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의 마음가짐|말씀………추수감사설교
봉서방 | 조회 160 |추천 0 |2015.11.15. 13:24 http://cafe.daum.net/cgsbong/6sJW/188 


추수감사절설교

 

추수감사절의 마음가짐

 

추수감사절설교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17:12-16)

 

일년 중 가장 축복되고 즐겁고 고마워야 할 추수감사절입니다만 감사절이 오는 때는 겨울 준비에 우리들의 고민이 하나 더 늘어가는 시기와 맞물려 감사와 감격이 없이 맞아질 뿐 아니라 오히려 부담스러운 연례 행사가 되어 버리는 서글픈 감이 듭니다.

금년은 더더욱 제 2IMF가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 속에서 맞이하는 감사절을 과연 어떻게 지키는 것이 좋을까 생각해 봅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이 행하신 역사와 그 은혜를 감사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가르치는 감사는 하나님을 알고 기념하며 기뻐하며 찬양하며 고백하는 감사입니다.

이제 추수감사절의 정신과 감사하는 생활의 비결을 성경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그리고 교회의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구원의 은혜 가운데 베푸신 하나님의 축복

추수감사절에 관한 것으로 구약 성경에 나타난 가장 오래된 기록을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기를 그 토지 소산의 만물을 거두어들인 후 처음 익은 열매를 광주리에 담아 그것을 여호와의 성소로 가지고 가서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렇게 아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여 필경은 거기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더니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중역을 시킴으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26:5-9).

이 고백적인 감사 노래의 도식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는 조상이 겪은

역경과 여호와께 부르짖음, 그리고 구원과 가나안 땅으로 정착하도록 인도하심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기업으로 주신 땅에 들어가서 그 땅에서 얻은 열매로 추수감사절을 노래하면서도 추수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고 여호와의 구원의 행동을 기념하는 고백을 하였을까요. 이는 시편 13610-25절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추수감사절에 추수한 기쁨에 도취되어 감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구원 역사를 기념하고 자신의 비천함을 고백하는 감사절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였을 때 추수 시기를 따라 지킨 추수감사절의 이름은 추수와 관계가 없는 유월절, 무교절, 장막절, 혹은 초막절로 불려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며 보호해 주신 행사를 기념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추수감사절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추수 감사 축제를 즐기고 기뻐하는 것과 전혀 다른 성격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을 기념하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 전체의 표현이었습니다.

최근의 감사절은 영국에서 1621년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 신대륙에 상륙하여 많은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농사를 지어 처음 익은 열매들을 제단에 놓고 눈물의 감사를 드린 것이 그 효시가 된 것입니다.

 

2. 고난과 죽음을 넘어선 마음의 감사

추운 초겨울 12월에 플리머스 항구에 102명이 상륙하였으나 추위와 굶주림과 병으로 인하여 절반 이상이 생명을 잃어 버리고, 그 이듬해 봄에 원주민 추장에게 감자와 옥수수 종자를 얻어 희망의 씨앗을 뿌렸으나 그들은 또다시 절망에 빠지게 되었답니다. 그것은 물이 가장 필요한 때에 3개월 동안 가뭄이 들어 수확할 수 없는 폐농 직전에 놓이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으로 성별한 기도의 날을 정하고 금식 기도를 선포하고 열심히 기도했답니다.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사 갈멜산에서 엘리야에게 나타나던 기적이 그들에게서도 나타나서 가물었던 땅에 10일간 비가 내려 위기에서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답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있어서 감사하는 마음은 고난과 죽음을 넘어선 [생명적인 감사]였습니다.

청교도는 본래 영국 국교인 성공회의 형식적이고도 관료적인 신앙에 항거하여 보다더 생명적이고 내면적인 경건한 신앙생활을 살기 위한 무리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12년 동안 본국에서 박해에 견디다 못해 암흑의 대륙이라고 불리던 아메리카 신대륙에 생명을 걸고 죽기를 각오하며 대서양을 건넜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신앙을 지키기 위한 신앙 제일주의가 그들의 생활 모습이었습니다.

16211111일에 체결된 메이플라워 계약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멘할지어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신앙의 증진을 위하여 항해를 계속하였노라] 고 선언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정든 고향과 친척들을 버리고 신대륙에 와서 죽음과 투쟁하며 결실을 얻었으므로 실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냉정히 따지고 보면 그들에게는 감사해야 할 일들보다는 슬퍼해야 할 일이 많고 고마워하기보다는 원망해야 할 일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슬픔보다는 기쁨을, 원망보다는 고마움을 신앙의 정신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던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감사하는 신앙의 정신인 것이며 이러한 정신이 우리들에게 되살아나야 할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감사절은 진정 기쁘고 감사하여 지키는 정신적이고 신앙적인 절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사 헌금은 우리 신앙의 내면적인 은혜를 물질로써 바치는 것이기에 몸과 마음과 정성을 함께 바쳐야 하며, 과부의 엽전 두 개와 같은 헌금이어야 할 것입니다.

더 나가서는 함께 깨끗해진 열 명의 나환자 중 한 명처럼 예수님에게 돌아와서 감사한 것을 본받아 진정한 감사를 드려야겠습니다.

우리에게 감사할 조건이 없음이 아니라 감사할 마음이 없음이 곧 타락이요, 병입니다.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이주한 것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하러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잘 섬기려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제일 먼저 교회당 건축하고, 다음에 학교 건축하고 물질 이전에 정신적인 내면적인 감사절을 지켰습니다.

특별히 일년에 한번씩 한 주일을 정해 감사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은 우리 교회에 주신 은혜, 하나님께서 내 개인과 가정에 주신 은혜를 감사 드립시다.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부족합니다. 우리는 평소의 생활이 감사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 서신을 읽어보면 문안 후에 감사하라 권면이 어떻게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뤼라], [범사에 감사하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의 생활을 보면 그 생활 자체가 감사의 생활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감격으로 사무쳤고 그의 하루 생활은,

아니 일생의 생활은 은혜를 감사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어떻게 바울이

이러한 감사를 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모든 것이 다 평안하고 환경이 좋으면 누가 감사하지 않겠는가?]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좋은 환경이나 평안한 생활로 인해서 감사하는 생활을 한 것이 아닙니다.

 

3. 가난했던 지난날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하반부를 읽어보면 바울의 일생을 간단히 기록한 몇 마디 내용이 있습니다.

몇 번이나 매를 맞고 몇 번이나 감옥에 갔고 몇 번이나 파선을 당하고, 에베소, 고린도, 로마에 가서도 대부분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의 생활은 핍박과 환난과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 언뜻 생각할 때 몸이 건강하거나 가정이 화평하면 감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경우는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몸의 건강이나 가정의 평안에서 온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는 독신생활을 하였으며 쉴 만한 집도 없이 살아온 사람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을 하셨는데 바울 사도는 일생토록 나그네로서 복음을 전파하고 사는 삶 속에서 평안이 없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감사하는 생각과 생활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것은 그 깊은 심령 속에서 우러나왔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써 죄에서 구속함을 받은 것을 심령속 깊이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마귀와 사탄에게서 해방을 받은 것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항상 같이하신다는 것을 믿을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4:13)는 신앙이 있으면 우리도 순경이나 역경이나 초막이나 궁궐이나 언제든지 감사로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닌 줄 압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생활을 하게 되니 자연히 그의 생활은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선 마음속에 성령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6:22). 바울이 가는 곳마다 죽은 생명을 구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도 주를 위해서 무슨 열매든지 맺는 사람일수록 감사하는 마음이 더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한 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파할 수 있으면 열매 맺는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이 더 많습니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9:15). 우리 매일 매일의 생활과 일생의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과 역경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을 기념하며 기뻐하고 감사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같이 우리도 과거 가난하던 때를 기억하며 가진 것이 많은 것을 감사합시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에 더욱 감사가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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