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그리고 바울의 선교(바울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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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그리고 바울의 선교(바울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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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 론

처음부터 선교사로서의 바울의 삶의 특징은 고난이었다. 하나님은 그를 부르실 때에 그의 선교와 고난이 서로 뒤섞일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바울의 선교에서 고난이 주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9:15-16).

고린도의 거짓 사도들은(고후 11:13-15) 바울의 고난과 연약함 때문에 그의 사도직의 정당성을 공공연히 공격했다(고후 10-13장). 그의 대적들은 참된 사도들은 표적과 기사와 기적을 행한다고 믿었다. 물론 표적과 기사는 바울 사역의 특징이었지만, 바울은 연약한 데서 강한 것이 사도적 사역의 특징이라고 믿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에게 가해진 반대자들의 공격의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바울에 대한 그들의 공격에는 여러 가지 측면이 있었다. 바울이 두 번 고린도를 방문하겠다고 약속하고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바울을 우유부단한 사람이라고 비난했다(고후 1:12-22). 그들은 약속을 어긴 사람은 진정한 사도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아마 그들은 바울이 복음 전도에 성공하지 못한 것도 비판하고, 성령에 의해 능력을 받은 사도라면 그의 노력을 나타내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킬 것이라고 불평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울에게 추천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을 수도 있다.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고후 3:1). 결국, 바울은 최초의 열 두 제자에 속하지 않았고, 예루살렘과의 관계도 의심스러웠다(갈 2:1-4). 또한 바울의 사도적 정통성에 대한 온갖 의심과 불안의 근원은 그의 연약함과 고난이었다(고후 12:8-10; 13:3-4). 바울에 대한 이 특별한 비난이 편지 전체에 가득한데, 이 비난에 대한 그의 반응이 편지의 핵심을 이룬다. 역설적으로, 고린도에 있는 바울의 반대자들은 그의 고난이 그의 사도 자격을 박탈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바울의 고난은 더욱 증가했다.

바울이 사도로서의 자신의 고난의 역할을 상세히 설명하는 편지는 고린도후서이다. 그러나 그의 사도적 사명에 있어서 고난은 고린도후서에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고난과 그의 사도적 사역의 관계는 그의 편지들 안에서 여러 번 표면에 등장한다. 고난은 바울이 어느 정도 상세히 다루고 있으며, 또 바울의 선교에서 중요한 것이므로, 성경 신학에서는 반드시 고난을 살펴보아야 한다.

 

2. 데살로니가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고난의 역할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운 후에, 장차 고난이 임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교회가 어떻게 반응할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의 안정을 염려했다(살전 3:1-5). 그러나 그들이 믿음을 지키고 있으며 사랑으로 바울을 기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바울은 기뻐했다(살전 3:6-10). 그 편지에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을 의심했다는 다른 증거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들의 믿음이 그들 자신의 고난 때문에 심각하게 시험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한 본보기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이 고난을 받을 때에 성실하게 참고 견딘 것을 자세히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데살로니가전서 1:6절에서, 그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가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바울이 고난을 통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한 본보기가 된 것처럼, 그들도 그들 자신의 고난에 의해 다른 사람들을 위한 본보기가 되었다(살전 1:7).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의 성실함은 고난에 대한 그들의 반응에 반영되었다. 그들은 고난에 대해서 성령에게서 오는 기쁨으로 반응했다(살전 1:6). 고린도후서가 기록되기 전에, 바울은 이미 고난이 그의 사역 자격을 박탈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고난에 대한 그의 반응은 그가 성령에 의해 능력을 받았음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그의 고난은 그의 사역을 정당화해 주었다.

고난을 받는 동안의 바울의 사역의 완전함에 대한 간단한 논평(살전 1:5-6)은 데살로니가 전서 2:1-12절에서 계속 전개된다. 그는 자신이 데살로니가에서 심한 반대를 받았고 그와 실라가 빌립보로 가기 직전에 매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행 16:16-40), 그들 가운데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했다고 상기시킨다(행 17:1-9). 데살로니가 전서 2:3절은 그가 고난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담대한 이유를 제공해준다. 바울은 자기의 사역의 완전성을 강조한다. 그 시대의 일부 순회 전도자들의 메시지와는 달리 그의 메시지에는 간계나 속임수가 없었다. 그의 사역의 특징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한 애정이 깃든 관심과 애정과 사랑이었다. 데살로니가 전서 2:9절을 보면, 바울은 자신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금전적으로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세속적인 일에 종사한다. 바울은 비난을 받지 않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원하여 그러한 모욕을 참고 견뎠다. 만일 전하는 사람이 비열하면, 십자가의 메시지의 효력이 사라질 것이다. 반면에 고난을 받으면서도 성실하게 복음을 전파하면, 듣는 사람들이 복음을 찬양할 것이다.

 

3. 고린도전서에 나타나는 고난과 복음

바울이 고린도전서와 후서에서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맞서 자기의 사도직을 옹호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반대자들에게 응답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린도전서에서의 자기 방어를 위한 증거는 그리 설득력이 없다. 고린도후서의 상황을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상황에 억지로 적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또한, 고린도전서 1:10-4:21절로부터 일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사도적 권위나 가르침을 문제 삼았다고 추론하는 것도 잘못이다. 고린도 교회 안의 다툼은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의 웅변 능력에 대한 상이한 평가에 기인한 것이었을 뿐, 바울의 사도적 권위에 대한 심각한 다툼은 발생하지 않았다. 일부 고린도 교인들은 단순하게 바울은 아볼로나 베드로보다 웅변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고린도 교인들이 일부 연사들의 웅변 기술에 도취된 것은 그들이 세상의 지혜에 매료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베드로, 아볼로, 바울, 심지어 그리스도 중 한 사람의 편을 들고 호의를 나타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바울은 그들의 기본적인 죄는 교만이라고 밝힌다. 그들이 바울이나 아볼로를 지지한 배후에는 자기 과시의 정신이 놓여 있었다.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보다 사역자들을 자랑하는 자만심을 치료하는 수단이므로, 바울은 십자가의 신학으로 반격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나사렛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구원이 성취되었음을 상기시켜 준다.고린도 교인들의 교만은 그들의 지나친 종말의식과 결합되어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지금 이 세상에서 천국을 위해 예비된 삶을 누리고 있다고 믿었다. 아마 그들은 천국의 시작에 대한 바울의 신학을 왜곡하여 그리스도의 통치의 완성이 지금 실현되었다는 결론을 끌어냈을 것이다(고전 4:8).

바울은 고린도전서 4:8-13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에 대해 사도들의 연약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대응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들이 지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바울은 천국은 장래에 완성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사도적인 실존과 기독교적인 실존의 특징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어리석음과 약함과 모욕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11-13절에서 자신이 사도로서 당한 모욕들을 자세히 언급한다. 바울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집이 없으므로, 하나님 나라의 “아직 ...아니다”라는 차원이 드러난다. 바울은 이렇게 고난을 열거하면서 자신이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인 육체노동을 언급한다. 이것은 그가 경제적으로 자활한 것이 그의 고난의 일부를 이룬다는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고린도 교인들은 높은 신분과 성공을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다는 표식으로 생각했다. 바울은 그와 반대되는 것을 주장했다. 세상에서 정죄를 받고 무가치한 사람으로 배척을 받는 사람들이 참 하나님의 사자들이다. 바울의 고난은 그의 메시지의 적법성을 약화시키지 않으며, 그 신빙성과 진실을 증거 해준다.

고린도 교인들은 인간 사자(使者)들의 능력과 신임장에 감명을 받았다. 따라서, 바울, 아볼로, 베드로, 심지어 그리스도를 지지하는 당파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자기들이 성령의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인간 사역자들에게 열중하고 그들로 인해 말다툼을 하는 것은 그들이 육에 속한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있음을 드러내 준다고 공격한다(고전 3:1-4). 바울은 자신의 능력을 아볼로의 능력과 비교함으로써 그들의 허영심을 조정하기를 거부한다. 바울에게 매료되거나 아볼로에게 매료된다는 것은 지혜가 무척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종에 불과하며, 모든 발달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3:5-9). 바울의 사역에 있어서 고난과 약함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다. 그의 고난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영광과 능력은 바울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한 것임을 상기하게 해주었다. 우상을 섬기듯이 바울이나 아볼로에게 헌신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하고 유일하신 주님이 아니라 종들을 존귀하게 하는 것이므로 근본적으로 오도된 것이다.

 

4. 고린도후서에서의 바울의 고난

바울은 연약함과 고난 때문에 반대자들의 공격을 받았으므로, 고린도후서에서 그의 고난에 대한 장황한 설명과 변증이 발견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고린도후서의 통일성은 격렬한 논쟁의 주제이다. 많은 학자들은 고린도후서는 바울의 여러 개의 상이한 편지들이 합쳐진 것으로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적어도 10-13장은 1-9장보다 나중에 작성되었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편지를 처음 기록할 때부터 10-13장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고난을 설명함으로써 그 편지를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고난을 가져오시고, 그 고난 가운데서 그를 강하게 하신다. 따라서 그는 사도로서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튼튼하게 할 수 있다(고후 1:3-7). 바울은 하나님께서 “환난 속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신다”고 설명한다(고후 1:4). 바울의 고난은 그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한 것이다(고후 1:6).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과 고린도 교인들 모두가 고난을 당하고 서로를 위로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은 고난 중에 있는 바울을 위로하시고,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위로한다. 사도인 바울은 자기가 회심시킨 사람들에게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위로와 구원을 전하는 특별한 역할을 이행한다. 이런 까닭에 그의 고난은 그의 사도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개종자들의 삶에 하나님의 성령이 부어지는 수단이다.

선동하는 사람들은 바울의 고난이 그의 사도 자격을 박탈한다고 주장하지만, 바울은 자기의 고난은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받는 수단이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공표되는 방법인 것 처럼, 바울의 고난은 고린도 교인들을 위한 구원의 길이라는 점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당연한 결과의 기능을 한다. 적들은 바울의 고난은 그의 사도 자격을 박탈한다고 공격했지만, 바울은 자기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주신 것이라고 응답한다. 그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식의 향기가 세상에 전달되는 수단이기도 하다. 바울이 개선행진이라는 상징에서 희생제물이라는 상징으로 옮겨 가는 것은 교훈적이다(고후 2:14-16). 왜냐하면 제물과 관련된 표현은 고난이라는 주제를 불러내기 때문이다. 고난 받는 사도 바울에게서 나온 향기가 세상에 도달한다.

고린도후서 4:10절에서는 바울이 자기 몸에 예수의 죽음을 지니고 다니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몸에 예수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려는 결정을 강조한다.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죽인 것”(nekrosis)이라는 단어는 처형되는 과정, 날마다 예수와 함께 죽으려는 결심을 언급한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고 죽기로 약속한 것은 예수의 힘과 생명이 바울을 통해서 드러나는 수단이다. 반대자들은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의 성령이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주장했지만, 바울은 예수의 생명이 드러나기 위해서 우리가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표적과 기사는 악한 것이 아니지만, 악한 사람들도 기적을 행할 수 있으므로 본질적으로 그것들은 적법성의 기초를 제공하지 않는다:“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살후 2:9). 만일 고린도후서 4:10절이 고난을 받으려는 바울의 결정을 강조한다면, 고린도후서 4:11절은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 바울을 고난에 넘겨준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역할에 초점을 둔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난을 통해서 바울의 삶 속에서 작용하는 죽음은 고린도 교인들 안에 생명이 만들어지는 수단이다(고후 4:12). 그의 신학은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 이라는 특성도 분명하다. 바울은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하므로, 그 나라는 아직 완전히 임하지 않았고 새 시대도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러한 고난 속에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다가올 시대는 현 시대에 스며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은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을 가져 오신다.

바울의 고난이 그의 사도 자격을 박탈한다는 반대자들의 비난은 설득력이 없다. 바울은 그와 반대되는 논제로 맞선다. 그는 자기의 고난이 지극히 작은 것이었다거나 자신이 겉보기 만큼 약하지는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기가 고난을 참고 견딘 것이 그의 사역의 자랑거리라고 주장한다(고후 6:3-10; 11:22-33). 고린도후서 6:3-10절의 목록은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살펴본 주제를 소개한다. 고난만이 바울의 사역의 자랑거리가 아니며, 그러한 고난 속에서 윤리적으로 고결하게 행한 것이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임을 증명해 준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의 약함과 고난이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가 전달되는 수단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자랑한다(고후 12:7-10). 고린도후서 12:9에서 말하는 것처럼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진다.”바울이 자기의 업적을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고후 11:1-12:10), 자랑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은 아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이 옳으며(롬 5:11; 고전 1:31), 약함을 기뻐하는 것이 권장된다(고후 12:10). 고린도 교인들은 고린도전서에 제시된 문제들을 그다지 벗어나지 못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능력이 약함 안에서, 약함을 통해서 나타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고후 13:3-4).

바울은 반대자들이 바울과 다른 차원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경제적으로 독립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거짓 선지자들이 스스로 바울과 같다고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고 경제적 지원을 거부한다(고후 11:12). 바울은 자칭 이 지도자들을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로 여겨 배격한다(고후 11:13). 이번에도 바울이 경제적으로 처신한 방법에서 그의 성실함이 크게 다루어 진다. 그는 만일 자신이 메시지를 성실하게 실천하는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자기의 고난과 복음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예리하게 의식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의 정당성이 증명될 것이며, 그럼으로써 자신이 사도적 소명을 얼마나 확신하고 있는지를 지적해줄 것이라고 확신하고서, 독자들에게 자신의 행동을 조사해 보라고 말한다(고후 3:4, 12; 4:1). 그는 자신이 고린도를 방문하려는 최초의 계획을 마무리 짓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다(고후 1:23-24). 근본적인 이유는, 바울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훈련하기를 즐기지 않고 그들의 믿음의 진보로 인해 그들과 함께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그가 개종자들의 악한 행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엄격한 징계 방식을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고전 4:21; 고후 12:19-13:4). 이런 까닭에 고린도후서 10-13장에서 바울은 회개하지 않은 소수의 완고한 사람들에게,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위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도 그리스도처럼 심판을 하기 전에 그들에게 죄로부터 돌이킬 기회를 주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을 강조한다(고후 10:1).

심지어 고린도후서에서 바울 자신을 위한 변증은 궁극적으로 바울 자신의 명성을 보호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이 아니다(고후 12:19). 그는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의 사역과 확목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후 5:20-6:2; 6:11-7:2). 만일 그들이 거짓 사도들과 운명을 같이 한다면(고후 6:14-7:11), 그리스도의 복음을 버린 것이다(고후 11:2-4). 왜냐하면 바울의 사역은 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고후 13:3-4). 물론, 그리스도의 구속은 독특하고(고후 5:18-21) 되풀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울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반영하며, 따라서 바울을 배격하는 것은 십자가의 구원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것이다.

 

5. 바울의 투옥과 복음의 진보

바울의 사역의 진보, 즉 복음의 진보는 그의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바울이 약할 때에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고후 12:7-10). 그는 약함은 십자가의 능력 있는 말씀이 사람들의 삶에서 효력을 발휘하는 수단이라고 이해했다(고전 2:3-5). 하나님께서 바울을 죽음으로 인도하심에 따라, 복음의 향기가 온 세상에 퍼졌다. 바울에게서 작용하는 죽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생명으로 이어졌다(고후 4:12).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마법에 걸렸기 때문에 예수를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고 질문할 때에(갈 3:21), 자신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의 당연한 결과로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만일 고난 받는 사도인 그가 전파한 복음을 그들이 거부 한다면,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분도 거부할 것이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바울의 고난 때문에 복음을 받아 드렸다(갈 4:12-14). 바울은 자신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왔음을 보여주는 상처를 몸에 지니고 있었다(갈 6:17).

바울 자신의 고난에 대한 고찰은 그가 어떻게 에베소서에 자신이 이방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죄수라고 말할 수 있었는지(엡 3:1; 빌 1:7), 그리고 그의 고난이 그들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것(엡 3:13)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은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수단이라고 이해한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데모데후서 2:9-10절에서 그가 옥에 갇힌 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매이지” 않으므로, 자신은 옥에 갇힌 것으로 인해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반대로 그는 택하신 자들이 구원받기 위해서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는다.” 분명히 그는 자신의 고난을 복음의 진보를 위한 교두보로 여긴다. 그의 고난은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고난은 복음 전파를 초조하게 만드는 부작용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위한 종말론적 영광으로 가는 길이라고 해석되어야 한다. 바울은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히지만, 그것 때문에 복음 전파가 방해를 받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가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그의 선교의 영향은 한층 더 멀리 확대된다. 그가 갇혔기 때문에 복음이 시위대 안에 퍼졌다. 그리고 바울의 담대함을 본 동료 신자들도 담대하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했다. 바울의 사도적 고난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단이다. 바울은 일부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바울에게 근심을 가져다주려는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바울은 복음이 전파되고 있기 때문에 기뻐했다. 바울의 고난은 복음의 신장을 촉진했다.

 

6.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움

바울이 자신이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다고 말하는 논란은 골로새서 1:24절을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사역이 부적절한 것이었다는 개념, 그리고 바울의 고난은 인간들을 위해 용서를 확보하는 역할을 한다는 개념을 즉시 제거 할 수 있다. 이것은 골로새서의 주요 주제들 중 하나와 반대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만물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화목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골 1:20). 골로새서의 잘못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충만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중재자들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약속했었지만,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신성이 충만이 거하며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고 완전하다고 주장한다(골 2:9-10).

만일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독특함과 능력을 양보하지 않고 있다면, 무엇을 염두에 두고서 그리스도의 고난 안에 부족한 것을 자신이 채운다고 말하는가? 대부분의 학자들은 종말이 되기전에 발생해야 하는 메시아의 비애나 고통에 대한 언급을 감지한다(마 24:3-8 참조). 이 견해는 골로새서의 다른 가르침과 충돌하지 않으므로, 바울의 고난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증가시킨다는 견해보다 훨씬 더 그럴 듯 하다. 이것이 유대교 내에서의 표준적인 주제였으므로, 바울이 비애를 언급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학자들은 여긴다.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문맥에서는 다른 해석이 훨씬 더 그럴 듯하다. 여기에서 바울은 전반적인 재앙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부족한 것을 채우는 자신의 고난을 언급한다(골 1:24). 종말의 접근에 기여하는 다른 “재앙”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며, 또 그 본문은 고난과 종말을 억지로 연결하지도 않는다. 초점은 바울의 고난에 있다.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그의 특별한 사도적 역할을 언급하는 본문이 그러한 고난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에 거하신다는 것이 비밀의 특징이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특별한 명령을 받았으므로, 모든 사람은 종말론적인 완전에 이르게 하기 위해 열심히 수고한다(골 1:28-29).

우리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우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골 1:24-25).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해지며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골 2:2).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데 사용한 수단은 고난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우는 것”은 이방인들의 삶 속에서 복음이 “이루어지기” 위해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부족한 것이란 그러한 고난의 유익이 아직 이방인들 사이에 선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구원사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특권은 바울의 것이다. 바울도 그리스도처럼 자기의 고난을 통해서, 자기의 고난 속에서 메시지를 전한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당연한 결과이다. 바울의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을 반영하며,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사자는 선포되는 사람의 삶을 복제한다.

 

7. 결론

고난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수단이다. 고난은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의 약함을 드러내주며, 듣는 사람에게 지극히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을 가리켜 준다. 약하고 고난 받는 사람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는, 능력이 바울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지적해 준다. 하나님께서 질그릇 안에 자기의 생명을 드러내시므로, 다가올 시대가 악한 이 시대 안에 침투해 있다. 고난은 사자로서의 바울의 성실함을 증명해 준다. 바울의 고난과 그리스도의 고난은 이방인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바울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당연한 결과이다. 하나님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기를 원하셨는데 고난이 방해 된 것이 아니다. 고난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데 사용될 수단이었다. 따라서, 초점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머물며, 선포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포되는 분에게 영광이 돌아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