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울신학의 전제

 

 

바울서신은 바울의 사고와 가르침이 뿌리 내리고 있는 전제와 전승을 인식하게 해 준다. 그것은 이미 발전된, 교회의 신앙 양식과 양식문이며, 그리고 집중적인 구약성서의 해석이다.

 

 

1. 교회의 선포 양식과 공식문

 

양식사 및 전승사적인 석의는 모든 신약성서에서 발견되는, 이미 형성된 본문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런 본문들은 교회의 전승에서 벌써 만들어졌다. 바울서신도 바울 이전에 이미 있었고 바울이 계속 전하는 그런 양식문들을 알게 해 준다. 그때 바울은 가끔 필요에 따라 그 공식문들을 강조하거나 해석하였으며 보충하기도 하였다. 바울 자신도 그가 전해 받은 것을 전해 준다고 말한다(고전 11:23; 15:3). "전해 받다"(paralambavnw) "전해 주다"(paradivdwmi)라는 용어는 랍비학파에서 사용되던 말이다(족장들의 어록 1:1, "모세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으며 그것을 여호수아에게 전해 주었고, 여호수아는 장로들에게, 장로들은 선지자들에게 그리고 선지자들은 큰 회당의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다."). 여기서 전승의 원리는 이렇게 세워져 있는데, 그 전승 원리는 기독교 교회와 신학에서 큰 의미를 가졌다. 바울의 신앙 선포는 가끔, 오늘날의 설교가 교회의 신앙 교리를 해석하는 것처럼, 정말 전승의 해석이었다. 바울이 적절하게 말할 수 있었던 바 교회는 확정된 "교훈의 본을 전해 받았다"( 6:17).

 

오늘날까지 교회 안에서 고백되는 것처럼 사도들의 신앙고백을 롬 1:3f(다윗의 혈통에서 나시고 능력으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나 고전 15:1-7(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셨다)에서 들을 수 있다. 4:25; 8:34; 10:9; 14:9; 살전 4:14; 5:9f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하심에 대한 공식(公式)적인 진술로 나타난다. 예배에서 고전 12:3; 16:22; 2:11처럼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는 공식문이 큰 소리로 고백되었다.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롬 3:30; 3:20; 살전 1:9f; 고후 13:13; 1:3; 3:5에 표현되어 있다. 바울은 고전 15:12-52; 고후 5:1-10; 살전 4:13-15에서 전해 받은 묵시적인 모티브와 그림들을 배열하였다. 이스라엘이 영광송(Doxologie)을 사용했던 것처럼, 이제는 기독교적으로 채택된 영광송에서 하나님이 찬양되었다( 1:25; 9:5; 11:36; 16:27[후기 바울적]; 고후 1:3; 11:31; 13:13; 1:5; 1:3; 요계 4:8. 11). 교회에 대한 축복 말씀(Segensspruche)은 고후 13:13; 6:16-18; 4:23에서 발견된다. 원시교회의 예배에서 유래된 노래들은 고전 11:26; 2:6-11; 1:3; 5:14; 1:15-20; 3:16; 딤전 3:16; 벧전 1:18-21; 2:21-25; 3:18-20; 요계 5:9f. 13; 7:10-12; 11:15-18; 15:3f; 21:3f에 나타나 있다. 교회는 회당으로부터 유래된 단어나 환호성을 전해 받았는데, '아멘'은 롬 1:25(과 다른 곳)과 고전 14:16에서, '할렐루야'는 계 19:1. 3. 6에서, '마라나타'는 고전 16:22; 요계 22:20에 나타난다. 전승에 따라 교회의 성례전이 행해졌는데 세례는 롬 6:3-6; 고전 6:11에서, 성찬은 고전 10:16; 11:23-25( 14:22-24와 평행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를 순서대로 나열하는 진술인 롬 8:35f; 고전 4:9-13; 고후 4:7-10; 6:3-10; 11:23-31에서 힘 있게 또 깊이 있게 표현한다. 사람들은 그런 문장들을 아마도 모든 고통 가운데 무욕(無慾)과 변함 없는 기분을 선서하는 스토아 철인들과 비교한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의 덕행은 바울의 경우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권고적인 본문들도 바울 이전에 형성되어 있었다. 그때 신약성서는 구약·유대적인 격언 지혜와 관련되어 있으며, 또한 - 헬라적인 회당을 거쳐 또는 직접적으로 - 헬라의 대중 철학과도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바울은 덕 및 악덕 목록도 사용한다. 덕·악덕 목록 이외 가훈표(Haustafeln)도 사용한다.

 

 

2. 구약성서

 

바울이 받은 전승에 구약도 포함되는데, 바울은 그것을 현재의 메시아적인 구원 행위에 근거해서 해석한다. 바울 이전에 있었던 것은 단지 이 구약성서 뿐만이 아니라 구약성서를 역사와 교훈을 위한 출처자료로 보는 강력한 유대적인 노력도 있었다. 바울의 성서신학은 종종 구약성서에 대한 논의에서 이스라엘과의 대결이거나 구약성서의 도움과 함께 한다.

 

예수와 사도 당시 유대적인 가르침과 경건이 얼마나 구약성서에 뿌리를 두고 있었는가를 쿰란 공동체가 분명하게 증거해 준다. 쿰란 공동체의 지체들은 율법을 읽기 위해서 밤 시간의 3분의 1을 깨어 있어야 했다(1QS 6:6f). 쿰란 문헌 중에 많은 구약성서 본문 시가선(詩歌選)과 거기서 만들어진 많은 주석들이 있는데, 여기서 구약 본문 등이 신중하고도 확실하게 현재와 미래에 관련되었다.

 

바울은 교회로부터 구약성서도 전해 받았다. 비평적인 석의가 교회의 성서신학이 예수로 하여금 많은 성서 인용을 말하게 하는 것을 드물지 않게 고려하지만, 복음서들은 예수 자신이 얼마나 성서에 의해 살았던가에 대한 증거이다. 그런 성서 인용은 교회를 스스로 이스라엘과 대립되게 하였고 거기서 교회는 독자적으로 세워지게 되었다. 복음서들은 간혹 구약의 본문으로 기록되었는데, 그 본문의 일부는 명시적으로 기록되었으나, 일부는 금방 알아 차릴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15:23-26의 수난사가 그러하다). 원시교회가 올바르게 말한 것처럼 "그들은 이것이 그러한가하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17:11).

 

분량이 많은 바울의 서신(, 고전·후, )에서 구약 본문이 상세하게 인증된다. 데살로니가전서와 빌립보서에서 구약성서(와 유대전승)은 어떻든 반영되어 있다. 짤막한 빌레몬서에서는 그 흔적을 인식할 수 없다. 바울 서신은 대부분 이방기독교 공동체를 향해 설정되어있다. 바울은 그 교회들이 구약성서와 거의 무관하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이 보인다.

 

바울은 구약성경을 다소에 있는 부모의 집에서 알게 되었다. 그후 그는 구약성경의 읽기와 해석을 랍비학교에서 배우고 연습했다. 여기서 학생들은, 기교 있게 수집된 인용이 롬 3:10-18; 9:25-33; 11:8-10; 15:9-12에 있는 것처럼, 인용 구절을 수집하는 것을 배웠다. 사상은, 10:8-21에서처럼, 한걸음 한걸음 연쇄적인 문장 순서에서 계속된다. 랍비의 성서해석 원칙이 인식될 수있다.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을 향해 추론함"(a minori ad maius)이 그러하다. 3:15-17에서 사람의 약속을 폐기할 수 없음으로부터 바울은 예수의 약속이 변할 수 없음을 추론해 낸다. 유비(Analogie)의 법칙이 필요한데, 그에 의하면 동일한 단어들과 용어들이 한 단위로 해석되어야 하나, 이전 것이 표준적인 것으로 결정된다( 3:17). 무할례자로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의 약속을 받았으며( 15:6); 그 이후에 비로소 할례가 언급된다( 17:10f). 그러니까 바울은 할례가 의롭다함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 4:1-13).

 

바울은 알레고리적인 해석도 사용하는데, 본문에 따라 그 자구와 다른 것을 암시할 수 있었다(a!llo ajgoreuvei). 이 방법으로써 알렉산드리아의 Philo는 그리스 철학을 끌어들여 구약성서를 폭넓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알레고리적인 해석 방법(Alleorese)은 일반적으로, 오래된 신화를 그 이후의 순화된 신인식에 동화시키기 위해, 고대의 해석에 의해 행해졌다. 바울은 사라와 하갈 이야기( 16; 17; 21)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알레고리(ajllhgorouvmena)"로 묘사한다( 4:22-31). 그때 바울은 하갈을 시내산과 이스라엘의 종 노릇으로 해석하는 한편, 사라를 위에 있는 예루살렘과 교회의 자유함으로 해석한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신 25:4의 계명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그는 이 본문을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지급받는 선교사들의 권리로 해석한다(사실은 창조주 하나님은 전체 피조물을 돌보시는 것처럼 동물도 돌보신다). 알레고리의 한 종류로 어떤 것에서 다른 것에 대한 한 유형(Typos)을 인식하는 유형론(Typologie)이 있다. 그래서 옛 언약 안에 지금 성취된 구원 시대가 서술되어 있다. "이런 일들은 우리를 위한 유형(tuvpoi)으로 일어났다(고전 10:6)" 교부들의 성서 해석에서 알레고리와 유형론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이스라엘을 통한 일반적인 성서 해석을 따르기도 한다. 바울은 그때 구약을 메시아적인 구원 시대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한다. 구약성서는 "말세를 만난 우리를 위한 경계"(고전 10:11)가 되었다. 항상 바울은 이러한 종말론적이고 메시아적인 현재와 지금에 관해 말한다( 3:21; 5:9; 7:6; 11:30).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그래서 전체적으로 또 세부적으로 구약성서는 성취되어야 한다( 1:2; 3:8).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를 위한 거울(tuvpo")"(고전 10:6)이다. 그리스도는 이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계셨다(고전 10:4). 세례와 성찬의 성례전은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이미 형성되어 있어다(고전 10:1-4).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 받은 자의 본이다( 4:1-25; 3:6-14). 성서 안에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열방을 부르심이 이미 전제되어 있다( 9-11). 그리스도의 부활과 올리우심은 성경 말씀의 성취이다(고전 15:3-28). 옛 언약 안에 훨씬 더 영광스런 새 언약이 예시되어 있다(고후 3:4-18). 구약성서의 경향과 의미는 전체적으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1:17), 인간의 행위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의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 오늘의 이해를 따르면 바울이 행한 구약성서의 해석이 세부적으로 의문스럽게 느껴질지 모르나 본질적으로 구약을 신약에 부속시키는 것(Hinordnung)이 유효하게 되었다.

 

 

바울신학

 

서 론

 

Michael Grant "바울이 몰고온 대지진과 같은 영적인 혁명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1 세기 이후의 기독교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의 신학사상은 여타의 다른 신학사상에 비하여 매우 심원하며 원술한 것으로서 이를 바르게 이해하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Paper는 부족하게나마 Paul의 신학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고 설명하여 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도입부인 서론에서는 본 Paper Paul의 생애와 그의 신학 형성에 영향을 끼친 사건 및 배경에 관하여 서술하고 그의 신학의 핵심을 조직신학적인 범주에서 논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러한 까닭들이 오늘날의 기독교 교리의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현대적 의미로서의 바울신학의 이해에서는 시공의 변이 즉 상황의 변화에 따른 재해석의 요청으로서의 관점들 - 예를 들어 종교사학파의 시가, 쉬바이쳐를 중심한 종말론적 시각등의 바울신학의 변천사.

바울신학의 사회학적이해, 또한 근자에 이르러 주요 issue가 되고 있는 바울의 여성관에 대하여 현대적인 시각에서 취급하고 있다.

 

1. 바울의 생애

 

A. 바울의 출생과 성장

바울은 세례요한, 예수와 동시대에 태어났으며 그가 태어난 세계는 급속한 변화와 확장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실재적으로 바울의 출생은 사도행전 21 39절과 22 3절에 나타나는 누가의 보도를 통해 보면 길리기아 지방의 수도인 다소에서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사도행전 22 3절의 보도를 볼 것 같으면 율법교사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을 엄하게 교육받았다고 되어있다. 이것이 진정한 것인지는 아직 해결된 바가 없지만 예루살렘과 연관시키려는 누가의 의도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누가는 바울의 어린 시절부터 예루살렘과 관계를 갖게 함으로써 예루살렘측과 바울측의 화해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도록 시도하고 있다.

결국 확실하게 바울의 배경을 알 수 있는 것은 바울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다. 빌립보 3 5절에서 6절에 바울은 자신의 정체를 세밀히 밝히고 있다. 바울은 자신을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족속이며 베냐민의 지파이고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며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자" 라고 소개하고 있다.

 

B. 다메섹에서의 소명

바울이 새로운 소명에 눈을 뜨게 되는 계기를 다메섹 사건이라 부르고 있다. 연대적으로는 약 32년경에 이루어진 일로 볼 수 있다.

사도행전은 바울의 다메섹 사건을 상당히 드라마적으로 서술하고 있고 누가는 바울의 소명보다는 기적적인 사건만을 강조하고 있다.

다메섹에서 바울은 주의 현현을 경험하고 보지 못하게 되어 제자 아나니아에 의해 치료를 받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제자들과 사귀게 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소명을 받게 된다. 이것은 누가의 신학적 의도를 감안하여 읽어야 한다. 누가는 바울의 소명을 예루살렘과 연결시킴으로써 예루살렘교회와 바울 교회와의 견해차를 해소해 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사도행전적인 바울의 묘사는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것과는 상충된다. 갈라디아서 1 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다메섹사건을 해석하면서 그 사건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속에 나타내신 " 사건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다메섹 사건을 소명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와 바울은 자신의 복음과 사도권은 하나님으로 부터 직접 소명으로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진술을 토대로 볼 때 다메섹 사건을 회심이라기 보다는 소명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세계선교에 나서게 된 것은 복음에 대한 소명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C. 예루살렘 회의

초대 기독교 역사에서 예루살렘회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루살렘회의에 대한 기독은 사도행전 15 1 - 29절과 갈라디아서 2 1 - 10절에 나오는데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그의 변증의 목적에 맞게 그 사건을 해석하였으며 사도행전은 누가의 신학적의도에 따라서 바울의 보고와는 상당한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예루살렘 회의가 개최된 시기는 대체적으로 주후 48년경으로 보고 있다. 그 회의가 있게 된 주된 이슈는 할례와 토라에 관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슈에 대한 입장은 대개 세가지로 분류될 수 있었다.

그 첫째는 바울의 반대파로 대표되는 보수적 유대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들은 이방인도 할례와 토라의 범주안에 들어와야 된다는 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경계선을 구태여 그을 필요가 없다고 보는 파들이었다.

둘째로는 예루살렘 지도부인데 그들은 게바로 대표되는데 실제적으로 야고보가 실세를 장악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들은 바울교회에서 문제들은 일으킨 흔적들이 보인다. 그러면서 바울보다는 보수파에 상당히 기울었다.

세번째 그룹은 바울과 바나바이다. 이들은 형식적으로는 안디옥교회의 대표로서 파견되었지만 실상 이방인 선교의 실권을 쥐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들은 결코 할례와 토라를 이방인에게 지울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고 전략적으로 첼라인 디도를 데리고 들어가서 그를 할례받지 않게 함으로 공인을 얻으려고 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보도하는 바에 다르면 이 회의에서 보수파는 대패했고 예루살렘축과 바울축이 손을 잡게 되었다.

 

D. 바울의 선교여행

바울은 자신의 서신서에서는 구체적인 선교 일정에 대해서 밝히지 않고 있다. 단지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여정을 복원할 수 있을 따름이다.

1 차 시기에는 약 47년경으로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동역을 하게 된다. 1 차 전도여행에서는 요한 마가의 선교여행에 동참하여 그의 거취가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문제를 유발시킨다.

여러 이유 때문에도 2차 여행( 49)부터는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게 된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를 향하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향하게 된다. 갈라디아서에서는 바울이 의도적으로 헬라인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 일행은 우회하여 드로아에 내려가게 되는데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게 된다. 마게도냐의 첫관문인 빌립보에 이르러 유럽의 첫교회를 개척하는 사역을 이룩한다. 3차 여행( 52년경)은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갈라디아와 브루리가 지역을 순방하며 교회를 굳게 하고 에베소에 들러서는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치면서 2년 동안을 목회를 한다.

이 기간은 연대적으로 52년 부터 55년까지로 볼 수 있다. 드로아를 거쳐, 앗소, 미둘레네, 기오, 사모, 밀레도를 경유하여 고스, 로도, 바다라를 거쳐 두로에 상류한다. 돌레마이를 거쳐 가이샤라를 경유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거기서 체포된다. 이 때가 약 56년 봄 쯤으로 추측된다.

 

 

2. 바울 신학의 배경.

 

바울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바울의 사상을 형성시킨 영향들을 역사적인 맥락에서 분석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역사적인 이 과제는 바울이 세 세계 - 유다, 헬라, 기독교 - 에 걸쳐 산 사람이기 때문에 다소 어렵지만, 그 배경에 대해 알아보는 일은 바울이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줄잘점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복합적인 배경들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A. 유대적 배경

그는 비록 헬라도시인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지만, 유대가정에서 엄격한 유대적 관습에 따라 성장하였으며, 자신의 유대적인 유산에 대해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 22: 3) 고향 다소는 소아시아의 헬라 세계와도 연결되었고 셈종족의 수리아와도 연결되는 길리기아 평원의 교통이 빈번한 중심지로, 교부 히에로니므스에 의하면 바울의 부모는 갈릴리 기샬라 (Gischala)에 살다가 정복당한 후 이주했다고 한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3:5)이라는 사도 바울 자신의 고백은 그의 가족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바울은 이방사람에게 편지할 때에 유대의 조상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말하였고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등등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동족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는 말씀 ( 9:3)을 통해 불타는 동족애와 자신이 유대사람이라는 자각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바울이 구약을 읽을때도 "기록되였는데..." 의 관용구를 사용하며 유대 랍비들의 성서해석법을 따라 비유법을 사용한 것 등은 바울의 해석법이 얼마나 유대 교사 랍비를 닮고 잇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B. 이방적 배경 ( 헬라적 배경 )

바울은 유대사람이면서도 태어난 곳이 헬라문화권이었으며 어린 시절 헬라 - 로마의 환경이 제기하는 일체의 다양성에 노출되어 자극을 받았다. 그래서 헬라세계에 대해서도 익숙하였고, 교회를 희랍 - 로마 세계전역에 확장시키는 일이나 복음을 헬레니즘 문화와 양립할 수 있는 형대로 해석하는 데서 그의 사명을 발견하였다.

그는 헬라어에 능통하였으며 그의 문학적 은유법들은 지방의 배경보다도 도시생활을 반영한다. 바울의 사상에는 분명히 헬라적인 환경에서만 얻을 수 있는 요소들이 존재한다.

사도 바울의 헬라적 배경에 대해 학문적인 입장에서 이를 주장하고 있는 사람은 녹스 ( W.L.Knox) 이다.

헬라어를 사용하는 하나의 문화권으로 세계를 통일하려는 알렉산더의 대업이 로마에 의해 이러나가자 세계를 향한 유대인의 진출은 훨씬 용이해졌고 대도시에는 유대인의 거리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유대인의 행동반경이 점차 예루살렘에서 멀어지자 신앙의 중심이 흩어져 있는 회당으로 옮겨졌고 종교의 지도자도 토라의 교사로 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디아스포라의 사정이 사도 바울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이 흩어진 회당들이 바울로 하여금 세계선교의 근거지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또 하나의 영향은 스토아주의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의 교향 다소는 이 스토아 사상의 중심지였으며 그 당시 대단한 위력을 떨친 스토아 사상은 도덕에 대한 성실이나 인도주의적인 도량으로하여 철학전문가 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침투하였다.

스토아의 교사들이 상당히 대중과 감정이 밀착된, 소위 독설적인 설교형은 바울의 고전적 설교인 로마서 2 - 3장에서 동일한 유형으로 나타나며, 7 - 11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배반'에 관한 내용에도 잘 나타난다.

그러나 스토아사상은 내재론적으로 밖에서는 신을 설명할 수 없는 범신사상이었고, 자기의 힘만을 信賴하라고 비극적인 결의를 일러주고 있으나 바울은 이를 극복하여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자이며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로 오셨으며,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기독교적 승리를 확신한다.

또 한가지는 바울과 신비종교의 관계이다. 다이스만은 바울의 유대주의적인 유산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기독교신앙의 핵심을 헬라으 신비주의와 관련시켜서 해석하였다. 당시의 많은 개종자들이 신비종교를 경험했으며, 이를 기독교내로 들여오기도 했으며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다" ( 고전 7:22 ) 는 바울의 발처럼 신비종교의 경험 역시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그러나 바울의 일관된 윤리와 믿음을 볼때에 헬라사회의 신비종교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C. 구약 성서적 배경

바울의 사상적 배경으로 또하나의 중요한 것은 구약성서이다. 바울 당시에는 보편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고정된 70인역의 텍스트가 없었으며 70인역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것이 사상 배경의 헬라적 요소를 입증한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구약을 사용한 것은 배경에 있어 유대적 본질을 제시하여 준다.

구약에 대한 사도 바울의 주석의 실체를 고찰할 때에 그의 사상적 계시요, 계명의 문서 뿐 아니라 약속의 문서로 전제하기 때문에 논증의 자료로서 사용한 것이 확실하다.

 

 

3. 바울의 신학사상

 

A. 죄 관

a) 공관복음의 죄관

공관복음에는 죄를 언급할 때마다 대부분 죄에 대한 용서와 관련지어 말하고 있다. 공관복음에서 현저한 것은 예수가 죄의 승리자로 오셨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공관복음에 나타난 죄의 의미를 다음 세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교제 단절이다.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져 교제가 단절됨으로 세상에서의 욕망과 더러움이 자신을 더럽히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사명은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단절을 극복하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교제를 개진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둘째는 위선이다. 바리새인들의 하나님과 분리된 경건은 위선에 해당된다. 실상 하나님앞에서 중요한 것은 내면의 정결이었던 것이다.

셋째는 범죄케 하는 것이다. 범죄케 하는 것의 원인 자체는 죄가 없는 행동이라도 그 결과 때문에 죄가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공관복음의 죄관의 특징은 기계적인 율법조항만 지키면 충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중시한다.

 

b) 요한 복음의 죄관

요한은 케리그마에서 그리스도가 죄를 정복하였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주장하는 지배적인 사상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불신의 죄"이다. 구약에서의 우상숭배의 죄와 비교될 정도로 가장 중하고 악한 것이었다. 또한 죄는 의에 일치하는 신의 법에 반대되는 행동 즉 불법이며, 인간을 노예로 더 나아가 마귀의 종으로 예속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는 법에 관련하여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규정짓고 이것이 율법의 핵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사명은 죄에서 구원된 공동체에서 그 목적이 성취된다. 의를 맺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능력은 바로 공동체에서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요한의 죄관은 ①개별적인 죄 보다 사람들로 하여금 죄 짓도록 하는 근복적인 죄성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으며, ②율법준수보다는 그리스도로 거듭나고 공동체안에서 거할 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c) 바울의 죄관

(1)죄의 성격

바울은 죄를 기계적인 의미보다 인격적인 세력으로 보았다. 따라서 바울은 죄를 인격화시킬 뿐만 아니라 죄를 하나의 세력으로 보고 있다. 즉 죄란 독립된 행동이나 행동의 축척이 아닌 사람속에 숙소를 얻어내어 그를 노예로 만들고 그의 의지를 마비시키는 힘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죄에 대하여 바울은 보편성을 주장한다. 그는 롬 1:18 - 3:20에 제시된 바대로 유대인도 이방인도 모두 죄 아래 갇혔음을 증명한다. 세상에 속하는 것 자체가 죄에 참여하는 것이요 죄인이 되는 것이기에 세상이라는 인간 삶의 참여로 이에 죄의 보편성은 설정된 것이라고 한다.

5:12 - 21은 아담과 그리스도의 병행으로 죄의 보편성을 말함과 아울러 죄의 연대성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류안에 죄가 들어왔고 이 죄는 전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으며, 그 죄가 후손에게 까지 죄성을 연결시키고 있다고 한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바울은 죄를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죄된 행위에 국한 시키지 않는다. 그는 죄를 인간과 그 세계를 지배하는 힘으로,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세력으로 보고 있다. 이 죄는 종적, 횡적으로 죄의 연대성이라는 특성을 지니며 그 범위에서 전 세계를 포괄하는 보편성으로 나타난다.

(2)죄의 관계성

) 세상과 죄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어 그 자체로는 악하지 않으나 아담의 죄를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게 된다.( 5:12,8:20) 이제 세상은 세상의 것들로 지배당하고 바울이 "이 세상의 지배가"라고 일컫는 영적 세력으로 차게 된다. 바울은 "이 세상의 신"을 마귀라고 한다. 세상은 현실적으로 하나님께 반항하고 있는 악의 특징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세상에 속함으로써 죄에 참여하는 죄인이 되는 것이다.

) 율법과 죄

유대교에서 율법을 범하므로 개인이 죄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그것은 율법이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라는 논리는 바울도 수용하고 있으나 그 율법이 의를 완성하고 구원의 수단이 된다는 데는 철저히 반대한다. 율법은 행위로 지켜야 할 내용이기에 그것은 성취되어도 죄요, 성취되지 못하면 더욱 더 죄가 되는 것이다.

)육체와 죄

바울은 인간 영혼을 담는 그릇이자 인간의 본질을 긍정적으로 설명하는 도구를 몸(σωμα)이라고 하였고 인간의 타락성, 죄악성 그리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육(σαρξ)이 있다고 하였다. 바울에게 있어 ""은 전체적인 목적에서 하나님으로 부터 방향전환을 했거나 그분을 떠난 것으로서의 죄를 뜻하는 것이다. 육을 따라 사는 자들을σαρξ를 자신의 신으로 만든다. 이리하여 σαρξ는 인격적 존재, 악마적 지배자처럼 표현된다.

(3) 죄의 해결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신 목적은 죄를 심판하고 파멸시키려는 것임을 거듭 강조한다. 그리스도사건은 인간을 죄의 실재로 부터 해방시키고 새롭게 구성하는 사건이 된다. 복음의 내용은 인간이 믿음과 세례를 외롭게 되며 그가 그리스도가 함께 살리심 받는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져 죄에서 구속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을 말한다.

크리스챤은 그리스도와의 죽음과 부활을 얻게 되는 그리고 성경으로 부터 주어지는 새로운 삶을 갖고 있다. 그는 이제 새로이 성령에 사로잡혀 살게 된다. 이러한 성령의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하여 죄와 죽음을 정복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되어 생명의 충일한 상태로 변화될 것이다.

(4) 평가 및 비교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공관복음의 죄관과 요한 복음의 죄관 그리고 바울의 죄관을 비교평가 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공관복음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성의 측면에서 파악되었는데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 것과 교재의 단절이 제일 큰 문제였다. 바리새인들의 위선이나 표면적인 경건 역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가 아닌 기계적인 율법준수에 치중하기에 문제가 되었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불신이나 불법 역시 관계성의 측면에서 파악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 매어 있지 않으면 죄에 매이게 되기에 요한복음은 이러한 죄와의 관계를 탈피하기 위해서 사람의 관계내에서 성장할 수 있는 공동체의 역할을 중시한다.

이렇게 볼 때 공관복음이 신·인 간의 파괴된 관계의 결과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관계형성을 위한 원리면에서 죄관의 중점이 있다고 보겠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해결이라는 점에서 신약의 타 기자와 근본적으로 일치하나 단순한 행위나 상태를 넘어 인간의 육체와 율법 가운데 역동적인 관계속에서 사람을 속박하는, 저항할 수 없는 세력으로 죄를 파악한다. 바울은 죄의 보편성과 그 횡포의 극심함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실과 그 은혜를 강하게 부각시키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죄를 정복했음을, 그 안에서 완전한 승리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신비는 죄 없으신 예수가 죄를 지셨다는 것이다. 그 분께서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죄에 대한 승리의 표적이며 죽음과 마귀에 대한 지배의 상징이다. 십자가의 교훈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다.

 

 

B. 의 인 론

1)로마서에서의 하나님의 개념

바울은 예수께서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있어야 할 마땅한 관계, 특히 하나님편에서의 사랑과 용서와 화목과 구원의 은총을 주시는 의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① δικαιοσυνη Θεου의 구조를 통한 이해

바울서신에서 δικαιοσυνη Θεου는 크게 목적격 속격과 주격적 속격으로 해석할 수 있다. 목적격 속격으로 이해될 때 δικαιοσυνη Θεου는 하나님 앞에서의 의, 즉 하나님의 눈에 비추어진 인간의 의를 의미한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δικαιοσυνη Θεου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고 인정해 주시는 의라고 하는 것이다. 주격적 속격으로서 δικαιοσυνη Θεου는 의를 하나의 자산으로 보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소유하시고 그것을 행사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 자신의 구원하시는 능력이나 행위 또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들은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의 의는 자신을 스스로 의롭게 하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 구원행위이며, 의를 스스로 얻을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선물을 의미 한다고 볼 수 있다.

②ικαιοσυνη Θεου (하나님의 의)와 義認(의인)

하나님의 의에 관한 바울의 특수성은 로마서 1:17에서 하나님의 의와 믿는 자의 의를 한 문장으로 말하되, 이 둘을 둘로 보지 않고 하나로, 즉 하나님의 의로 보았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또한 로마서 4장은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자들에게 결정적으로 수여 되었다는 주제 ( 3:21이하)를 확증하기 위해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성서적 증거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10:3)

③의인의 성격

의인의 성격은 법정적, 종말론적, 그리스도론적 성격으로 살펴볼 수가 있다. 법정적 성격에서 의인이란 하나님이 신앙의 사람에 대해서 종말론적인 무죄판결을 최후심판에 앞서 현대적으로 선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종말론적 성격은 불확실한 의가 아닌 이미 성취되고 믿음으로 확신할 수 있는 의인 ( 5:1, 8:31, 38), 곧 미래의 종말론적인 구원을 그 자체 내에 내포하고 있는 현재적 종말론적 성격의 의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5:6 - 11)

유대교가 의인을 종말론적이며 법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는데 바울이 의견을 같이 하는 반면에, 바울의 그리스도론적 성격에서는 유대교와 근본적인 차이점이 나타난다. 그것은 바울이 말한대로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12:13)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것에 모든 신자들의 구원이 근거가 되는 위대한 사실이었다. 바울은 롬 3:21 - 26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의인의 근거가 됨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5:9)고 분명히 선언한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시는 근거는 우리의 신앙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객관적으로 성취한 사건이다.

 

2) 의인에 있어서 하나님의 방법

바울은 율법을 "의의 율법"( 9:31)이라고 불렀다. 그런까닭은 율법이 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율법의 의는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못했다. 바울은 이스라엘 전역사와 유대교에 있을 때의 자기의 경험을 통하여, 율법은 의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이므로 의인의 방법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울은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3:21)라고 선언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의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말하는 것이다. 의인의 유일한 수단은 바로 믿음인 것이다.(3:28) 믿음은 복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구원해위를 순종적인 신뢰와 신뢰적인 순종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다.( 1:5, 6:16, 고후 10:5)

그러므로 의인의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을 통해서 이룬 객관적인 사역이다. 그리고 믿음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개인적으로 적용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3) 의인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

의인에 관한 바울의 교훈에서 윤리적 교훈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그의 서신에서 뚜렷하다. 더욱이 주시해야 할 것은 윤리적 권고를 담고 있는 명령법적 기술의 중요한 단락들이 의인론을 담고 있는 직설법적 기술과 관련하여 "이와 같이" (ουτωσ) "그러므로"(ουν)로 시작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직설법적기술(INDICATIVE)과 명령법적 기술(IMPERATIVE)이 서로 모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 관계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INDICATIVE로서의 의인이란 그리스도인은 이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졌으며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음을 확언하는 선언이며, IMPERATIVE로서의 윤리란 그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여전히 죄에 대하여 투쟁을 계속하도록 명령하는 윤리적 교훈이다.

바울서신들에서 바울이 구원에 관해 진술하면서 직설법적 기술 (The Indicative Statement)과 명령법적 기술(The Imperative Statement)을 병행해서 사용하고 있음은 그의 전반적인 신학 사상의 기본적인 골격을 반영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직설법은 하나님께서 새시대를 도래시키기 위하여 행하신 신적사역을 가리키며 명령법은 옛세상 가운데서 이러한 새생명으로 살 것을 권면하는 것을 가리킨다. 새것은 옛것과 관계에 놓여 있다. 따라서 단순한 Ind - 로는 충분하지 못한 것이다. Imp - 가 항상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Ind - Imp - 의 적절한 균형은 항상 유지 되어야 한다. 이것은 분리 될 수 없는 것이다. Imp - 없는 Ind - 는 신자들을 신비주의자로 만들고 Ind - 없는 Imp - 는 신자들을 도덕주의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C. 구 원 론 ( 구 속 )

a. 신약에서의 구원

복음서에서 '구속하다'는 말은 λυτροω이다. 이 동사는 속전을 내고 자유케 하다,속전을 받고 자유케 하다인데 이 언어의 의미는 첫째, 로마의 구속에서의 해방과 둘째로, 모든 부정으로 부터의 구속을 말한다. λυτρωσισ 명사는 '구속' 또는 의무의 면제를 의미한다. 이는 "석방금", "전쟁포로를 놓아주기 위해 지불되는 돈", "저당잡힌 물건을 돌려받기 위한 돈"으로 사용된다.

신약에서 구속의 의미는 대가를 나타내며 따라서 구속이란 값을 지불하고 노예적 상태에서 해방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죄로부터 구속되는 것을 의미하고 죄의 권세로 부터 그리고 율법의 저주로 부터 구속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b. 바울에 있어서의 구원 (구속)

신약의 구원과 바울의 구원관을 별로 다르지 않다. 바울에 있어서 σωζω와 σωτηρια는 어원적으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제한되어 있다. 세상적 구원을 말할 때 σωζω대신 σωτηρια를 썼다. 그런데 로마서에서 σωζω, σωτηρια 라는 말보다 오히려 δικαιοσυνη을 많이썼다. δικαιοσυνη는 하나의 관계를 나타내는 법적인 개념이다. 이는 법관의 판결에 의한 의의선포이며, 의 윤리적 완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고후 5:19) 이 의는 생명을 얻는 것이며 ( 3:9 - 11) 의인으로의 간주며 은혜이다. 결국 바울에 있어서 σωζω, σωτηρια 는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에서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c. 죄로부터의 구원 (구속)

바울에 있어서 죄는 자범죄와 그 원인이 되는 원죄까지를 포함한다. 그래서 바울은 지중적 죄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해결책도 자범죄는 중생으로 원죄는 성결로 부터 가능하다.

이 죄의 침투는 창세기 3장의 기사를 그대로 따른다. 그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 왔는데 이는 육제적 죽음을 가져왔고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그리고 마귀()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선한 것이 없고 죄의 철저한 종이 되었다.

바울은 예수의 죽음을 죄의 결과로의 죽음이라고 한다.( 6:10) 죄 없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 죄에서 해방된다. 바울은 죄의 지배를 깨뜨린 십자가의 사건의 일회성을 강조한다. 기독자는 죄의 지배로 부터 십자가라는 관문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의의 해방지구에 옮겨진 자이다. 이를 구원이라 말했다.

d. 율법으로부터의 구원

바울에 있어서 죄와 율법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율법은 더 이상구원의 매체가 아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다.( 3:20) 율법은 인간의 죄를 폭로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연약함과 죄인임을 밝혀주고 인간속에 감추어진 심각한 죄를 폭로하여 율법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고 다른 완전한 것이 구원을 주는 예표인 것이다. 그래서 율법아래 있는 자는 항상 저주아래 있다.( 3:10) 율법의 의지는 죄의 증가를 의미한다. 바붕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율법을 통해 인간의 구원을 위한 섭리적인 적극적 역할을 한다고 했다. 이는 율법의 정죄를 받음으로 자신의 비참을 그리스도에게로 향해서구원을 받게하기 위함이다.

죄는 율법에 근거하고 거기서 출발하여 역사하는 것이다. 원래 율법은 선한 것이지만 죄의 무서운 생태가 바로 계명에 의해 노골화 되었다. 그 결과는 죄와 탕욕과 죽음을 가져온다고 율법에 대해 절망적 선언을 했다. 율법은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자요 죄의 이용물이 될 수 밖에 없고 인간의 열심과 노력은 그리스도가 없는 한 비관적이다.

e. 구원의 방법

바울에서 구속의 방법은 은혜와 사랑을 말한다. 은혜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아름다운 매력이 있는 것이며 완전히 값없이 자격을 따지지 않고 주는 선물을 말한다. 사랑은 주님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관계를 회복케 했다. 사랑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전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속은 그리스도의 순종적이 죽음을 통한 은혜와 사랑이며, 그리고 인간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믿음으로 해서 이루러지게 된 것이다.

f. 구속의 결과

구원의 결과로서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연합의 상징으로 주의 만찬과 세례가 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연합을 상징한다. 이는 공동체의 의식으로서 예수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다. 또한 예수와 신자와, 영적죽음과 부활의 상징이며 믿음이 없다면 세례는 무의미하다.(고전 6:11)

주의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연합을 상징한다. 신자는 만찬에 참여하므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교제를 통재한다.

 

 

D. 성 령 론

a. 성령안에서 ( εν πνευματι )

?? ????????에서 εν이 간혹 "도구" 또는 "대리자"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언어학적으로 보면 성령을 통하여, 성령에 의하여 성령의 중재로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성령안에서라는 말과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서로 교체되어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성령안에서 있다는 것이 곧 그리스도 안에서 있다고 보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위대한 활동들과 위대한 자질들은 모두 성령에 의한 것이다. 기도, 사랑, 복음, 기쁨을 누리는 것, 예배행위, 거룩함과 의롭다함을 얻음, 의와 화평등은 성령의 사역들로 나타난다.

바울의 모든 경험은 성령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생명의 주체도 성령이다. 성령안에서 사는 것은 부활하시고 영원히 사시는 주님앞에서 사는 것이다. 또한 천국의 보증이며 현재적인 천국을 누리는 것이다.

b. 약속의 성취와 성령

의롭게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 된다. 구약의 아브라함 예언의 축복의 약속을 실현하는 것이 성령이다.( 3:14) 불가능을 가능케하고 그리스도가 저주를 받음으로 축복을 실현한다. 이는 아브라함의 약속이고 그 실현은 성령에 의해서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한 약속 "다른 보혜사를 너회에게 보내어 영원히 살게 하겠다"는 약속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며 우리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의 성취이다.

c. 하나님의 중보자로서의 성령,

성령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선물을 나누어 주는 인격자로서 하나님의 중보자이다. 우리에게 사랑을 부어주고 ( 5:5), 아들이 되게 하며 ( 8:14),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 2:18) 이는 성령의 영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고 하나님과 우리의 중보자로서의 성령인것이다.

d. 성령과 새로운 삶

중생은 성령에 의해서 가능하며 이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이 시작된다. (고후 5:17) 성령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업을 수행하시는 자이시다. 웨슬레에 의하면 성령은 중생과 성화와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주는 주동자이시다.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은 윤리적 변화의 근원이며 미래에 실현될 생명을 현재적으로 맛보는 것으로 미래지향의 종말론과 연과되어 있다. 성령은 바울자신의 능력의 원천이며 ( 15:19),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상적인 행정을 위해 필요한 여러가지 은사의 원천이다.(고전 12 - 13)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를 닮는다.(고후 3:18) 그는 성령에 의해 모든 삶의 의미를 가졌고 그리스도의 삶의 처음과 현재와 나중은 모든 성령의 활동에 의존 된 것이다.

 

 

E. 교 회 론

 

바울서신에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유사한 표현은 많이 나온다. 이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따르는 무리라 할 수 있다. (고전 1:3)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단순히 공동체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교회와 만물의 머리로서 이해된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론은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이요;지체의 각부분이다. 이는 인간의 몸이 아닌 예수 안에 있는 몸이요, 그리스도의 모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의 아들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누도록 부르신 것이며 단지 연합의 의미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할 때, 특별히 강조되어지는 점은 교회의 상호연합과 다양성이라 할 수 있다. 일치(상호연합)는 고린도전서 12장에 언급되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치를 호소하고 있다.이는 그리스도안에서 한몸을 의미하여 다른 지체들과의 하나됨을 말하고 있다. 신자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된 것이라 한다. 또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안에도 다양성은 존재한다. 몸의 각 지체들에게는 특별한 은사들이 주어졌다.( 4:7) 이런 개인의 은사는 전체와 관련을 갖는다. 지체들은 받은 은사대로 전체로서의 몸에게 주어야 한다. 몸이 하나의 연합체이기 때문에 지체들은 전체로서의 몸에게 그의 은사를 제공할 수 있는것이다.

 

 

F. 바울의 윤리

 

바울의 윤리를 이해하고, 정확한 해석을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그의 신학적 전제를 이해하고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의 신학적 전제는 세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는데 첫째는 바울 윤리의 관계성으로 즉 그의 윤리가 하나님과 인가과의 관계냐 or 인간과 죄의 관계에 있느냐하는 것이다. 둘째는 바울 윤리의 종말론적 차원을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미래적인 종말은 오지 않았으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미 이 세대에 뚫고 들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세째는 σωμα ( Soma )적 윤리를 이해해야 한다. σωμα의 우주적인 차원을 인식하지 않는한 바울의 윤리를 바로 이해할 수 없다. 바울에 의한 기독교는 단순한 도덕이 아닌 것처럼 역시 바울에게 있어서 윤리는 단순한 도덕이 아니었다. 예를들어 성서의 성취는 고전 10:11, 로마서 15:4에 십자가의 사건은 로마서 14:5에 장사함도 로마서 6:4에 부활과 하늘에 계심도 골3:1 - 2에 연결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어떠한 의미에서든 윤리성이 의인에 필요한 선결조건이 된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았으나 비도덕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것과 모순된다고 말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하신 윤리적 명령을 그의 구원의 행동, 특히 세례도 연결시키고 있으며 그리스도안에 존재하는 윤리적 양상으로서 간주되는 그리스도의 닮음. 그리고 종말론과 연결시키고 있다.

 

 

G. 바울의 묵시적 요소 ( 부활, 종말 )

 

바울의 신학에서 드러나는 묵시와 부활과 종말의 사상들은 각기 독립적으로는 고찰할 수가 없다. 이 세가지의 사상들은 상호간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바울의 서신에 나타난 묵시적인 요소로는 파루시아 (Parusia,재림)와 심판의 기대로서의 기술이 바울의 묵시전통을 확인해 주는 자료가 된다. 산드는(A.Sand)는 말하기를 Parusia의 기대에 대한 대표적인 본문인 살전 4:13 - 18 5 1 - 11절은 명백하게 묵시적인 요소라고 주장한다. 또한 예일대의 신학부 교수인 린드케크는 바울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그 자체가 묵시의 중요한 차원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부활사상에 있어서 그 기원은 유대교의 묵시사상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박창환 교수는 말하기를 "적어도 부활사상은 하나님의 계시에 있어서 묵시사상에서 발원하고 그 온상을 거쳐 꽃을 피웠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부활의 신학이 그의 핵심이 되고 있다. 리텔보스에 의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부활사상은 그의 중심사건이다."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바울은 죽은자의 부활논증에 있어 고전 15장을 언급하면서 당시의 고린도 교회안에 퍼져있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을 통박하고 있으며 부활을 단지 영화(Spiritualizution)의 개념이고 몸의 부활은 없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적 사람들을 향하여 그들의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감과 같다고 공격하고 있다.

바울에의 부활신학의 요점은 크게 2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 첫째로 예수님을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의 어떤글에도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라고 한곳은 없다. 항상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셨다는 것을 전제하여 그리스도가 다시 일으킴을 바다았다(was raised)라고 표현하고 있다. 둘째는 신자들의 부활과 예수님의 부활의 연합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전자는 후자없이는 일어날 수 없으며 전자는 후자와 더불러 허락된 것이다. 따라서 전자에 대한 신앙은 후자에 대한 신앙을 내포하고 있는것이다. 바울의 종말사상도 묵시의 바탕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심판이라는 주제는 묵시의 사고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바울의 서사 전체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와 메시야적 영광의 임박한 도래에 대한 기대감과 또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종말과 그리스도안에 ( in Christ )있는 신자들의 종말론적 존재양식이 이 역사안으로 뚫고 들어왔다는 확실감으로 정의된다. 이와같은 사상은 다분히 슈바이쳐가 주장한 미래적 종말관으로 연결되어있다. 다드 (C.H.Dodd)는 실현된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바울의 종말사상을 파악하는데 다드에 의하면 바울과 함께 신약성서의 기자들이 일관성있게 예수님의 활동과 죽음과 부활의 사실들을 유대교의 종말론적 용어와 사상에 적응 시켰으며 그것은 곧 역사의 완성, 종말을 의미한 예언자들의 주의 날의 선포의 본질적인 의미가 그러한 사실들 가운데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즉 바울의 종말론은 이미 실현된 종말론인 것이다. 이 두가지의 견해를 결합하여 보스나 쿨만은 이중적 형태의 종말론을 위하고 있는데 쿨만의 주장에 의하면 시간의 중심에 놓인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이미 종말이 도래했고 그러나 그 완성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이러한 해석의 경향은 리텔보스 헌터, 레드, 큄멜에 의해서도 분명하게 개진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부활, 종말사상과 유대의 묵시적 전통은 일직선상위에 놓여있다고 하겠다.

 

 

4. 현대적 의미에서의 바울이해

 

A. 바울 해석사의 변천

 

바울연구가 이동해 온, 특별히 지난 100여년 동안에 있었던 주요 노정을 더듬어 보는 것은 바울 신학만으로 들어가는 기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예를 들어 튜빙겐 학파의 헤겔주의적 바울, 자유주의 신학의 자유주의적 바울, 종교사학파의 신비주의적 바울, 그리고 불트만 학파에 의해 강력하게 제시되고 있는 실존주의적 바울 등을 통해 신학적 - 철학적 발들의 추이를 더듬어 보는 것이다.

이 바울연구 역사의 변천은 역사적 - 비평적 주해를 촉진시켰으며 흐름을 더듬어 봄으로 우리는 바울 설교의 전체적 특성에 관련된 문제는 물론 현재의 바울연구 배후에 깔린 문제를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튜빙겐학파의 바우어는 헤겔철학의 영향을 바다 바울설교의 핵심을 기독론이 아니, 바울의 성령에 대한 개념과 그리고 그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성령과 육의 반위적 주제에서 찾았다. 이러한 바울의 의식은 율법과 배타적인 유대주의에 묶여 있었던 초대기독교와 대조관계를 발전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배타적인 해석으로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는 초대기독교의 모습에 대한 올바른 평가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막았을 뿐 아니라 신약계시안에서의 바울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게 했다.

그 후 나온 시도는 희랍의 인간론에서 해석하려는 자유주의적 해석이다. 그들은 희랍적 - 헬레니즘 사상으로 부터 근원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희랍사상은 일종의 윤리적 경향을 지닌 신비주의로 바울의 신학과 종교를 구속사적 사건에 의존하지 않는 일반적인, 윤리 - 합니적 종교성에 환원시키고 있다.

그 후 기독교 케리그마에 대한 종교사학적 해석이 점점 더 많은 주목을 받게 된다. 그들은 당시의 신비종교와 제의식을 통한 종교적 혼합주의가 바울설교안에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는 입장에서 바울을 해석하려고 하였다. 신비종교의 배경에서 평가하는 종교사학파의 절정점은 기독론에서 드러나게 된다. 불트만 학파는 종교사학적인 신화론적 해석을 시도하게 된다.

이에 정면으로 도전해 반대하는 사람이 알버트 슈바이쳐로 그는 구원의 구속사적 특성의 종말론적 해석을 하고 있다. 바울의 교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임박함에 관한 예수? 종말론적 설명에 근거하고 있다. 이교리는 또한 윤리학과의 올바른 관계를 확립하였다.

위의 연구들은 현재의 입장에서 연속성을 견지하기 어려운 만큼 많이 교차되며 계속적 연구에 부분부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본다.

 

 

B. 바울신학의 사회학적 분석

 

바울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부터 출발하고 정초한다. 먼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복음의 핵심으로 포착했다는 사실 자체가 사회학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바울은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의 무활한 모습과 직접 부딪히는 극적 체험을 한 후 예수의 십자가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입증하는 것이라는 인식론적 전환을 이룬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세계의 구조적 불의 () 안에 갖힌 인간을 일반화해서 오직 구원론적 관점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수직적 관계에만 관심을 갖고 죄의 사회적 실재를 구체적으로 따져 묻지않는 추상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해를 통해 형성된 불의한 세계에 대한 바울의 신학적 비판의식은 사회적 비판역과 변혁력을 잠재하고 있으면서도 현실적으로 양성화되지 못하고 기존의 불의한 사회 관계를 탈속적으로 인내하는 사회적 무관심을 조장함으로써 오히려 불의한 사회구조를 유지시키는 잠재적 기능을 수행할 소지마저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안에서의 교인들간의 사회적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신경을 썼다. 그리스도안에서의 한몸이라는 바울의 교회관은 사회적 차이들이 교회안에서 일으키는 긴장과 마찰의 소지를 제거하면서 결속과 통합을 유지하려는데 목적이 있었을 뿐 세상적 불평등은 여전히 인정하였다.

바울신학은 사회학적으로 볼 때 애매한 이중적 성격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세계의 구조적 불의가 드러난 것을 인식하고 여기에서 인간을 해방시켜야 할 필요성을 인식한 것은 높이 평가되지만 하나님과 인간을 수직적으로 이해하고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 인간과 세계변혁을 바라는 종말론적 관점을 취했기 때문에 현실세계의 변혁에 대해 별 흥미를 보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C. 바울 서신의 여성관

 

오늘날 사도 바울은 '성서와 여성'의 문제를 논할 때 늘 쟁점의 근원으로 취급되고 있다. 예수시대의 유대사회는 철저한 가부장적 사회로서 여자는 남자에게 절대적으로 종속된 위치에 있었다.

흔히 바울 서신의 몇 구절을 피상적으로 읽을 때는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는 존재로 인정되어지는 것 같지만 갈라디아서 3 28절을 보면 여서의 위치와 관련되는 가장 명백한 신학적 선언의 형태의 기술이 나타나 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 말씀은 인간과 인간사이를 차등하는 옛질서가 폐기되고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질서와 가치관을 용납하는 공동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남녀가 동등하는 것은 고대 영지주의적 이단 사상의 견해와는 다른 것이다.

바울의 신학적 견해와 초대교회의 행동 양식을 볼 때 공동체 안에서의 여자들의 역할과 지위가 변화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고린도 전서 11, 14장의 바울의 기술은 여자가 성직을 맡을 수 없으며 오직 보조직, 이차적 역할 만을 해야 한다는 정당화를 제공했으나 이는 영지주의적 이단 사상과의 투쟁을 배경으로 이해할 때 풀리는 문제들이라 할 수 있다.

고전 11:11에서 '주 안에서' 는 중십적인 바울의 사상이다. 바울은 분명 기원 1세기의 유대사회의 역사적 실존이며 자신이 속한 문화적 사회 관습과 사고를 극복하지 못했으며 교회 문제, 특히 여자들에 대해 당시의 관습과 전통에 의존하고 있으나 남녀의 상호 의존과 동등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하고 있다. 그뿐아니라 유대교 관습으로는 불가능했던 공중 예배시의 여자들의 공적 역할을 인정하여 적극적인 여성의 참여를 허락한다는데서 놀랍고 혁명적인 일이다.

 

 

 

결 론

 

바울신학을 정립하고자 할 때 누구나가 부딪치게 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울 서신들이 신학적인 논문이나 형식을 갖춘 문학이 아니고, 대부분 바울 자신이 설립한 교회와 교인들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기록한 "비문학적이고 " 생생한 개인 서신들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점을 들어서 바울신학의 한계, 또는 바울에게 있어서의 신학적인 요소의 중요성을 도외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각 서신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신학적인 입장을 보노라면 바울은 실제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제기된 교회생활이 여러가지 문제들 - 교리적인 문제이든 실천적인 문제이든 - 을 다루게 됨을 볼 때 이러한 점에서 바울은 분명히 유대인 출신의 훌륭한 신학자며,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실천적 타당성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인견과 사역의 의미를 해석한 신학적 작업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사상을 그의 진술된 기록들로 부터 재구성할 수 있을 뿐이며,바울이 언급하지 않는 부분, 즉 예수의 생애에 관한 복음전승같은 부분은 무지에서라기 보다 당시 상황속에서 언급의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