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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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으로부터 벗어난 우리


  1장에서 예수님께서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전케 하러 오셨다는 말씀을 가지고 율법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시지 않았다는 말씀은 율법의 본질을 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율법의 본질은 폐하여 지지 않았지만, 율법의 여러 가지 기능들은 폐하여 졌다는 사실을 아울러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을 폐하러 오지 않았다’는 표현보다, 오히려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혹은 ‘율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성되어졌다’는 말씀들이 성경 안에서 훨씬 많이 등장하고 있음을 확인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율법의 기능에 관한 문제들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시대에도 제사를 지내야 한다거나, 또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문제들로 여전히 시비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지 않았다고 하신 말씀은 율법의 본질에 관한 말씀들이며, 제사나 안식일과 같은 기능과 형태적인 측면들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은 폐하여 졌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것을 일컬어 이 구약의 제사법들이 흠이 많아서 폐하여 질 수 밖에 없었고, 때문에 새 언약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히 7:28)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히 8:7~8)

  성경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참된 제사장이 되시며, 또한 참된 어린양이 되심으로 온전한 제사를 드렸다는 것, 그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이 영 단번에 모두 끝냈다는 사실, 이 모든 것들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7:4)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로써 율법이 더 이상 우리를 주관할 수 없으며, 이제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 5장 17절의 “율법을 폐하러 오지 않았다.”는 의미는 율법의 본질적인 정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정신은 결코 폐하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성, 윤리와 도덕성의 가치는 결코 폐하여 지거나 상실되지 않는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폐하여 지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성


  오늘날 극단적인 복음주의자들 가운데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함과 율법의 폐함을 마치 도덕률이 폐기되어진 것처럼 이야기하고, 그렇게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을 많이 만나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성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성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거룩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거룩성을 회복하게 하시기 위해서 친히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시며,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하나님처럼 거룩해질 것을 요구(마 5:48)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받아들인다고 해서, 거룩성을 파괴해도 좋다고 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결코 부도덕 할 수 없고, 복음은 결코 우리를 방종으로 이끌어 갈 수도 없습니다. 이 사실을 명확히 아셔야 합니다. 복음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지만, 자유의 개념이 우리를 방종의 의미로써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죄로 얽어매었던 것. 즉 율법의 정죄와 심판으로부터 자유하게 한 것이지, 우리를 율법의 거룩함으로부터 자유하게 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자유하게 되었다는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규제하고 얽어맸던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것이지, 하나님의 거룩성을 반영하는 거룩성이 폐지된 것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의 거룩성을 약화시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되는 참된 자유가 도덕성을 파괴하는 방종을 의미하지 않음을 명확히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을 깨달았다고 하면서도 엉망진창의 인생을 살면서 “나는 복음 안에서 자유로워 졌다.” 또는 “복음 안에서 의를 이루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복음에 대한 오해를 가진 것입니다. 복음을 매우 잘못알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극단주의적인 복음주의자들을 많이 만나 보았습니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이러한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점점 더 거룩성을 상실해 가고, 거룩성에 대한 의미와 추구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율법주의적인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도 잘못되어졌지만, 복음 안에서 율법의 본질적 정신까지도 폐하여 진 것으로 생각하고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방종의 삶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주님이 허락하신 삶이 아닙니다.




거룩함을 이루는 복음


  참 복음은 우리를 더욱 더 거룩함으로 이끌어 갑니다. 전에는 연약한 육신으로 인해서 거룩함을 이룰 수 없었지만, 이제는 복음과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며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의에 대하여는 산 자(롬 6:11)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더 의로워지고, 거룩해지고, 순결해 지면서, 성결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복음입니다. 바르게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1)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의 의로움에 대하여는 산 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극단적인 복음주의자들이 주장처럼 “우리가 거룩성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전에 율법 아래 있을 때 거룩한 삶을 살지 못했지만, 이제는 복음으로 말미암아서 그 거룩한 삶이 가능하여 졌다는 것을 역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사는 자들은 온전한 거룩을 이룰 수 있는 존재가 되어졌기 때문에, 거룩성이 복음 안에서 특징으로 돋보이게 되는 삶을 살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깨닫기 전과 복음을 깨달은 후는 다릅니다. 복음을 깨닫기 전에는 죄 때문에 힘들어 했지만, 복음을 깨달은 후에는 죄가 더 이상 나를 주관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제 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죄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리스도의 참된 의가 나의 삶 속에서 구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되어진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참된 변화가 있습니까? 복음 안에서 우리는 거룩성이 점점 구체화 되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18절에서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은 일점일획이라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폐하여 질 수 없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성이 파괴되거나 손상될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거룩하십니다. 과거에도 거룩하셨듯이, 오늘도 거룩하시며, 앞으로도 거룩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지 않는 것, 거룩성이 부여되지 않고, 거룩성이 요구되지 않고, 보장되지 않는 것은 무엇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생명이라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복음이라고 인정할 수 없으며,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빛(요 1:4)이십니다. 주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 가운데 행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일 1:6)라고 요한사도는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복음이 우리의 거룩성을 약화시키거나, 우리가 거룩하여지지 않아도 괜찮다는 식의 교훈은 잘못되어진 것입니다. 율법은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되어진 것입니다. 완성되어진 율법은 우리의 삶속에서 재현되어질 것입니다. 이 율법은 우리의 삶속에서 더욱 더 구체화 되어질 것이 분명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정신이 강화되어짐에도 불구하고, 율법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하는 것일까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룰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마태복음 5장 21절 이하에 나타난 율법의 정신은 더욱 더 강화되어 있습니다. 율법의 본질과 그 정신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굳이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시려고 율법에 대하여 죽게 하셨을까요? 왜 더 이상 율법을 생활규범으로 우리를 얽어매지 않도록 하시고, 다른 생활규범을 세우신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의 중요성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 5:19)


  예수님께서는 왜 우리가 율법의 정신과 요구에서 벗어나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어졌고,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할지라도 잊어서는 안 될 율법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율법의 중요한 역할은 사람의 죄를 드러내고, 그 죄를 정죄하여, 심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폐하여 지는 법이 없습니다. 율법의 역할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체크할 때에도 율법의 거룩성으로 우리의 죄를 보았지 않습니까? 구원받고 난 이후에도 율법의 역할과 기능은 살아있습니다.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그 기능과 역할은 여전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율법이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의 여부”가 아닌, “온전한 상급 여부”로 작용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영광의 수준을 측정하는 시금석이 바로 율법인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공심판은 사함 받았기 때문에, 지옥에 가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말씀하시면서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그래서 오늘 우리는 예수 안에서 공심판을 면했습니다. 그러나 사심판은 남아 있습니다. 이 사심판은 우리의 공력을 심판하는 것인데, 쉽게 말해 상급 심판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5장 19절 말씀을 통해 천국에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 큰 자와 작은 자로 구분되어지는 평가 기준이 곧 율법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은 우리를 천국 입성 문제에 있어서는 그 기능이 끝났지만, 천국의 시민권을 얻은 이후에는 우리가 천국에서 큰 자인가 작은 자 인가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율법을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인생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측정 받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율법에 의한 측정에 의해서 천국에서 사는 동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수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천국의 삶에서 큰 자와 작은 자로 차등이 생긴다 이 말입니다. 그것의 기준이 바로 이 율법입니다.



천국에서의 차등성


  만약 천국에 차등이 없고 누구나 다 같은 것이라면, 우리가 애써 하나님의 율법에 주목하고 거룩함의 수준에 도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컨대 십자가의 강도와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모두 천국에서 똑같다면, 왜 우리가 벌써부터 예수님을 믿어서 이토록 주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까?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영접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십자가의 강도와 주님의 일꾼들은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도 우리의 삶이 여전히 거룩해야 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늦출 수 없는 이유는, 천국에서의 영원한 상급의 문제가 이 땅에서의 거룩함의 수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았기에 지옥 갈 걱정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음대로 살고 싶습니까? “천국에서 큰 자면 어떻고, 작은 자면 어떠냐? 천국에 가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혹시 계십니까? 그러나 그런 사람치고, 이 세상에서 거지로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거지로 살아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대부분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현실의 부귀영화가 더 중요하고, 머나먼 미래의 부귀영화는 일단 뒷전인 것입니다. 그러나 먼 미래라고 생각했던 천국이 곧 현실이 될 것입니다.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마십시오. 이미 때는 늦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천국 생각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악착같이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천국에서 거지로 살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잘 살고 싶은 사람은 천국 가서도 잘 살고 싶어 합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천국에서 부자로 살고 싶으면, 악착같이 천국을 준비하십시오. 미래가 곧 여러분의 현실이 됩니다. 다가올 그 현실은, 그때 가서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현실입니다.


  천국에는 분명히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습니다.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는 사람” 그리고 “크다 일컬음을 받는 사람” 여러분은 어떠한 자가 되길 원하십니까?


천국을 바라보자

  

  이 세상은 잠시 잠깐 머무는 곳입니다. 이 세상은 지나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나그네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 계명을 가슴속에 새기고 일점일획이라고 놓치지 않고, 이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날마다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금식을 하며, 왜 하나님 앞에 눈물로 회개하며, 왜 특별한 집회가 필요하며, 왜 성도 간에 교제와 연합이 필요하며, 왜 성경공부가 필요하며, 왜 주님을 위해서 충성하고 헌금해야 합니까?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이 헛것입니다. 만약 이 세상이 끝이라면 잘 먹고 잘 살기위해서만 노력하십시오. 도덕이나 윤리는 필요 없습니다.


  유물론적 가치관을 통해서 보면, 윤리와 도덕이라는 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끝이라면, 바보처럼 살지 마십시오. 천국 없다고 생각한다면, 악착같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사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살수 없는 것은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우리가 영원히 살 장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해야 하며, 날마다 모든 시간들과 내가 누리고 싶은 것을 절제해서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명심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드린 모든 것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천국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습니다(마 6:20). 여러분의 수고와 노력과 충성은 결단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58)

  

  여러분의 수고는 값진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드린 시간들은 찬란한 계급장으로 여러분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드린 마음과 정성들은 훗날 여러분을 자랑스럽게 만드는 가치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을 무시하고 자신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서 헛되게 보낸 모든 시간들은 훗날 자신들의 수치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땅의 것을 어떻게 해서든 손에 쥐어보려고 했던 수많은 인물들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죽을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간 것이 없습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큰 땅을 가졌던 칭기즈칸도 자신이 죽을 때는 땅 한 평도 가지고 가지 못했습니다. 또 우리가 잘 아는 재벌들도 자신이 번 돈을 가져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어서 천국에 가져갈 수 없는 것은 소유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잠깐 동안 내 손에 머물렀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소유의 개념은 세상에서 말하는 것과 다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소유의 개념은 내가 죽어서 가져갈 수 있고, 죽어서 나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능력과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능력도 다릅니다. 땅에서 유세 떠는 것이 참 능력이 아니고, 천국까지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참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 믿고 성령 충만한 가운데 성령의 능력을 받았다는 개념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 능력이라는 것이 죽은 사람도 살려 내는 것이 능력이 아닙니다. 천국 가서도 유용할 수 있는 것이 진짜 능력입니다. 천국 가서 유용한 능력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영적 수준, 거룩함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드렸던 모든 것이 능력입니다. 능력 받았다고 하면서 희생할 줄 모르고, 능력 받았다고 하면서 사랑할 줄 모르고, 거룩함을 실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난 이후에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서 자신을 쳐 복종시켰다(고전 9:27)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십니까?


  바울은 진정한 능력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미 삼층천을 갔다 온 사람(고후12:1~2)입니다. 이미 천국의 가치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전도해서 내 이름이 높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오히려 그로 인해서 천국에서 거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자신을 쳐 복종시킨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능력이라는 사실은 알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가 왜 이 율법을 일점일획이라도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고, 우리의 삶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열망하고 소망해야 하는가? 이것이 천국에서 우리를 큰 자와 작은 자로 구분 짓는 시금석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율법의 정신, 율법의 요구를 통해서 우리에게 반영되어져야 할 그 거룩함의 수준이 우리 삶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았거든 몸부림치십시오. 이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이 천국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삶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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