 주체를 두 부류로 분류하고 있다. 즉 “육에 속한 사람” (psychikos)과 “신령한 자”(pneumatikos)가 그것이다(고전2;10-16). 바울에게 있어 psychikos는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할 뿐만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미련하게” 보여 “깨닫지”도 “분별하지”도 못하는 자들이다(고전 2:13-14). 그들은 인간의 지혜에만 의지하여 세상을 보고 이해하며 살아가는 자이다.

반면에 pneumatikos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들을 알고 모든 것을 분별하는 자이다(고전2:12, 15). 그러므로 “신령한 자”는 psychikos가 자연이라고 일축해 버리는 것들 속에서 성령의 임재와 역사들을 분별해 내며, 자연속에 초자연을 보며 초자연속에서 자연을 인식하는 자들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들을 통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다음 몇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①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은혜의 공동체였다. ② 은혜의 공동체인 초대교회는 그들이 체험하고 소유한 은혜의 선물 때문에 세상의 모든 사건들과 교역들과 존재들 속에서도 셩령의 임재와 역사를 체험할 수 있었다. ③ 그러므로 그들은 존재나 교역이나 사건 자체 속에 자연과 초자연, 또는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들을 분류할 수 있는 기준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경험하는 주체인 사람이 성령의 사람이었느냐 육에 속한 사람이었느냐의 구별이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초대교회는 은혜의 공동체요 은혜의 시대에 속한 새로운 존재들이었다.


1) 새시대의 중보자․ 성령

은혜의공동체에 속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새시대 속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 예수님의 교역(ministry)은 새시대의 도래를 예고하는 것이었고 새시대가 도래해 있다고 선포하는 것은 아니었다(막1:14-15; 마12:28; 눅11;20). 그러나 베드로와 사도들은 오순절 성령강림 직후에 이스라엘에게 구약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했고 예수님에 의하여 성취된 새시대가 이미 도래했다고 선포했다(행2:17; 요엘2:28).

사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약속된 새시대의 성취였다. 그것은 요엘의 예언뿐만 아니라, 세례요한의 예고와 예수님 자신의 약속의 성취였다. 베드로는 요엘의 예언을 오순절의 사건과 연결시킴으로써, 오순절 성령강림의 구원사이에서의 위치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구약시대에는 소수의 사명자들에게만 특별히 성령의 선물을 주었으나, 이제 선지자들이 예언한대로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의 선물을”부어 주시므로(행2:38-40)말세가 드디어 도래한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이후에는 성령께서 교회안에 거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종말론적인 공동체요 성령의 선물을 받은 공동체이며 새시대의 선도자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새시대는 성령강림으로 도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새시대에 속한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성령의 선물이 주어질 것이며(행2:38-40), 은혜의 공동체 속에 가입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며(고전 2;2-4), 성숙한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도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하며(요16:8-13), 성령의 내주로 그리스도의 통치 즉 종말론적 공동체가 성취되어 새로운 축복을 받게 될 것을 믿었다(요14;17; 갈4:6; 롬8:9이하). 즉 초대교회는 성령이 강림으로 은혜를 받아 새로운 시대에 속한 공동체임을 확신하고 있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2) 성령과 인간의 영

은혜의 공동체속에 거하시며,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속에 강림하여 거하시는 성령은 요3:7f., 7:38f, 롬5:5등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비인격적인 힘으로 인간의 옛 자아를 대치하여 인간을 지배하는 어떤 것인가? 행2:4; 4:8, 31; 6:3,5; 7:55; 9:17; 11:24등은 그와 같은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몇가지 사실들 가운데서 성령과 신자와의 관계는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에서 유추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관계임을 밝히고자 한다. 즉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나를 따라 오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을 강제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은 아직도 따를 것인지를 스스로 결단해야 하는 관계가 성령과 신자를 사이에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① 엡5:18; 갈2:20; 고전 14:15, 29-33; 살전 5:19등은 성령충만 신자에게 아직도 인격적인 『나』가 남아 있음을 시사한다.

② 롬8:15-16과 갈 5:16-17은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에게 아직도 성령의 소욕을 따를 것인지 육체의 소욕을 따를 것인지를 결정한 『나』가 남아 있음을 가르친다.

③ 갈5:16, 18, 25; 롬8:4,14등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그리스도를 따라 산 제자들의 삶에서 유추적으로 성령과 신자와의 관계를 해석할 수 있는 직접적인 근거들을 제시한다. 그래서 독일의 성령운동의 기수 비틴저(Arnold Bittling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령은 말씀하시며 도우신다. 그는 그리스도인 안에서 일하시되 그분께서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범위 안에서만 일하신다.

성령은 곧 신자로 하여금 죄와 죽음의 세계에서 해방시키시며(롬8:2), 죄와 육체의 공격에서 우리를 구하시며(롬8:3; 갈5:16이하) 믿는자의 영과 함께 계셔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빌2:13)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신다. 요약하면 성령은 인격의 영으로 인간의 영과 상호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봉사의 교역을 감당케 하시는 진리의 영이요 해방과 자유의 영이다(Bittlinger, 1974, 15-16).


3). 성령과 악령

성령의 역사와 성령체험을 무시하거나 중시하지 않은 학자들은 고대 세계의 귀신이나 악령체험과 유사한 엑스타시(Ecstatic Experience)로 성령현상을 일축해 버리고 있다(weiss,1937). 그러므로 초대교회가 성령과 악령을 어떠한 구별로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고찰하고, 그 차이를 분명히 밝힐 수 있어야 오늘날 성령운동이 순수한 성경적인 근거와 전통을 따르고 있는지를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간략한 개요만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려한다.

① 성경에서 기록된 악령들의 역사들을(막5:1-20; 9:13 이하; 고전 12:2-3; 요일 4:1-3_ 분석해 보면 악령들의 역사에 어떠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악령들은 인간을 약탈하려고 수단을 꾸미며, 격력하게 육체적 공격을 가하고, 인간의 감정, 사상, 행위등의 통제를 상실하게 한다. 따라서 악령에 사로 잡힌 자는 자신의 기괴한 행위를 거의 깨닫지 못하고 그의 의식도 침투해 들어온 영들에 의하여 사로 잡히고 만다. 즉 악령들은 사로 잡힌 자의 자아를 상실케 하고 정신과 육체의 과정을 사로 잡아 통제를 잃게 한다. 동시에 그리스도 보다 자기를 더 크게 부각시키게 한다.

② 반면에 성령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케 하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전 12:3; 요14:17장; 요일 4:1절 이하등). 동시에 성령에 사로잡힌 자는 결코자신을 상실하지 않으며, 자신의 행위를 통제할 수있어 헬라의 여러 악령들린 자들과 구별된다(고전 14:27 이하; 14:29f.; 14:32 등을 참조).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이 강림하심을 메시야시대의 도래로 인식했으며, 이제 그들에게 강림하신 성령의 인도를 따를 때에 인간은 자아상실의 상태에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적인 결단을 통해서, 변화를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고후5:17), 그리스도를 증거하며(항1:8),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며(요16:13),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오래참음으로 살아갈 수 있으며(갈5:22-23), 그리스도를 대신한 하나님의 교역(ministry)에 참여하게 되는 주체적 존재임을 신약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즉 신약시대의 성령은 은혜의 선물(행2:38등)로 신자들에게 주셨으며, 우리의 의지의 결단을 통해서 순종하여야 할 분임을 신약성경은 강조하고 있다.

이상에서 고찰한 바에 의하면, 신약의 초대교회는 은혜의 공동체로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은혜는 성령강림으로 시작된 새 시대에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구체화되었으나 성령은 결코 인간을 강제하거나 인간의 자아를 대체하는 악령과 구별되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영으로 인간의 주체적인 결단을 요구하시며, 주체적인 결단에 의하여 예수님을 따르며 그 뜻을 순종하며 이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교역(ministry)을 대신한 교역에 동참케 하시며 그 교역을 수행할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이시라고 결론 지을 수 있다.


성령의 은사를 통한 교역갱신

오순절(Pentecostal)운동과 카리스마 운동(Charismatic Movement)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을 고린도전서 12-14장에 기록된 은사들과 은사에 관한 기록들을 규범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현대과학과 철학의 개념으로 초자연적(Supernatural)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그러한 은사들에만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전체적으로 읽어 나갈 때에 이러한 오순절 운동과 신 오순절 운동(Neo-Pentecostal)에서 가르치는 은사 개념이 제한 되었음을 쉽게 알수 있을 것이다.

로마서 12:6-8에서 보는 은사들은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보는 것과 같은 굉장한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들이 보았을 때에 특별히 성령의 나타나심을 분별할 수 있는 종류의 것들도 아니다.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위하는 일, 구제하는 일 등은 평범한 교역(ministry)에 속하는 것들이지만 바울은 그것들을 은혜를 따라 나누어 주신 은사로서 분류하고 있다.

에베소 4장 7절 이하에서 보면 바울은 Charismata 라는 단어 대신에 domata(선물들)라는 단어로 사용하면서 그리스도의 domata를 언급하고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부여하시는 특별한 domata는 다른데에서 볼 수 있는 사건이나 기능이나 봉사하는 교역 자체를 의미하지 않고 직책을 맡은 자들을 지칭하고 있는데 그 종류들을 보면 사도, 예언자, 전도자, 목사, 그리고 교사 등이다. 이들은 Charisma로서 분류하기 보다는 Charisma를 소지한 사람들을 일컬음이다.

베드로전서 4장 10절 이하에는 두개의 카리스마적인 사역들만 기록하는데 여기에 특기할만한 것은 그리스도인 모두는 각각 Charisma를 받고 있으며, Charisma는 서로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Charisma의 두 타잎(type)을 암시하는데 말하는 Charisma와 봉사하는 Charisma의 분류이다. 이상 네 곳은 교회의 교역과 관련해서 은사의 목록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제시한 은사들은 성령의 그 뜻을 따라 각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하는 은사의 성격을 분명히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교역(ministry)으로서의 존재 의의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몇가지 문제점들도 제기하고 있다. 첫째는 초자연적인 은사들과 자연적인 은사들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즉 인간이 타고난 재능과 성령의 은사로서의 Charisma와 상호연관성이 있는 것인가? 또는 Charisma는 인간의 능력과 전혀 관계없는 성령의 능력에 속하는 것인가? 하는 점을 명백히 규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 은사와 교회 봉사사이에는 어떠한 상호 연관성이 있는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규명하는 것이다. 세째로는 은사만 있고 사명을 분명히 받지 못한 경우와 사명은 받았는데 은사를 받았다고 느끼지 못하는 경우의 문제를 명백히 규명하는 일이다. 본 장은 이러한 문제점들을 규명하면서 은사를 통한 교역갱신의 가능성을 찾으려 한다.


1). 은사와 재능의 관계

바울은 성령개념을 두가지 면에서 이해되고 있다. 성령은 신앙의 사람에게 기적적인 능력을 부여해 주며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을 제시해 준다. 바울의 카리스마에 관한 교리도 성령의 이중교역간의 긴장관계에서 이해된다. 던(James D.G. Dunn)은 성령의 초월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초월적인 타자성은 바울의 카리스마 개념의 핵심이다…… 카리스마는 인간의 능력이나 재능의 행사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향한 무조건적인 의존과 열려짐에 의하여 특정지을 수 있다(Dunn, 1975, 255-256).



카리스마의 이러한 초월적 성격은 카리스마들이 얼마나 초자연적(Supernatural)인가하는 질문을 제기한다. 20세기 카리스마 운동은 극적인 성격을 갖는 예언, 병고침, 그리고 방언등의 은사들을 크게 강조한다. 그 결과로 이 운동에 참여하지 아니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연적인 성령의 은사들과 사이에 분명한 한계선을 긋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하게 된다.

적어도 카리스마 운동에 참여한 두 사람의 신학자들은 신약성경의 증거들을 조심스럽게 조사한 후 이러한 구별이 성서적으로 합당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앞에 언급한 바 있는 영국의 성령운동의 기수 도날드․지는 성령의 은사들은 자연적인 인간의 재능과 선택에 초자연적인 어떤 것이 첨가된 것이라고 한다(Gee, 1963, 1,10). 지에 따르면, 진정한 성령의 은사와 증거는 그리스도인 회중들의 모임에서 성령의 임재하심을 분명히 나타내 보여 주느냐 여부에 따른다(고전 12:7). 그러므로 은사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오든지 봉사와 가르침과 같이 자연적인 것이든 상관이 없다. 결정적인 시금석은 은사가 나타남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게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느냐이다(고전14:20). 지는 인간의 의지에 의하여 시작된 어떠한 활동들이나 순전히 인간의 타고난 재능을 훈련함으로 얻으지는 일들 가운데서도 성령의 임재를 체험케 한다면 그것들도 성령의 은사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Ibid. 18,24,29).이렇게 카리스마를 이해할 때에 자연과 초자연의 구별이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지가 지적하듯이 여기에서 “진정한 초자연의 개념이 크게 확장”될 수 있다.

이러한 지의 카리스마 개념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바울의 Pneumatikos개념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즉 어떠한 존재나, 사건이나, 교역자체 속에 초자연적인 것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Pneumatikos는 모든 것 속에서 성령의 임재를 발견하기 때문에 성령의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은사로 받을 수가 있으며 롬 8:32은 모든 것이 은사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독일의 성령운동의 기수인 비틴저(Arnold Bittlinger)도 자연과 초자연을 구분한다는 것에는 큰 문제가 있음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결론 짓기를 단순히 바울은 이 양자를 결코 구분하지 않았었다고 주장한다. 비틴저에 따르면 “나의 자연적인 재능들이 성령에 의하여 본래의 능력을 회복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며 교회의 유익을 가져오게 될 때 타고난 재능들은 성령의 은사로” 바꾸어 진다(Bittlinger, 70이하). 그러므로 비틴저에게 있어서는 고전 12:31에 암시하는 더욱 큰 은사들이나 세속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인간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며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성령의 은사로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인 의사의 모든 활동은 병고치는 은사라고 부를 수 있다. 처방과 접종과 안수기도는 비록 그 형태는 다를 지라도, 그것이 기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 가운데 수행된다면 성령의 은사”로 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Ibid., 72). 즉 자연과 초자연의 구별은 거의 사라지고 오직 그가 어떠한 신앙 가운데서 사명을 수행하는가가 중요한 은사의 판단 기준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 타고날 때부터 받아가진 재능과 성령의 능력인 성령의 은사가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재능은 인간의 능력이요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재능이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인 은사로 바꾸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로마서 12장을 중심으로 인간의 재능을 어떻게 하나님의 은사화하여 하나님의 교역에 사용할 수 있는가를 보고자 한다.

① 인간이 어떠한 재능을 가지고 있든지, 그것이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간에 그 재능을 하나님의 제단에 거룩한 산제물로 드려 헌신할 때에 성령의 은사로 변화될 수 있다(롬12:1).

② 인간의 재능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거룩하신 뜻을 따라 사용할 때 그 재능은 은사로 변화된다. 나의 재능이지만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용할 때 그 재능은 성령의 은사가 된다(롬12:2).

③ 우리의 재능을 사용할 때에는 언제든지 자기의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사용해야 한다. 재능은 믿음으로 사용할 때에만 성령의 은사화 될 수 있으므로 우리의 믿음의 분량만큼 나의 재능도 은사화 될 수 있는 것이다(롬12:3).

④ 우리의 재능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재능을 몸 안에서, 몸의 능력으로, 몸을 위해, 몸이 원하는 곳에 사용될 때 성령의 은사가 되는 것이다.(롬12:4-5, 고전 12:7, 14:26).

⑤ 우리의 재능은 사랑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심지어 하나님의 은사들이라도 사랑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유익이 없다. 우리의 재능이 사랑으로 사용될 때에 그 재능은 은사화 될 것이다(롬12:9-10, 고전 13장).

⑥ 우리의 재능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능력안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나의 능력을 따라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즉 성령에게 붙들리어 사용될 때 그 재능은 은사화된다(벧전 4:10-11).

⑦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 재능이 사용될 때 그 재능은 은사가 된다.


목회자는 교인들이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발견하여 훈련할 뿐 아니라 재능들을 은사화시켜 전 교인들을 하나님의 교역자화시켜 하나님의 교회와 세상을 위해 봉사하게 해야 한다.


2) 은사의 개체성과 사용의 공동체성

바울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우주적이요 일반적인 의미의 은사들에 관해 가르치면서 동시에 성령께서 어떤 은사들을 어떤 개인에게 계속해서 오랫동안 부여해주심으로써 그 개인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그 특별한 은사와 관련하여 그 개인의 동일성을 인식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바울은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다르니(hekastos idion echai charisma)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 하니라”(고전 7:7)라고 고린도교회에 선언한다. 틀림없이 고린도교회 안에서 여러가지 다른 은사들을 지속적으로 소유한 신자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4-26에서 자신의 은사를 다른 성도의 은사보다 우월하다거나 열등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권고하고 있다.

고린도교회나(고전 12장 -14장) 로마교회(롬12:6-8)의 교인들은 모일 때 어떤 신도는 예언할 것을 기대했을 것이고 다른 이는 가르칠 것을, 다른 이는 방언을 말할 것을, 또 다른 이는 구제할 것등을 기대했을 것이다. 즉 개인들에게 은사를 부여할 때에 모종의 지속성과 규칙성이 있어 그 신자가 기독교인으로서의 독특한 신분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John H. Schütz, 1975, 46).

바울은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 12:11)고 말할 때에 성령은 개개인에게 오셔서 『내가 네게 부여해 주는 그 은사를 사용하여 나는 너를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구별하여 나의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너를 따로 세우노라』(행13;1-3참조)고 말씀하시는 분으로 가르쳐 준다. 특별한 목적으로 특별한 은사를 부여 받은 개개인은 자신들이 독특한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세우심을 받았다고 확신하며 놀라운 해방감을 얻게 된다. 이 때에 그가 받은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획속에서 그 은사를 받은 사람은 특별하고도 본질적인 역활을 담당하게 되며 다른 어떤 사람과도 구별되는 일을 수행할 사명과 책임을 부여 받는다. 은사를 통한 개체화 과정에서 각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독특성을 있는 그대로 사용 하시고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며 하나님께 받으실만하고 사용될만한 그릇이 되기 위하여 타고난 자신의 특성을 고쳐야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8-10에서 자신의 존재의 독특성은 곧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밝히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주권적인 자유속에서 바울을 선택하시며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서 그를 개체화시키고 있음을 경험한다. 교회는 결코 자신들을 핍박하던 자를 선택하여 이방인을 위한 최고의 사도로 세우실 수 없을 것이나 우리 하나님은 그 일을 행하셨다. 바울은 이 체험 속에서 하나님의 은사는 인간의 기대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혜(Charis)의 특별한 표현이요, 은혜의 구체화로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은사는 신자들로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뛰어 넘어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부여해 주신 독특한 은혜의 선물임을 인식하게 하지만 그 때문에 결코 자신을 신앙 공동체에서 분리시켜 교만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교회가 경험한 위험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각 사람에게 성령이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for the common good)”(고전 11:7)고 고린도교회에 선언하고 있다. 즉 은사는 개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독특한 신분으로 개체화 시켜주지만 동시에 개체화시키시는 이유는 이웃에게 봉사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준비시켜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슈츠(John H. Schurz)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은사는 자아(ego)를 준비하고 제한시킨다. 만약 몸안에서 각지체의 공헌이 가치 있다고 인정받으며 영광을 받는다고하면 그 이유는 그들이 성령을 선물로 받고 있으므로 그들이 소유한 은사 가운데에 성령의 임재하심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은사의 개체화는 결코 그 개인에게 개인주의적인 주장을 하도록 허용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은사의 개체화를 강조하면서 바울은 자아의 상실을 방지하고 있으며, …… 개체는 몸 전체 안에서만 그 존재의 의의를 가지며 전체라는 전제하에서만 오직 개체화하는 가능하다.(Schutz, 1974, 60).


위의 인용구 중에서 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지칭하는 말이다. 개인에게 주신 은사들의 다양성을 기술하고 있는 은사목록이 있는 곳이면 곧 바로 바울은 신앙공동체가 어떠함을 기술하므로써 은사의 다양성과 신앙공동체를 연결시키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개인에게 은사를 그 뜻대로 나누어 주어서 그 개인을 개체화시킨 같은 성령께서 개체화된 그리스도인 지체들을 공동체에 속하게 하여 그의 더욱 큰 목적을 수행하시고 있다(고전 12:12-13).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공동체인 교회 밖에서는 결코 은사를 이야기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영광과 교회의 덕을 세우려는 성령의 근본 목적을 떠난 어떠한 은사도 그것은 성령의  은사라고 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감히 결론 지을 수 있을 것이다.


3). 은사와 교역의 상호관계

이제 우리는 또 하나의 질문을 고찰해야 할 차례이다. 『은사는 받았다고 확신하는데 교역이 명백하지 못하고, 반대로 교역은 받았는데 은사를 받았다고 느끼지 못하는 경우에 우리에게 어떠한 해결책이 있을까?』

죤 쾌니그(John Koenig)는 다음의 도표를 제시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시도하고 있다. 신자들은 점선을 따라 어느 한 지점에 서있다. 어떤 이는 은사의 화살과 가까이 있어 은사를 받았다고 확신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체험을 깊이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교역(ministry of God)에서 먼 거리에 있으므로 분명한 사명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 다른 이는 사명과 교역의 화살 가까이 서 있어 사명을 느끼며 자신이 수행해야 할 교역의 종류도 분명히 받았다고 느끼지만 은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은사로 무장시켜 주신다는 확신이 없으므로 교역의 무거운 짐을 지고서 비틀 거린다. 또 다른 이들은 교역에서도 멀고 은사에서도 먼 점선의 중간 지점에 서 있으므로 분명한 은사의 체험도, 교역과 사명의 부여도 확신이 없는 상태에 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러한 순간에도 가는 화살표의 방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하느님과 사이에 교제는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John Koenig, op dit., p.147


                                          나                   


                                    ⃒  ⃒  ⃒  ⃒

                          하        ⃒  ⃒  ⃒  ⃒        님

                                    ↓  ↓  ↓  ↓

                                      ↑  ↑  ↑   

                          은  사      ⃒  ⃒  ⃒      사명과 교역

                                    


그러므로, 은사의 화살은 사명과 교역을 향해 있어서 은사를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사명과 교역을 발견하여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책임을 감당할 때에만 평안을 얻게 하며, 사명과 교역의 화살은 은사를 향해 있어서 사명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와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말씀과 기도 나누는 가운데서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는 은사의 체험을 하므로써 성령의 능력으로 교역하도록 밀어냄을 받는다. 즉 은사를 향한 교역의 움직임과 교역을 항한 은사의 움직임에서만이 온전한 신앙공동체의 사명은 감당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성서적인 은사의 재이해를 통하여 첫째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수직적으로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공동체를 향한 수평적인 교역에서만 의의가 있음을 확신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모든 수평적인 봉사와 교역은 수직적으로 베푸시는 성령의 선물이 없이는 결코 그리스도의 영광과 공동체의 덕을 세울 수 없음을 인식하여 인간의 지혜와 경험으로 교역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할 것이다. 세째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성령의 선물을 받고 있는 자들이며 모두 Pneumatikos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의 선물을 반드시 교역이라는 교회 공동체의 장에서 구체화 시켜야 하며 이 때에 비로서 전 교인은 하나님의 사명자로서 온 교회가 교역에 동참하여 각 지체의 사명과 교역을 감당케 될 것이다. 이 때에라야 한국교회의 교역은 온전한 모습으로 갱신될 것이라고 믿는다.




                               영성과 목회



  헨리 나우엔(Henri J. M. Nouwen)은 영성과 교역을 간명하게 구별지으면서 이 양자의 상호 연계성을 밝히고 있다:


교역은 주님의 이름으로 봉사하는 것이다. 교역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의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갇힌 자에게 자유를, 소경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것이요, 주님의 은혜의 해를 널리 전파하는 것이다(눅4:18). 영성은 우리 안에 게신 성령께 관심을 집중시키며,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다. 영성은 우리를 광야 사막과 산 위로 보내어 기도하게 하는 것이요,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열고 주님 앞에서는 것이요,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의 놀라우신 아름다움을 마음으로 명상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영성과 교역을 분리시키고, 기도에서 봉사를 분리시키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 그러나 기도와 봉사는 결코 분리시킬 수 없다. 영성과 교역은 중국의 음양설의 음과 양과 같이 서로 연결된 하나의 양면이라고 할 것이다(Nouwen,1977).


  영성과 교역은 본래 하나이다. 영성이 따로 있고 교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만나 그분의 말씀을 받은 자들(영성의 사람)은 자연적으로 그 말씀을 순종하며 하나님이 명하시는 사명의 수행을 위해(교역) 세상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세상으로 나가 사람들을 섬기는 이 과정은 하나의 연속과정이요 어느 지점까지를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나머지 지점을 교역이라는 이름으로 구분하기가 어렵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는 것에 강조점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영성이라고 부르고,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강조점을 둘 때에 우리는 그것을 교역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영성과 교역은 함께 이야기해야 하며 이 양자를 분리시키는 것은 실천적으로 오래 위에 집을 세우는 어리석음일 뿐이다. 영성과 목회가 어떻게 하나 안에서 둘이 되고 둘이 하나로 통합되는가를 보기로 하자.

  헨리 나우엔의 이러한 간명한 정의는 교역과 영성이 본래부터 분리된 두개의 영역으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이 양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하나의 삶의 양면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마태복음 9장 35-36절은 예수님의 삶의 양면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35절 말씀 “예수님께서는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3년간 공생애의 교역(ministry)전반을 요약하고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전에 먼저 찾아가시며, 그들을 교육시키며, 그들에게 천국복음을 선포하시며, 모든 약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을 고쳐 건강하게 만드셨다.

  오늘날에 와서 수많은 교역의 분화가 일어났지만 근본적으로 교역의 근본 모델은 바로 위의 구절에 요약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교역은 어디에서 동기가 부여되고 있는가? 피곤과 고용과 심지어 죽음의 고난을 무릅쓰고서라도 모든 성과 촌에 두루다시니면서 교역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났는가? 마태복음 9장 36절은 이것을 언급하고 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이 말씀의 핵심은 예수님의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이다. 예수님은 고난당하는 사람들 -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보시고 그들의 아픈 마음에 공감하고 있으며, 그들을 돌보아 주고자 하는 관심으로 가득차 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저 고난당하는 양무리로 가득하여 그는 그들을 돌보기 위하여 스스로 고난의 자리에 서신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아가페라는 용어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마태복음 9:35-36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예수님의 교역(35절)과 예수님의 아가페(36절)는 바로 예수님의 삶의 양면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교역은 그의 아가페에서 동기를 부여 받고 있으며, 예수님의 아가페는 교역을 통하여 표현되고 있다.

  마태복음 9장 36절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가 하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으며, 35절은 예수님이 어떠한 일을 하셨는가를 가르쳐 준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떠한 사람이 되어 있느냐(아가페의 사람)가 예수님이 어떠한 일을 하였는가(예수님의 교역)을 결정하고 있다는 말이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하나의 삶이 영성과 교역이라는 두 가지 차원의 삶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가와 그분이 어떠한 일을 하고 있는가(Christian ministry)의 근본적인 관계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오늘 우리시대의 교역자들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무엇을 하시고 싶어하는가」에 너무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에는 지나치게 소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떠한 사람이 되어 있는가?」(기독교 영성)와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기독교 교역)는 하나의 삶의 양면이다. 기독교 교역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하나님의 종이 되어 있어야 한다. 환언하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 되었을 때에 그는 하나님의 일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아가페를 가지고 교역 현장에서 하나님의 교역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기독교 영성과 기독교 교역을 교역자의 하나의 삶의 양면을 의미하며, 이 중 어느 한면의 약화는 다른 한면의 약화를 가져오며, 동시에 어느 다른면의 강화는 전체 삶의 강화를 도모할 수 있다.


  영 ․영성 ․교역의 상호관계

 기독교 영성이란 말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에 관심을 갖는다. 이것은 기독교 교역(Christian ministry) 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이냐?」에 초점을 맞추는 것에 대조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교역이 우리의 「할인」에 관심을 둔다면 영성은 우리의 「사람됨」에 관심을 갖는다. 교역이 봉사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에 영성은 하나님과의 사귐(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이처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영성과 교역의 관계성을 바로 인식하기 위하여 먼저 영과 영성과 교역의 근본성격을 먼저 고찰하고저 한다.


  1) 영(Spirit)


히브리 - 헬라의 영 개념

  영을 지칭하는 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의 루아흐와 헬라어의 프뉴마는 다 같이 호흡과 바람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 단어가 지칭하는 개념에서 보면 히브리어의 루아흐와 헬라어의 프뉴마는 상당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히브리 인간론에서 루아흐는 사람에게 생기와 활기를 불어 넣는 힘이다. 루아흐가 그 사람에게서 나가면 그 사람에게서 생명이 떠나 버린다. 이런 점에서 히브리 인간관은 오늘의 과학적인 인간관과는 다르다. 성경의 창조 기사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코에 숨을 불어 넣자 사람이 생령(生靈)이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불어 놓은 루아흐에 의해서 생명을 가진 인간이 되었다. 창세기 1:2에서 하나님의 루아흐는 공허와 혼돈과 흑암의 수면에 운행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구절 속에서 우리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과 단절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초월하신 창조주와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창조주에게 응답할 수 있으며, 창조주의 사람에 참여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히브리 인간관에서 영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시사하고 있는 인간 생명이중대한 차원을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헬라어의 프뉴마는 바람과 호흡과 에너지를 의미하는 다이내믹한 실재이지만, 육체에 대응하는 실재로서 영을 이야기하고 있다. 헬라어의 프뉴마는 신플라톤주의를 따르는 영지주의자들에게서 완전히 그 개념이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신플라톤주의에 따르면 영은 영원하며, 이상적이며, 참 실재의 영역과 동일시 하게 되었다. 이에 대조해서 육체는 부패하고 썩어질 물질적인 것으로 이해되어 영과 육체의 이원론이 정립되었다. 그러나 헬라어의 퓨뉴마의 개념에서도 인간의 영은 초월적인 실재와 접촉할 수 있으며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히브리어의 루아흐와 헬라어의 프뉴마는 같을 뜻을 가지고 있으나 그 개념상에서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영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초월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초월을 경험하며, 초월의 삶에 참여할 수 있는 인간의 생명의 차원을 대변하고 있다는데서 히브리어의 루아흐와 헬라어의 프뉴마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히브리-헬라의 영의 개념은 인간은 단독자로서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인간은 자기의 몸과 정신을 개발하여 완벽한 인간이 된다고 할지라도 인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신과의 관계가 단절된다고 하면 참 인간이 될 수 없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고, 따라서 초월하신 신과의 관계안에서만 진정한 인간의 가치와 의미와 방향을 발견할 수 있다. 히브리-헬라의 영 개념은 바로 이것을 암시하고 있다.


 ⑵ 현대의 세가지 영개념

  오늘날 초월을 인정하지 않는 과학적인 인간관에 따르면 영은 단순히 수평적인 가치에 응답하는 인간의 능력으로 해석되고 있다. 신의 부름에 응답하고, 아름다움에 감격하며 미를 창조하며, 대적자들을 견디어내며, 자유로운 선택을 행사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들을 영의 개념 속에 포괄하고 있다. 예컨대 자아 심리학(ego psychology)에서는 강력한 집중력을 갖고 있어서 삶의 상황 가운데서 부딪쳐 오는 여러가지 경험들을 통합하여자기를 확고하게 정립해 나가는 자아를 지칭해서 영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영은 좀 더 강하고 좀 더 높은 어떤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능력을 말한다(Erikson 1963:23-25, Sutich, 1969).

  그러나 이와 같은 과학적이요 수평적인 영의 개념은 오늘에 와서 점점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으며, 히브리-헬라적인 개념에 가까운 영의 개념이 개발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영은 탄생, 죽음, 고난, 기쁨, 아름다움, 자연, 비극등의 인간경험에 응답하고 성찰하면서 그곳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는 인간의 피조성을 초월하는 힘과 의미에 참여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또는 기능이다. 즉 영은 초월적인 의미에 응답하는 인간의 능력이다. 영적인 성장이니, 은혜로 양육한다는 말은 곧 초월하신 하나님에게 응답하는 능력을 강화시키고, 깊게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초월을 깨닫고, 이해하며, 초월의 삶에 점점 깊이 참여하는 삶의 곧 영적 성숙의 과정이라고 할 것이다(Thayer, 1985;46-49).

  세 번째 영의 개념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갈망하는 인간의 속성을 지칭한다. 어거스틴은 “오 하나님,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하여 나를 만드셨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신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는 우리의 심령은 안식을 얻을 수 없나이다”라고 기도하고 있다. 이러한 갈망은 바로 인간이 자신보다 더 큰 힘과 의미의 근원(초월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삶에 참여하고자 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의 표현이다. 인간의 종교역사는 인간이 존재할 때부터 이러한 갈망이 인간의 근본적인 속성 가운데 하나였다고 예증하고 있다.초기에 있어서 이것은 의미와 힘을 제공하는 초월적인 실재에 참여하려는 욕구로 표현되었으나 차츰 초월적인 실재와 관계를 연합하려는 갈망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은 궁극적인 실재와 하나로 연합을 경험하고저 추구하는 인간의 속성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May, 1982, Ware, 1971:33, Jung, 1939:4).

  위에서 우리는 히브리- 헬라적인 영의 개념과 오늘 우리시대의 세가지 영의 개념을 일별하였다. 그 가운데 과학적인 세계관에서 근거한 영의 개념 하나를 제외하고는 한가지 점에서 공통된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곧 인간의 영이 자기를 초월하는 실재와의 관계를 추구하는 인간 존재의 차원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자기를 초월하는 인간의 능력이요, 초월적인 실재를 경험하는 인간의 기능이요, 초월적인 존재의 참여하며 관계를 맺으며, 드디어 초월자와의 연합(union)을 경험하고저 하는 갈망을 생산하는 인간의 중심이다. 디모데 웨어(Tismothy Ware)는 이러한 영의 개념을 종합하면서 “영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인간 속에 심어 놓은 것으로, 이 영이 있으므로 이간은 하나님의 성령을 알 수 있게 된다”고 했다(Ware, 1971:21).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적인 영의 개념을 한마디로 요약하며, 초월하신 하나님의 성령을 갈망하며, 경험하며 관계를 맺어 하나님의 삶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인간의 생명의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영성(Spirituality)

  영성(Spirituality)의 정의는 매우 다양하여 어느 하나를 대표적인 정의로 내세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영성의 정의를 가장 포괄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어반 홈즈(Urban T. Holmes)의 저서 Spirituality and Ministry 일 것이다. 그는 다섯 가지 요소로 된 영성의 정의를 소개하고 있다. ① 영성은 인간의 관계의 능력이다. ② 그 관계는 그 감각의 현상세계를 초월하는 실재와의 관계이다. ③ 초월적인 존재의 경험자는 주체적인 노력에 관계없이 관계를 통해서 의식의 확장 또는 고양을 얻게 될 것이다. ④ 이 관계는 역사적인 환경에서 그 본질을 제공받게 될 것이다. ⑤ 이 관계는 이 세상에서 창조적인 행동으로 구체적으로 표현될 것이다. 홈즈의 정의는 「초월적인 실재와 인간의 관계성을 강조하고 있다. 홈즈는 인간에게는 초월적인 실재와 관계를 맺으려는 본성적 욕구가 있으며, 이 욕구가 이 세상의 감각적 실재속으로 침투해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성령과 만나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때에 진정한 영적 성숙이 일어난다고 강조한다(Holmes, ibid, 11-19). 홈즈가 영성의 관계성을 강조한 반면에 노만 샤유척(Norman Shawchuck)은 이 관계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영성의 정의를 삼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① 기독교 영성은 주 예수님과의 관계의 삶이다. ② 이 관계는 그리스도인의 체험적인 실재이다. ③ 이 관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요 대가로 주는 보상이 아니다(Shawchuck, 1983:1-2). 샤유척은 이 삼요소의 핵심을 “선물로 받은 관계”(gifted relationship)에 두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분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묻기 전에 우리에게 찾아와서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해 줄까?” 를 물으시는 분이시다. 실재로 인간이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살기를 원하지만 인간은 어떻게 그 관계를 발견하고 그 관계속으로 들어갈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 분이 우리에게 먼저 찾아와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고, 우리를 새사람으로 고치신다.그러므로 영성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요, 하나님이 사랑 가운데서 이니시어티브를 가지고 인간을 찾아와서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다.

  이러한 샤유척의 영성의 정의는 홈즈의 정의와 상호보완작용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홈즈는 초월적인 실재와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적 욕구를 영성의 출발점으로 삼고, 이러한 본성적 욕구가 초월적 실재와의 관계를 맺으므로 영성이 개발된다는 인간의 측면을 강조했다. 그 반면에 샤유척은 그러한 욕구를 갖고 있으나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관계를 맺어 인간을 새롭게 고쳐 나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홈즈와 샤유척은 반대의 방향에서 영성에 접근하고 있다.그러나 출발점과 강조점은 서로 다른 반면에 그들이 가리키고 있는 영성의 실재는 같은 것이다. 즉 그들은 모두 영성이 「초월적인 실재인 하나님의 성령과의 관계성」이라는 데에 일치하고 있다. 존 유스텐과 웨스터 호프(John Eusden and John Weterhoff)는 영성의 또 다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삶의 핵심에는 물질세계와 비물질세계, 육체와 영혼, 세속과 성스러움등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근본적인 욕구가 있다. 영성은 이러한 통합이 완전하게 성취되어 가는 과정을 이르는 것이다.우리 인간은 육체적인 몸과 지성 이상의 존재이며, 감각적인 경험과 이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물질세계보다 더 큰 세계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만남과 참여의 직접적인 방법으로 초월적인 실재의 차원을 깨달을 수 있다(1982:2).


  유스텐과 웨스터호프는 영성의 개념 가운데서 통합의 과정을 중시하고 있다. 통합(integration)은 인간존재의 현상세계 뿐만 아니라 더 깊은 영적인 차원과 초월적인 실재의 차원까지를 끊임없이 하나로 통합하여 삶의 폭을 넓혀 나가는 과정을 의미하고 있다. 즉 유스텐과 웨스터호프는 초월적인 실재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로 통합하여 보다 폭이 넓고, 보다 건전한 인간의 삶의 질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으로 영성을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홈즈의 정의 ④번과 ⑤ 번 가운데서 이미 언급하고 있는 요소이지만 유스텐과 웨스터호프는 이점을 초점을 맞춰 초월과의 관계가 어떻게 인간을 폭넓게 변화시키는가를 규명하려고 하고있다.

  김경재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 그리스도인의 성화 과정등을 영성과 연관지으면서도 영성의 사회성에 더 큰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의 영성의 정의는 사변적이요, 기독교 영성과 영성의 일반적인 의미를 명백히 구별짓지 못한 감은 없지 않으나 음미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그의 장황한 영성의 의미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영성은 지정의를 통합 총괄하는 인간존재의 본바탕이요, 인간성 안에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며, 마음이 자신의 존재의 근거인 하나님과의 교류․합일․동역을 체험하는 영혼의 핵이요, 영성훈련은 본질적으로 성화의 과정이며, 영성은 인간이 독거하는 독백이 아니라 삶의 현실과 역사현실을 포괄하여야 하며 영성의 사회적 차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김경재, 1985:218)


  김경재는 이 정의에서 영성은 초월자와의 관계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의 삶의 현장소고에서 그 결과가 표현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상에 소개한 영서의 개념들을 기독교 신학의 빛 가운데서 종합한다면, 다음의 몇가지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①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속에 불어 놓어준 인간의 영의 갈망에서 출발한다. ② 하나님께서 성령을 인간의 피조세계 속에 보내어인간을 찾아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키려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속에서만 기독교 영성은 가능하다. ③ 기독교 영성은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만나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다. ④ 인간이 하나님의 성령과 관계를 맺고 교제하며 살 때에 인간은 새로운 의식 의미와 힘을 얻게 된다. ⑤ 그 때에 인간은 하나님의 뜻과 삶을 이 세상 속에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된다.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기독교 영성이, 인간의 영이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교역을 이 땅위에 실천해 나갈 수 있는 중간 개념임을 분명히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영은 「자기를 초월하는 인간의 능력이요, 초월적인 실재를 경험하는 인간의 기능이요, 초월적인 존재에 참여하여,관계를 맺으며, 드디어 초월자와 연합을 경험하고 하는 갈망을 생산하는 인간의 중심」이라고 했다. 이에 반해 하나님의 교역은 구체적이 역사현장에서 하나님의 삶을 구체화 시키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실천해 나가는 그리스도이의 봉사이다. 그런데 영성은 초월을 추구하는 인간의 영이 어떻게 초월하신 하나님의 성령과 만나 그 분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 궁극적인 의미와 힘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삶에 참여할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추구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삶을 이 세상에서 실천하는 교역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영성훈련을 통하여 영성의 깊이에 서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논의의 마지막 종착지인 하나님의 교역에 관해서 고찰해 보기로 하자.


  3) 기독교 교역(Christian Ministry)

  토마스 오덴은 그의 저서 「목회신학」에서 기독교교역의 핵심을 갈파하고 있다:


목사의 모든 다양한 활동은 하나의 중심,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에 집중된다. 목회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라는 하나의 중심을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가르치며 교역의 하나 하나의 기능을 이 중심과 연관시켜 수행하려고 한다. 모든 교역의 핵심은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수행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의 사역이지만, 그 사역은 우리의 언어를 통하여, 우리가 수행하는 일을 통하여, 그리고 은밀하게는 우리의 육체적인 현존(bodily persence)을 통하여 불완전하게나마 구체화된다(Oden, 1987:30).


  여기에서 오덴이 주장하고 있는 기독교 교역의 핵심은 ① 모든 교역활동은 그리스도안에서의 삶에 집중된다. ② 모든 교역활동은 하나 하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라는 구심점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③ 기독교 교역은 그리스도 자신이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④ 그러나 기독교 교역은 그리스도인들의 사역과 언어와 육체적인 현존을 통하여 구체화되어 간다. 토마스 오덴은 이러한 주장을 하면서 목사의 모든 역할, 사명, 의무, 사역은 이러한 구심점에 의하여 일관성 있게 감당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오덴은 다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교역은 반드시 필요한가?」하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만일 하나님이 교회를 세상에 세우기로 작정하시고(타락한 피조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기 위하여)교회를 인도하기 위하여 일정한 수단들을 제공하기로 작정하셨다면, 우리는 교역이 부수적인 필연성을 가졌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대답한다(ibid. 50). 그렇기 때문에 교역은 “하나님이 그 수단들을 제공해 주시는 한도에서만 존재의 의미를 갖게”된다고 강조한다(ibid.51).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을 갖고 교회를 세우셨으며, 교역을 계획하셨고 그 교역을 실천할 수 있게 사람들을 찾아오셔서 교역에 필요한 수단들을 제공하여 그리스도의 교역에 동참하게 하시지만, 인간은 그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고 왜고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창조의 세계를 타락시킨 바 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교역의 근본의미를 망각하고 남용할 가능성이 충분히 남아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서의 삶에 구심점을 둔 그리스도의 교역은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으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성령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기전에는 불가능한 과제라고 할 것이다.

  다니엘 D.윌리암스(Daniel D. Williams)도 이점에서 오덴과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 그는 기독교 교역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교역은 모든 교역자들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담당해야 하는 것으로 인간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관한 지식과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Williams,1961:43). 윌리암스의 교역의 정의 몇가지 근본적인 암시점이 있다. ① 그리스도인들이 교역을 통해 세상에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다. ② 기독교 교역은 인간적인 동기에서 출발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아가페에서 출발해야 한다. ③ 하나님께 먼저 구원을 받고 지속적인 관계속에 사는 자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가 될 수 있다. ④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기 위해서 충분한 교역의 기술의 준비가 필요하다.

  윌리암스는 교역자의 권위를 논하면서, 목회는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 사람들을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역자의 권위는 그가 얼마나 그리스도 자신의 삶에 충실히 따르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Ibid.제2장). 예수님의 삶의 중심이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구원과 치유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것이었다면, 교역자는 구체적인 교역현장에서 예수님의 삶을 재현할 때에 권위를 인정받게 된다. 즉 윌리암스에서 교역자의 권위는 교역자의 그리스도에 대한 충실성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윌리암스의 교역론에서도 분명히 암시되고 있는 점은 교역은 교역자의 그리스도에의 충실성, 즉 교역자와 그리스도의 성령과의 관계의 깊이 즉 영성의 깊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넬슨 타이어는 「영성과 목회」에서 기독교 교역의 연계성을 다른 각도에서 예시하고 있다. 타이어는 종교자체를 “인간을 궁극적인 상황에 연관시키는 일련의 상징적인 형태와 실천”이라는 로버트 벨라의 정의를 수용하면서, 종교를 「우리의 일상적인 감각 세계를 초월하고 지탱하면서 우리의 경험을 통하여 우리의 감각세계 속으로 들어오시는 초월적인 실재에 참여하고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주는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규정한다(Thayer, 1985:61). 환언하면 종교는 초월적인 실재와의 만남과 사귐을 갈망하는 인간의 영을 위하여 초월의 의미를 분명히 밝혀 주고(상징적 표현에 의하여), 초월과 만날 수 있는 수단들을 제공하며, 초월에 참여하고 관계를 맺을 때에 그들의 일상의 삶을 재구성하여 초월과 만남에서 발견한 새로운 의미를 중심하여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지도하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종교전통은 인간 이해에 대한 다음의 세가지 기본적인 가정을 지니고 있다. ① 인간은 본래 궁극적인(초월적인) 실재와 연합하고 있었다(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었다). ② 인간은 궁극적인 (초월적인)실재와 분리되었다. ③ 그러므로 인간은 그 궁극적인(초월적인)실재와 화해를 성취하고 재결합하여 궁극적인 실재의 삶에 참여하려는 강력한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영적인 욕구가 인간의 욕구중에 가장 강한 욕망이다. 종교는 바로 강력한 인간의 영적 욕구에 응답하여 상징구조를 제시하고 초월적인 실재와의 화해와 연합과 참여를 추구하고 있다.

  타이어는 목회의 최우선의 기능은 사람들을 격려하여 성경의 하나님의 성령의 현존을 체험하게 하며, 성령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살게 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기들의 삶을 재구성하여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Ibid.;64).  그는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영성개발과 목회의 중심적 사명과는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교역자가 교회와 교인들을 인도하여 영적인 삶을 발견하고, 영적인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목회의 중심 사명이라고 한다면 교역자 자신이 영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재언의 여지가 없다. 즉 교역자는 끊임없이 자기의 삶을 성찰하면서 인간의 역사속에 침투해 들어와 그리스도인의 고독(solitude)과 공동체(community)와 사회참여(socialaction)속에 현존하시는 성령 앞에 서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 이것이 교역자의 삶의 스타일이 되었을 때에 교역자는 교역의 근본적인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토마스 오덴과 다니엘 테이 윌리암스와 넬슨 타이어의 기독교 교역의 이해를 고찰해 보았다. 오덴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라는 교역의 구심점을 강조하였고, 윌리암스는 「그리스도에의 충실성」이 교역자의 교역의 권위를 대변한다는 점을 보았다. 타이어는 인간의 가장 심원한 영적인 욕구가 초월과의 관계속에 사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교역의 중심은 바로 이러한 영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영성을 개발해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았다. 이 3자의 강조점은 각기 다르다고 할지라도 몇가지 점에서 이들의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①기독교 교역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중심의 삶에 집중되어야 한다. 기독교 교역은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사귐 가운데서 동기와 능력과 의미와 목적을 부여 받는다. 기독교 영성의 깊이에 서 있을 때에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독교 교역은 가능하다.

  이러한 교역에서의 영적지도는 교역과 자신이 영적 깊이에 있는 않으면 불가능하다. 교역자는 끊임없이 자기의 영성을 개발하여 목회현장속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에 민감할 때에라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역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교역자가 자기의 영성을 개발할 것인가? 교역자는 어떻게 교회를 영적으로 지도할 것인가? 이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과 지침들은 오성춘 저「영성과 목회」, 「영성훈련의 실제」, 리차드 포스터의 「영적성장을 위한 제자 훈련」, 「단순훈련」, 「기도훈련」등을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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