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한국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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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와 민족주의                                                                                    김세윤교수


1. 기독교 민족주의


우리나라 상황에서 기독교와 민족주의가 어떻게 결합할 수 있었을까? 그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자.


100여 년 전 우리 나라에서 기독교 선교가 시작될 때부터 우리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를 사회와 문화를 개혁하며,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고, 다가오는 제국주의 세력들 - 일본과 중국과 러시아 - 로부터 독립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생각했다. 우리 나라의 전통 종교들 - 유교` 불교`도교`샤머니즘-과 그 전통 종교들이 형성했던 전통 문화를 거부하면서, 우리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속에서 그들 개인을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다. 그리하여 많은 기독교 단체를 조직하고 신문을 발간했으며, 많은 학교와 병원과 사회 봉사 기관을 세우고, 또 그와 같은 조직과 기관을 통해 복음을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를 개혁하고 독립을 이루어 나가자는 운동을 벌였다.


이와 같은 기독교와 민족주의의 결합은 1910년부터 1945년에 이르는 일본의 잔혹한 식민지 점령기간에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독립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전국의 교회와 기독교 학교를 독립 투쟁의 묘판으로 활용했다. 그들에게 강요되는 일본의 신도 숭배와 싸우면서, 우리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세력과의 거룩한 전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한국과 성경의 이스라엘을 동일하게 보고, 자신의 백성에게 신실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기록하게 있는 성경 말씀-출애굽과 바벨론 포로 귀환, 다니엘과 요한계시록 가운데서-으로부터 위로와 힘을 얻었다.


이와 같이 한국과 성경의 이스라엘을 동일시하는 대다수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대중 신학은 공산주의의 박해를 받던 기간을 거쳐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리하여 국가의 복지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국가의 이익을 침해하는 외세에 맞서 싸운다.


1960년대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고 일본 상품을 사지 말자는 데모가 광범위하게 일어난 것과, 오늘날 불공정하게 보이는 미국의 교역 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들이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와 민족주의가 결합한 것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예이다. 기독교 복음이 서양의 제국주의 세력을 통해 전파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의 운명을 보면, 민족주의가 기독교를 반대하는 경향이 있으며 또 제2차 세계대전 이래로 이러한 국가들 내에서 되살아나고 있는 민족주의는 그 곳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체 위기를 일으키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참된 인도인, 태국인, 또는 말레이시아인이 될 수 있는가?'라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문제를 겪지 않았으며, 오히려 복음을 담대하고 확신있게 선포하고 비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복음에 호응하도록 했다. 분명 우리 나라에서 기독교인구가 급속히 성장한 요인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새로운 발전


1960년대 초부터, 박정희 정권은 두 가지 국가적 운동을 전개했다. 하나는 현대화로, 계몽주의 시대 이후로 서양에서 일어났던 과학과 기술과 문화 혁신을 한국에서도 이루고자 하는 시도였다. 또 하나는 자존`자립`자결의 정신을 도모하여, 낮은 자존감으로 말미암아 다른 국가들을 높이 바라보고 그 국가들에 의자하려는 노예 심성을 배제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그러므로 후자는 일본과 중국의 문화는 물론 서양의 문화도 배척하는 문화 민족주의의 성격을 띄었다. 이 운동의 일환으로, 박정희 정권은 한국의 전통 종교를 부흥시키면서, 한국인의 민족적 주체성을 전통 문화의 관점에서 정의할 것을 주창했다. 그러므로, 어떤 점에서는 두 운동의 성격은 상호모순되었다. 그러나 분명히 정책 수립자들은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기술'(東道西技)이라는 표어가 나타내고 있는 사상에 근거하여 일을 했다. 19세기 말의 밀려오는 서양 문명에 직면하여 위와 같은 표어들 만들어 낸 이 사람들은 우리 한국인들이 서양 문명의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측면만을 받아들이면서 우리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전통을 고수해야 하며 또 고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70년대에 현대화라는 이름 아래 서양화 과정이 과학적`기술적 영역은 물론 정신적`도덕적 영역에서도 급속하게 진전됨에 따라, 박 정권은 한국이 그 문화적 유산과 소원해지는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 및 서양화(西洋化)가 민족의 도덕성에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처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박 정권은 전통종교와 문화, 특히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며, 아른을 공경하는 유교 윤리를 부흥시키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이와 같은 운동 뒷면에는 권위주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려는 동기가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비밀이다.


전두환 정권도 현대화(과학적, 기술적, 경제적 발전)와 문화 민족주의(한국의 전통종교의 부흥)라는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1960년대부터 한국에서 새롭게 발전된 이와 같은 현상은 소위 제3세계 이데올로기의 발흥과 일치했으며, 따라서 이 세계적인 추세에 어느 정도 힘입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새로운 문화 민족주의는 한국의 전통 종교에 대해 자존심과 자신감을 갖도록 자극했다. 전통종교는 19세기 말 국가를 파탄지경에 이르도록 하여 많은 지식인들에 의해 위축된 이후 그 영향력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필자는 지금도 여전히 그 영향력이 약화되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 특히 1970년대부터 전통종교가 상당한 정도로 자신감을 찾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자신감을 되찾은 전통 종교들은 지금 기독교를 외국 종교, 서양 종교라고 몰아붙이면서 기독교와 민족주의가 결합한 사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들은 진정한 민족주의는 전통 종교의 관점에서만 정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새로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몇몇 영향력 있는 지식인들은 종종 서양화가 끼친 나쁜 영향을 지적하면서 그 책임을 기독교에 돌린다. 또 한국 교회 내의 바람직하지 돗한 많은 현상들이 위와 같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반박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현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이와 같은 도전에 맞서서 한국의 전통 종교들 - 불교, 유교, 도교-도 다는 나라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냐고 반론을 제기한다. 그와 함께 토착 종교인 샤머니즘의 문제점, 문화 발전의 본질, 그리고 발전에 따르는 민족 정체성의 불가피한 변화, 또 우리 나라에 기독교 선교가 시작된 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이 발휘했던 애국심과 민족주의를 내세운다.


하지만, 한국 정부와 전세계에 걸친 제3세계 이데올로기에 의해 촉진된 문화 민족주의는 서양의 전통신학에 반대하고, 우리의 문화유산을 심각하게 고려하는 '한국 신학'과 '한국 기독교'를 창조하려고 애쓰는 많은 자유주의 그리스도인들을 자극했다. 필자는 이것을 한국에 있어서 또 다른 형태의 기독교 민족주의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형태의 기독교 민족주의는 세계 교회 협의회(WCC)와 강한 유대가 있는 자유주의 교단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기독교 민족주의는 마치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아직도 살고 있는 것처럼 처신했던 몇몇 선교사들과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고전적 표현에만 집착하는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반론에 근거하여 번창하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사람들 역시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국적인 것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보수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서양의 전통신학을 맹종하는 것에 대해 비판받아 마땅하다면, 자유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서양과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을 맹종하고 세계 교회 협의회가 제안한 의제에 따라 움직이는 것에 대해 비판받아 마땅하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민족주의에 근거한 이런 논쟁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바람직한 신학을 판가름하는 표준이 되어야 하는 것은 민족주의가 아니고, 기독교 신앙을 올바르고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신학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 민족주의가 토착화와 상황화를 시도하는 이면에 작용한 동기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Ⅱ. 한국의 전통종교 및 문화와 기독교와의 관계


1. 역사 개관


1) 유학자들간의 카톨릭 운동


개신교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카톨릭이 기독교와 유교를 어떻게 연결하려고 시도했었는가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카톨릭은 18세기 후반 중국의 선교사를을 직접 만났던 유교 학자들을 통해 들어왔다. 1779년 유교 학자 이익(1681-1763)의 제자들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쓴 [천주실의]에 대한 토론회를 절(천진암)에서 비밀리에 가졌다. 국가가 유교를 이념으로 하고 새로운 종교의 도입을 엄격하게 금했기 때문에 그들은 은밀히 토론회에 참석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꽤 많은 유학자들이 카톨릭을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1세기 후의 최초의 개신교 지성인들처럼, 그들은 유교 및 유교가 한국에 초래한 사태에 환멸을 느끼고 카톨릭으로 돌아섰다. 그들은 오직 이 새로운 종교를 통해서만이 민족의 삶에 필요한 개혁을 일으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개혁을 지향하는 유학자들은 기독교와 유교 사이의 많은 유사점을 발견하고 기독교가 유교의 교훈을 성취한 것으로 생각했다. 예를 들자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 신앙을 '상제(上帝)' 또는 '하늘(天)'에 대한 유교의 교훈이 성취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칠대죄악(거만, 탐욕, 정욕, 노여움, 대식, 투기, 나태)'는 자기 절제를 가르치는 유교의 교훈과 일치했으며 또 기독교가 유교의 덕목 특히 '인(仁)'을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카톨릭의 영향을 받은 유학자들 가운데 대가였던 정약용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에 일치하는 윤리를 실천하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유교의 가르침과 비슷하다고 보았으며, 또 '의인'에 대한 기독교의 이상을 '군자'에 대한 유교의 이상과 비슷한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한편으로 기독교(천주교)와 유교간의 유사점을 끌어내면서 그리스도인 유학자들은 기독교를 수용 가능한 종교로 소개하려고 노력했으며, 또 한편으로 기독교가 어떻게 유교의 많은 이상들을 성취하고 있는가를 제시하면서 유교의 단점을 극복하고 유교에 의해 형성된 사회를 개혁할 수있는 수단으로 기독교를 추천하려고 했다. 그들은 초대 교회의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 Martyr)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또는 기독교와 타종교 간의 연속성을 발견하고 기독교를 타종교의 완성으로 천명하였던 현대의 선교사들과도 같았다.


그러나 대다수의 유학자들이 볼 때, 유교와 기독교는 화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득에게 하나님만을 경배하라는 기독교의 주장과 기독교가 유교 효 윤리의 핵심 사상인 조상 숭배 즉 제사(이것은 유교 사회 질서의 근본이다)에 대한 기독교의 거부는 기독교가 유교와는 병존할 수 없으며 또 그리스도인들은 왕도 모르고 부모도 도르는 비윤리적인 야만인이라는 것을 뜻했다. 그리하여, 유교 국가인 조선 왕조는 그리스도인들을 심하게 핍박했으며, 그 결과 1791년부터 공식적으로 기독교 선교가 허락된 1887년에 이르는 1세기 동안 약 십만명의 순교자가 생겼다.


2) 1960년까지의 개신교 그리스도인들


카톨릭 운동이 전개된 1세기 후에, 개신교 선교사들과 그들을 통해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마침내 정부는 외국에 그 문호를 개방하고 기독교 선교 금지령을 철회했다. 조선 왕조가 급속히 해체되면서, 조선 왕조의 국가 이념인 유교도 급속하게 그 영향력을 잃어 갔다.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국가를 파탄에 빠트린 유교를 거부했이며, 또 유교를 대표하던 자들도 자신감을 잃고 말았다. 조선 왕조 동안 유교에 억눌려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교육받지 못한 민중의 종교로만 존재해왔던 불교는, 도교와 샤머니즘과 혼합되어 매우 미신적인 종교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께 회심한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자연히 전통 종교를 좋지 않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생각을 갖게 되는 데는 19세기 말엽 타종교에 대해 '겸손'하거나 상대론적 태도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던 선교사들의 태도가 크게 작용했다. 물론, 전통 종교의 지지자들에게서 반대가 크게 일어났다. 그들의 입장에선 그리스도인들이 제사를 거부한 일은 엄청난 만행이었다. 그리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절대적인 주장과 타종교에 대한 비타협적인 태도를 가진 기독교는 절망적인 민중과, 전통 종교에 환멸을 느낀 진보적인 지식인들 사이에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유교는 더 이상 기독교의 보급을 저지할 만한 국가 권력을 갖고 있지 못했으며, 불교는 물론 유교를 대표하는 자들도 기독교와 관계가 있는 서양문명의 위력에 압도되어 지적인 수준에서 기독교를 공격할 만큼 강한 힘이 없었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진리를 절대적으로 주장하고 타종교를 간단히 거부하는 것는 우리 나라 그리스도인들이 전통종교에 대해 갖는 지배적인 태도가 되었다. 그렇지만, 자신들이 새로 발견한 신앙과 이전에 갖고 있던 종교간의 관계를 지적으로 탐구해 보려는 그리스도인들이 몇몇 있었다.


그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최병현이다. 그는 30대에 그리스도께 회심할 때까지는 유학자였다. 그는 자신의 소설 [성산명경](聖山明鏡,1912)과 논문 "만종일변"(萬宗一變,1922)에서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접촉점을 논하고, 유교와 불교에서 부족한 것을 지적하고, 기독교의 가르침과 유사한 유교와 불교의 가르침 가운데 부족하고 잘못된 점을 설명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한 것들이 완성되었음을 밝혔다. 최병헌은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종교의 완성이라고 주장했다. 타종교는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도록 준비시키는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상 타종교에 머물러 있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런 주장을 편 최병헌은 다음과 같이 논문의 결론을 내렸다. "만일 공자가 그리스도의 진리를 알았더라면 그는 분명히 그것을 믿었을 것이다. 만약 싯달타가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기독교의 미덕을 알았더라면 그는 금욕을 하느라고 6년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3) 기독교를 토착화하려는 시도


보수주의 신학자들과 대부분의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기독교의 진리를 절대적으로 주장하고 전통 종교들은 거부하는 태도를 최하고 있지만, 1960년대 이후로 몇몇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기독교를 한국에 토착화시키려는 시도들을 해왔다. 그들은 한국인들이 선교사들에게서 받은 신앙 형태와 한국 신학자들이 훈련받은 신학이 서양 문화의 영향-그리이스 철학, 로마 법률학, 게르만의 내성, 영미(英美) 청교도주의 등-을 받고 있음을 알았다. 그들은 또한 복음을 올바르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기독교의 메세지를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개념과 범주로 번역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이와 같이 기독교의 토착화를 시도하면서, 필자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은 우리 나라에서 부활하고 있는 문화 민족주의와 전세계에서 일고 있는 제3세계 이데올로기의 자극을 받았다.


토착화 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세 명의 감리교 신학자들이 있었다. 윤성범(1916-1980)은 올바른 한국 신학의 수립은 기독교 신학의 역사적 전통과 한국 고유의 문화사적 전통과의 결합(또는 변증법적 통일)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1963년 발간한 글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단군 신화의 관점에서 해석했으며, 1971년 [한국 신학-성(誠)의 해석학]이라는 책도 내놓았다. 이 책에서 그는 유교의 '성(誠)'의 개념으로 신학 전체를 재해석하고 재진술하려고 시도했다. 또 샤머니즘을 우리 나라 종교성과 문화의 가장 근본으로 보는 유동식은, 기독교를 샤머니즘과 통합시키려고 애를 썼다. 또 변선환은 기독교와 불교를 통합시키려고 노력했다.


2. 타종교의 대표자들과의 대화


기독교를 토착화하려는 이러한 시도들은 타종교와의 대화의 한 형태이다. 그래서 토착화를 시도하는 신학자들은 타종교의 대표자들과 대화를 시작했다. 물론 일상 생활 가운데서 일반 그리스도인들과 타종교인들 간의 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대화들 말고 기독교 신학자들과 전통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조직적인 대화는 거의 없었다.


그동안 대화가 없었던 것은 우리 나라의 독특한 상황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최근까지 전통 종교들의 대표자들이 기독교에 도전할 만큼의 자신감을 갖고 있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 신학자들이 타종교의 대표자들과 대화할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보수적인 대다수의 신학자들은 기독교 진리의 절대성을 주장하면서, 세계의 어떤 다른 지역에선 기독교 선포에 대한 대안으로까지 간주되고 있었던 타종교와의 대화를 거부했다. 몇몇 아시아 국가들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소수인데 비해 비기독교 인구가 엄청난 것에 눌리거나 또 그들 국가의 비기독교 종교(힌두교, 불교 또는 이슬람교)의 전체주의적 태도에 압도되어 패배주의적 태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 세대에 온 나라를 복음화하려는 운동을 벌이는 그 자신만만함은 너무 지나친 승리주의가 아닌가 우려할 정도였다.


기독교 민족주의의 후계자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적 요구(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의 경우를 보면, 이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어떤 식으로든 기독교와 그들의 민족종교를 화해시키는 방법을 모색하게끔 만든다)간의 갈등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또 제국주의에 대해 서양이 지니고 있는 죄책감이나 '기독교' 문명에 대한 서양의 자신감 상실 같은 것을 갖지 않아도 되었다. 이와 같은 이유들로 인해서, 우리는 적어도 당분간은 타종교인에 대해 대화보다는 복음을 직접적으로 선포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


3. 복음이 들어오기 전의 한국사와, 문화와 종교를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


하지만, 보수주의적인 신학자들에게까지도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 민족, 곧 자기들의 조상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느냐가 문제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몇몇 신학자들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와 종교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해석하려고 진지하게 모색했다. 대체로 전통적인 카톨릭의 신학자들은 자연 계시와 자연 신학의 범주를 사용해서, 역사와 문화와 종교에 상대적으로 더욱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반면에 보수주의 개신교 신학자들(예를 들자면, 이만열 같은)은 일반 계시와 일반 은총의 범주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반응의 변증법 가운데 상대적으로 인간의 반역을 더 크게 강조한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몇몇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와 같은 전통적 방법을 거부하고 '우주적 그리스도', '온 우주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 '익명의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의 선교' 같은 개념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런 개념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한국 역사 전체를 통해 한국의 전통 종교들과 문화 속에서 '우주적 그리스도' 또는 그의 영을 통해 스스로를 계시하시고 구원 계획을 이루어 오셨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이와 같이 널리 유행하고 있는 신학 개념과 관련된 복잡한 신학적 문제를 일일이 검토할 수는 없다. 다만 보수주의 신학자들이 한국 역사 속에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또한 변증법에 있어 인간의 반역이라는 측면에 대해 현실적인 이해를 가져야 한다. 물론 기독교 신학을 토착화하는 일에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다. 그러면 이제 토착화 문제를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Ⅲ. 기독교의 토착화 성공


1. 정의


기독교의 '토착화'란 기독교 신학, 기독교의 예배 의식 및 경건 관례, 기독교 제도 등을 각 인종 집단이나 문화 집단의 전통적인 사고 방식이나 문화 형태로 표현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 시도는 기독교 진리의 이래를 촉진하고 가능한 한 선교지 원주민들, 즉 '기독교 세계' 밖에 있는 자들에게 기독교를 알맞게 만드는 것이다. 몇몇 선교학자들은 1970년대 초부터 '토착화' 프로그램이 전제하고 있는 정적인 문화관에 불만을 느끼고, 복음을 노늘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겪는 실제적인 문제들에 관련시키려고 '상황화'라는 더욱 적극적이고 광범위한 프로그램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래서 예를 들어 '상황화'란 한국민의 문화적 문제는 물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제에 답하여 기독교 신앙을 한국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한국적인 용어로 재진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황화'란 기독교를 각 인종, 문화 또는 사회 집단의 특수한 상황에 적합하게 하려는 시도이다. 우리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측면의 상황화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여기서는 종교적 문화적 측면의 상황화에 대해서만 살펴보겠다. 상황화가 현 문화에 더 민감하고 토착화는 전통 문화에 민감하긴 하지만, 이 종교적 문화적 측면에서의 상황화는 과거의 토착화 프로그램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다.


2. 필요성

피전달자들에게 기독교 신앙이 이해하기 쉽고, 적절하며, 또 그들의 관심사와 소원과 문제에 대해 답하도록 만들어져야 하며 또 그것들을 효과적으로 답해야 한다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와 같은 것은 상황화 또는 토착화의 근본적인 전제를 이루는 것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국가들에 전달된 역사적 신학적 공식들이 서양의 문화 전통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또 때때로 이와 같이 기독교 신앙이 서양 문화의 영향을 받음으로 인해 아프리카인과 아시아인들에게 복음이 이상하게 비치며 복음의 참됨과 적절성이 체대로 이해되지 못한다는 것이 상황화를 필요로 하는 또 다른 전제들이다. 서양의 신학 전통을 형성해 온 서양의 문화 전통(헬라, 라틴, 게르만의 철학적, 법적, 정신적 전통)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문화 전통와 마찬가지로 상대적이기 때문에,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신학자들은 문화 전통이 제공하는 사고 방식으로 복음을 표현하고, 국민들에게 뜻이 통하는 개념과 범주를 통해 성경 계시를 재해석하고, 그리하여 각 긴종 또는 문화 집단의 기독교나 신학을 (예를 들자면 한국 기독교 또는 한국 신학) 개발하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으면 않된다.


필자가 아는 한, 상황화 프로그램은 정당하다. 사실 상황화란 이른바 선교지뿐 아니라 어느 곳에서나 어느 세대에나 일어나고, 또 일어나야 하는 해석학적 프로그램이다. 시대에 뒤진 화석화된 신학에 만족을 느끼는 일부 근본주의자들만이 상황화를 거부할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근본주의자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그라나 자신들에게 '말'하고 자신들의 문제에 응답하는 '산' 신학을 바라는 사람들은 누구나가 다 상황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오로지 상황화를 어느 정도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일 뿐이다.


실제로 토착화나 상황화란 말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서양에서는 기독교 역사 내내 일어났던 일이며, 또 의식했든지 의식하지 않았든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기독교 선교가 시작되던 날부터 있었던 일이기도 하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토착화나 상황화 프로그램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지 간에, 그 사람은 불가피하게 그 과정에 끼어들게 된다. 그 사람은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과정으로는 아니더라도 '자발적이거나 자연적인' 토착화 또는 상황화 과정에 연루된다.



3. 자발적 또는 자연적 토착화 과정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표현하려고 노력할 때 문화유산과 관계시키려고 의식적이고 조직적으로 시도하지 않은데도, 일어나는 토착화 과정을 일컫는 것이다. 이 '자발적' 과정은 세 가지 수준으로 진행된다.


1) 성경과 서양 신학서를 번역하는 수준에서 생겨나는 자발적 과정


문자 그대로 번역을 한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종교적 문화적 전통에 의해 형성된 개념과 점주를 불가피하게 포함하게 된다. 성경과 서양 신학을 번역할 때, 예를 'God', 'Spirit', 'word','salvation','justification','eternal life'에 상응하는 우리말 용어는 불가피하게 우리의 전통적인 문화와 종교의 상황에서 얻은 함축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들 용어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교도적 함축 의미들을 제거하고 독특한 기독교적 의미만을 나타내려고 신학자들이 애를 써도 일반 평신도들에게 큰 성공을 거두기는 어렵다.


2) 기독교 경건과 행습의 수준에서 진행되는 자발적 과정


토착화 과정은 이 수준에서 많이 일어난다. 어떤 점에서는 실제로 너무나도 많이 일어나서 의식 있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실질적인 혼합주의의 유령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염려하게 하고, 이 과정의 추후 진행을 억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할 정도이다. 이 경건고 행습의 수준에서 진행된 토착화 과정의 결과로 나타난 우리 나라 기독교의 특징을 몇 가지 간추려 살펴보기로 하자


a) 유교의 계급주의


'교회'(敎會)라 함은 말 그대로 '가르치느 葅모임' 또는 '교리를 전수받는 연합회'라는 뜻이다. 이처럼 교회란 말은 가르침을 강조하는 유교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한국에서 교역자는 '목사'라고 하는데, 이 말 또한 교사를 존경하는 유교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목사오 장로와 집사와 평신도 간의 관계를 친교보다도 계급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것 역시 유교의 계급제도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개신교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목사들이 점점 더 권위적이고 지배적이 되어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들은 학생들을 엄하게 다스리는 유학자들의 권위주의를 연상하게 하고, 또 다른 한편 중세 카톨릭 교회의 사제주의를 연상하게 할 정도이다.


b) 샤머니즘적인 열심과 샤머니즘적인 복(福) 이해


전통 종교들 가운데서도, 샤머니즘이 기독교에 가장 튼 영향력을 행사해 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샤머니즘은 한국의 토착 종교로, 한국인의 의식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국외에서 들어온 불교 같은 종교는 지난 1500년 동안 샤머니즘의 영향 아래 토착화되어 버렸다. 대부분의 기독교 학자들은, 샤머니즘의 영향이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열심과 '복(福)'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샤머니즘은 악령들, 주로 노한 조상의 혼들을 무당의 중재로 달램으로써 복을 얻는다는 생각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를 위해 무당은 성대한 굿을 집행한다. 굿을 드리면서 무당(대부분 여자)은 무아지경에 들어가며, 가무와 그 굿을 드리는 가족을 해치거나 해치겠다고 위협하는 혼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그 혼을 달랜다. 무당은 그 가족들에게 자신의 무아지경에 들어와 자신고 함께 노래를 부르고 츰을 추라고 권하면서 그들과 그들을 위협하는 혼 간의 대화를 중재한다. 샤머니즘은 철처하게 세속적이다. 현세에서 성공하고 재산을 얻는 것만을 그 목표로 한鑁. 그러므로 샤머니즘은 어떤 윤리적인 가르침도 갖고 있지 않다.


많은 학자들은 우리 나라 그리스도인들이 주정주의와 종교적 열광 그리고 때때로 신비주의로까지 빠지는 경향이 있는 것은 한 혼에 사로잡힌 의식 상태에서 오는 황홀경 또는 무아지경을 강조하는 전통이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에서 최근에 일고 있는 성령 운동의 부흥도 이와 같은 경향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의식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한국교회 내에 만연하고 있는 기복 사상에 깊은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다. 의심할 것도 없이 전세계에 걸친 현시대의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시대정신이 이러한 경향을 부채질했다. 또 특히 적극적인 사고의 위력 및 그와 유사한 다른 물질적 기복 교리를 전하는 미국의 몇몇 기독교 설교자들의 영향도 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현세에서 물질적인 성공고 번영을 바라게 하는 3천 년 전통의 샤머니즘이다. 샤머니즘의 영햐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목사를 축복의 중재자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든가, 또는 많은 목사들이 그 회중에게 물질적인 복을 빌어 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다. 또 샤머니즘의 영향은, 교회에 돈이나 물건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하는 사업을 통해 몇 배로 보상해 주실 것이라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대하고 있는 것이라든가, 100일 금식기도를 뜨겁게 하면 하나님께서 감동하셔서 그들이나 그들의 가족의 병을 고쳐 주시고 물질적으로 성공하도록 해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는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우리 나라의 의식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의 삶과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교훈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 그것은 유감스럽게도 열심 있는 전도, 기도, 헌금생활과는 모순된 것이다 - 윤리 부재의 종교인 샤머니즘의 영향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c) 열심과 인내


많은 외국인은 한국인의 열심, 추진력, 근면, 강인한 성품 및 인내를 보고는 찬탄해 마지 않는다. 이러한 특성들은 지난 3,000년 역사를 통해 겪은 엄청나게 힘든 삶의 조건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중국의 주변 또는 중국과 일본 사이의 반도에 있는 한국인들은 중국, 몽고, 만주, 일본 등 외세들의 침략에 맞서 줄곧 싸워야만 했다. 몇몇 역사가들은 한국이 한 민족으로 살아 남은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국민의 삶을 극히 어렵게 만든 것은 괴국의 침략만이 아니었다. 우리 국민은 또 수세기 동안 국내 통치자들의 억압과 착취를 당해야만 했다. 20세기에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 국가 분단, 공산주의의 억압, 한국전쟁 및 여러 악독한 독재 정권의 억압을 당했다. 또 한국의 천연 자원의 빈약과 길고 추운 겨울도 한국에서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어려운 조건 아래서 살아 남기 위해서, 한국인들은 이와 같은 특성들을 계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와 같은 특성들은 우리 나라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성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미 전세계에 날리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우리의 전도열에 대해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현재 널리 유행하고 있는 "우리 세대에 온 민족을 복음화하자"는 표어와 "한국인 선교사들을 통해 전세계를 복음화하자"는 표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전도열고 의욕을 매우 잘 나타낸다.


또 우리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열심히 일한다. 목사는 보통 일 주일에 적어도 열한 번을 설교한다. 일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새벽 기도 모임에서 일곱번, 또 일요일에 두번, 수요일 저녁 예배 때 한 번, 금요일 구역 모임 때 한 번 설교한다. 적어도 1년에 두 번은 모든 교우의 집을 심방한다. 그리고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잡다한 다른 일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목사들만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평신도들, 장로와 집사들 역시 전다오 심방과 사회 봉사활동 등을 매우 열심히 한다. 이젓이 바로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나라의 교회들은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우리 나라 그리스도인들은 반기독교 세력과 싸우는 데도 끈질기며 극한적인 역경도 잘 이겨낸다. 1780년부터 1880년에 이르는 동안 순교한 10,000명의 카톨릭 신자들과 일제 치하와 공산주의 박해 동안 순교한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이를 잘 입증한다.


어떤 이는 우리 나라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의 핵심을 열심과 인내라고 규정한다.필자는 그의 생각이 옳다고 본다. 열심과 인내는 우리 나라 그리스도인들의 경건과 신학의 특징이다. 그래서 때때로 이와 같은 열심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성경의 진리를 삼켜 버리지 않을까 우려할 정도이다.


d) 불교의 염세관과 타계관


불교는 염세 사상이 두드러진 종교이다. 일제(日帝)의 가공할 박해로 절망 가운데 처한 1930년대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해 비관하면서 도피적이고 타계적인 태도를 갖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그 당시의 많은 미국인 선교사들이 퍼뜨린 전천년설과 함께 불교가 큰 역할을 했다.


오늘날까지도 오랜 세월에 걸쳐 고는을 받아온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과 같은 태도를 계속 갖고 있마오 볼 수 있다. 이같은 태도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이 세상에서 물질적인 복을 추구한다거나 그리스도를 위해 갖는 열심과는 분명히 상반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것이 실제로 상반된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은 종교적 헌신을 통해 이 세상에서 물질적인 복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내세에 대한 소망으로 오늘의 힘겨운 삶을 인내하며 이끌어 간다. 그러나 그들이 지니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종교적 헌신이나 내세에 대한 소망이, 기독교 종말론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하거나 현세에서 세상을 변혁시키는 주의 일에 참여하도록 만들지는 못했다.


필자는 이 세상의 물질주의와 타계잭인 염세주의가 이와 같이 교묘하게 혼합된 모습이 오늘날 한국의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경건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민족의 삶을 변혁시키고자 하는 원대한 비전을 갖고 일했던 선조들의 예언자적인 열심을 잃어버렸다는 지적을 받는다.


e) 분열과 교파주의


한국 교회의 가장 큰 약점은 고질적인 분열 현상이다. 현재 70여 개의 개신교 교단이 있는데, 그 중 22개가 장로교단이다. 또 63개 교단 가운데 39개가 '대한 예수교 장로교회'란 이름을 내걸고 있지만 다 별개의 교단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통계(1986년 기준)는 한국 교회가 얼마나 갈라졌는지를 잘 드러낸다. 그 중에서도 한국 교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장로교회가 가장 심하게 분열을 해왔다.


물론 이처럼 분열을 자주 하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다. 서로 다른 교단 선교부 출신의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에 자신들의 교단을 세우려고 경쟁한 것이나,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간의 신학적 갈등, 일본의 교회 탄압과 신사 참배 강요,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KNCC)를 구성하고 세계 교회 협의회(WCC)에 가입하는 문제, 한국인들의 강한 지방주의와 파벌주의, 교단 인사들의 노골적인 세력 다툼 등 여러 요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열을 하게 된 실제 문제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언제나 그 문제 이면에는 자주 지적된 바대로,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내려온 유교잭인 학문 토론 전통, 이설을 허용하지 않는 엄격한 정통 집착증, 파벌주의가 작용해 왔다. 유교의 계급 제도에서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이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목표이다. 이 전통은 많은 교단 인사들의 매우 꼴사나운 교회 정치 형태와 그들이 나타내고 있는 파벌성과 지방성 및 분열성 가운데 잘 드러나고 있다. 이와 같은 문화 유산이 지속되는 한, 기독교의 연합 운동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억으며 또 교단간의 협력도 교단주의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가 없다.


f) 기곡교의 집단성


필자는 우리 나라에새 '개인'과 개인주의 개념을 발전시킨 것이 기독교가 한국 문화에 기여한 것들 중 하나라고 논한 바 있다. 하지만, 한국의 기독교는 아직도 개인적 특성보다는 한국의 문화 유산인 집단적 특성을 더 나타내고 있다. 세계적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새벽 기도 모임'이 그 좋은 예이다. 수세기 동안 개인이 독자적으로 결정을 내리기 보다는 집단의 결정에 따라 움직이는 한 집단(가족, 지역, 학교, 직장)의 구성원들로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방에서 혼자 조용히 주님과 만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새벽 동이 트기 전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교회에 모여 기도하는 것이 훨씬 더 편안하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주의와 집단적인 친교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런데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아직도 신앙의 개인주의가 부족한 것 같다. 그래서 교회에는 열심히 출석하면서도 개인적인 확신이 부족한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들은 그들이 처한 개인적인 생활 환경에서보다 집단적으로 모인 교회 집회에새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훨씬 더 잘 나타낸다. 그 까닭에 그들이 처한 생활 환경에서 기독교의 윤리적 원리를 적용하는 삶이, 그들이 그리스도인 모임에서 나타내는 열심과 열정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g) 율법주의와 형식주의


끝으로, 우리 나라 그리스도인들의 보수주의, 율법주의적이고 형식주의적인인 경향, 외형의 강조 등을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 한국인의 시각


현대화된 서양에 비하면 우리 나라는 아직도 전통적인 사회의 모습과 종교성을 더 많이 보존하고 있다. 또 성경에 반영된 유대의 전통 사회와 종교성과, 한국의 전통 사회와 종교성 간에는 비슷한 것이 많이 있다. 예를 들자면 가족, 집단주의, 제사 등이다. 그러므로 때때로 한국인들은(이 점에 있어서는 다른 아시아인들이나 아프리카인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성경 본문들을 서양인들보다 더 직관적으로 이해하며 그 진의를 헤아릴 수도 있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서양인들이 불완전하게 이해했거나 또는 잘못 이해한 성경의 어떤 진리를 발견하고 표현할 수가 있다(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가 있다 : 때때로 성경의 어떤 진리들은 서양의 관점에서 볼 때 더 분명히 이해될 수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의 전통 문화에 의해 형성된 한국인의 시각은 서양인과는 다소 다른 신학을 낳을 수가 있다. 필자는 이것을 기독교 신학의 '자발적' 토착화 과정이라고 부른다.


필자의 경험을 예로 들어 이 점을 설명해 보겠다. 필자가 두 번째 책 The 'Son of Man' as the Son of God을 출간했을 때, 몇몇 서양 친구들은 아시아 사람만이 그과 같은 책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들은 그 책에 맘겨진 총체적 시각(the holestic perspextive)을 두고 한 말이었다. 왜냐하면 그책에서 필자는 여러 종류의 '그 사람의 아들'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의 조화되고 탕합된 덩어리로 해석하려고 시도했을 뿐만아니라,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의 여러 측면들 - 예수님의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말씀, 하나님을 '압바(abba)'라고 부르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 메시아로서의 자기 이해, 그의 죽으심 등 -의 상호 관련성과 또 예수님의 부활 이후 초대 교회의 케리스마와 예수님의 가르침 및 삶과의 상호 관련성을 밝히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필자의 친구들은 서양의 성경 신학자들이 사물을 하나의 조화된 덩어리로 보지 못하고 극단적으로 분석하는 경향만을 띤다고 한탄했다 : 쪼개고, 쪼개고 또 쪼개라! 신약을 연구하면서 필자는 서양에서 발전된 논리를 갖고 주장을 펼쳐 나간다. 그러나 필자는 '동양적'이거나 '한국적'인 시각을 의식적으로 나타내려고 애쓰거나, 토착화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신약을 해석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필자가 지니고 있는 한국적인 시각이 필자의 신학에 불가피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 기독교를 타착화시켜야겠다는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시도를 하지 않을지라도, 위와 같은 세 가지 수준에서 일어나는 자발적인 토착화 과정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한국에 독특한 성격의 기독교를 낳게 한다. 그것은 독일, 화란, 영국, 미국, 중국 또는 일본 기독교와 각각 비교할 수 있는 독특한 민족적 성격을 지닌 '한국 기독교'가 될 것이다.


4.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토착화 시도 (Programmatic indigenization)

1) 하나의 예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필자가 '자발적'인 토착화라고 일컫는 다소 느리고, 소극적인 과정에 만족치 않는다. 필자는 앞에서 세 명의 감리교 신학자들 - 윤성범, 유동식, 변선환 - 이 각각 한국의 유교와 샤머니즘과 불교전통의 관점에서 기독교 신앙을 재해석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 대해 말했다. 이 세 사람 중에, 윤성범이 시도한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가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제 윤성범의 예를 들어 그들이 생각하는 토착화란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보겠다.


스위스의 바젤 대학에서 오스카 쿨만과 칼 바르트 밑에서 공부를 한 윤성범 박사는 자신이 창안한 '한국 신학'을 '성(誠)의 해석학'이라고 부른다. '성'(誠)이란 '성실'이라는 뜻을 가진 유교 개념이다. 유교의 고전작품에서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그러나 윤성범은 성이란 개념은 한국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율곡(1536-1584)는 16세기에 성이란 개념을 사상과 삶의 주된 개념으로 삼았으며, 또 한국 역사에 빛나는 위대한 영웅들 중 하나인 이순신 장군은 성 개념을 그의 삶과 행위의 주된 원리로 삼고자 했으며, 또 한국인들이 성에 매우 많은 가치를 연관시키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유교 경전인 중용은 "'성(誠)'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다. '성(誠)'은 만물의 시작이요 끝이다."라고 한다. 또 이율곡은 "'성(誠)'이 없으면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다 '성(誠)'이 없는 사람은 주인 없는 집과 같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말들을 통해, 윤성범은 '성(誠)'과 하나님을 동일시하거나 '성(誠)'을 하나님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맹자는 "'성(誠)'은 하늘의 도(道)요, '성(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말했다. 윤성범은 이 말은 '성(誠)'을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힘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으로 풀이한다. 게다가 '성'을 표현하는 한자는 두 단어가 결합한 것이다. 말씀 언(言)과 이룰 성(成)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윤성범은 '성(誠)'은 '말씀의 실현', '성취된 말씀' 또는 '참 말씀'을 뜻하는 것이며, 따라서 '성(誠)'을 '계시', '성육신'("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와 같은 성경의 개념이나 예수님이 이루신 모든 일의 성취("다 이루었다"는 어 19:30의 말씀)를 뜻하는 말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誠)'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만물의 존재율이며 또한 하늘과 땅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인식률이다.


이와 같이, 윤성범은 기독교 신앙을 '성(誠)'이라는 범주를 갖고 재해석하려고 시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그는 종종 '존재', '본질', '성품'과 같은 서양의 범주들이 한국인들에게 생소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신학과 기독론을 정립하는 데도 부적합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토착화 시도는 어느 정도 지속될 수 있는가? 아래에서 그와 같은 시도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들을 논하겠다.


2) 본질과 형태를 구분하는 문제


기독교 신학을 조직적으로 토착화하는 프로그램을 주창하는 자들은 보통 복음의 '본질'과 선포되는 복음이 입는 문화의 '형태'를 구분한다. 서양 신학(또는 성경신학도 마찬가지이지만)의 형태는 하나의 역사적 우연에 속하는 것이며 따라서 상대적이기 때문에, 그 형태는 벗겨질 수 있으며 그리하여 재발견된 복음의 '본질'은 예를 들자면 한국의 전통 문화가 제공하는 '형태'로 다시 옷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본질'과 '형태'를 간단히 구분할 수만 있다면, 토착화는 그렇게 어려운 과제가 아니다. 그蒡러나 뫼근에 진행되고 있는 해석학에 관한 논의가 보여 주는 것처럼 본질과 형태를 위와 같이 간단하게 구분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신약에 나타난 신화적 외관 또는 1세기의 세계관을 벗겨 내어 복음의 '본질'을 재발견하고 그것을 20세기 세계관의 시각에서 재천명해 보려는 불트만의 시도(즉, 상황화)가 신학을 인간학으로, 기독론을 구원론의 하나의 기능으로, 그리고 구원론을 인간의 진정한 자기 이해의 문제로 축소시켜 버리는 결과를 낳고 만 것처럼, 신약에서 복음이 입고 나타나는 '형태' - 개념들과 범주들 - 를 벗길 때 복음의 '본질' 또한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게 된다.




3) 적합한 형태를 선택하는 문제

우리가 신약에서 기독론적인 또는 구원론적인 진술의 '형태'와 그것을 통해 선포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구분할 수 있다 할지라도, 본질적인 메세지에 입혀야 할 올바른 옷('형태') - 즉 올바른 개념이나 범주 - 을 우리의 문화적 상황에서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유교, 샤머니즘, 불교 밈 도교 중 어떤 형태가 가장 적합할 것인가? 우리가 이와 같이 다른 종교 전통들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한다 할지라도, 어떻게 유교, 불교, 도교 및 샤머니즘의 본래의(전체주의적인) 체계에서 한 개념이나 범주를 뽑아낼 수 있단 말인가? 어떻기 그 가운데서 기독교 메세지와 연속성이 있는 것은 간직하고 연속성이 없는 것은 제거해 바릴 수가 있는가?


한국과 다른 나라에서 토착화를 주창하는 이들을 보면, 타종교들이 전체주의적 또는 똘똘 뭉쳐진 한 덩어리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 따라서 어떤 종교에 의해 발달된 한 개념이나 범주를 이용하고자 할 때 그것의 함죽 의미들이 따라오기 쉽다는 사실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반 계시와 인간의 반응 간의 변증법의 부정적인 측면이 각 개념이나 범주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도 마땅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개념과 범주를 선택하는 데, 그리고 그것들에 기독교적 의미를 채우기 전에 받아들일 수 없는 이교도적 요소들을 제거하는 데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어떤 전통 종교와 문화라도 언제나 성경 계시를 번역하기에 유용한 개념과 범주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는 성경의 개념과 범주를 나타낼 수 있는 새鱁로운 용어를 만들어야 할 것이며, 또 사람들은 그 의미를 새롭게 배워야만 할 것이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는, 성경의 용어들을 문자 그대로 번역함으로써 새로운 용어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몇몇 신학자들은 이것을 거부하고, 그들이 일컫는 바, '역동적 동의어'(Dynamical equivalence)를 새로 개발해 내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자면, 유동식은 한국인의 인생관의 본질은 '한, 멋, 삶'이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한'은 '하나, 하나됨, 큼, 중앙, 올바름, 하늘, 하나님' 등을 의미하고, '멋'은 '아름다움, 초화, 자연스러움, 자유, 무아지경' 등을, 그리고 '삶'은 '인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유동식은 한국인들이 한국 역사 내내 이 세 가지 가치를 추구해 왔으며, 또 이 세 가지는 뗄래야 뗄 수 없을 정도로 서로 관련되어 있어, 실로 독립적인 성격을 지니뎐서 동시에 서로에 내재해 있다고 본다. 그리하여 유동식은 이 세가지 개념 및 그것들이 이루고 있는 전체가 한국판 삼위일체 교리가 되어야 하며 따라서 한국인들은 서양의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이 아니라 이 한국판의 '한, 멋, 삶'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로 그는 한국인들이 선천적으로 '한, 멋, 삶'에 대한 이해를 갖고 또 그것을 추구해 왔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배울 필요가 전혀 없다고까지 말한다. 이런 식의 주장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근거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여기에서 필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몇몇 '토착화' 시도가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과 같은 것이 기독교 신앙을 '토착화'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할지라도 - 필자는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 그것이 성경이 계시돤 하나님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할 수 있륖는지 반문해 보아야 한다.


4) 전세계적인 서양화


사도들의 설교가 서양의 현대적 세계관에 비추어 재해석되어야 할 필교가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서양에 있는 것처럼 아시아에도 사도들의 설교가 토착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학자들이 더러 있다. 그렇지만 대체적으로 토착화를 주창하는 사람들은 사도들의 설교 형태보다 사도 시대 이후 발전한 서양 신학 형태에 더 반대를 한다. 구약과 유대교에서 주로 끌어 온 개념과 범주를 통해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이, 사도 이후 시대에 와서는 헬라 철학과 논리와 법률 등에 의해 제공된 사고 형태로 헬라적인 관점에서 많이 재해석된 것은 사실이다. 그리하여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니케아나 칼케돈의 신앙고백이 어느 정도까지 사도들의 설교를 정당하게 발전시킨 것이며 또 어느 정도까지 사도들의 설교를 부당하게 헬라화한 것인지가 중요한 토론거리였다. 물론 종교개혁 시대 그리고 그 이후에 형성된 신앙 고백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문제를 제기할 수가 있다. 우리가 그와 갈은 문제들을 주의깊게 연구해 보면 위와 같은 상황화를 위한 시도에 중요한 모범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부당한 상황화에 대한 경고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때때로 사도들의 설교를 새롭고 빠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기독교의 신학 전통을 비헬라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문제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최준에 성경 해석에 역사비평 방법을 적용한 것은 이 점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펴으로 기독교 신학을 비헬라화하거나 탈서양화할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즉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들은 약 1900년이나 된 서양의 신학 전통을 무시하고 곧바로 성경의 계시와 대면할 수 가 있겠는가? '아시아' 또는 '한국'의 신학을 형성하기 위하여 기독교 신앙을 한국에 토착화하는 일에 매우 열심인 이들까지도 그들이 서양에서 형성된 복음 선포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또 서양 신학을 공부했다는 점에서 서양 신학의 계승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 신학 역시 유교나 불교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종교적, 문화적 유산의 일부다.! 그렇다면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유산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는가? 토착화를 주장하는 신학자들조차도 그들의 한국 문화 전통 뿐만 아니라,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서양의 신학 전통에 의해 형성된 시각에서 성경을 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모든 생활 영역에 편만한 서양의 영향이다. 1세기 이상을 현대화의 이름으로 서양 문화가 한국의 모든 생활 영역에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왔다. 그리하여, 오늘날 한국인들은 서양식의 교육을 받으며 서양의 논리와 개념과 범주들을 사용한다. 사회 조직과 단체들이 서양의 포본을 따라 결성되며, 서양의 규칙에 의거해 운영된다. 음악, 미술, 건축, 의상, 각종 기구 등이 모두 서양의 것이다. 정말로, 생활 방식 전부가 서양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사고 및 생활 양식과 새로운 서양식 사고 및 생활 방식이 오늘날 한국에서 종종 긴장상태로, 혼합되어 공존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기독교 신앙을 토착화하여 기독교 신앙을 한국인들이 더 잘 이해하도록 만든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서양 신학의 서양식 논리 전개와 개념과 범주를 단순히 거부해 버리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인가?


5) 정적(靜的)인 문화관과 퇴보의 문제


위의 질문은 또한 조직적인 토착화 프로그램을 주창하는 이들이 일반적으로 전통 문화는 항상 정적인 채로 있다는 가정 위에서 일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과 또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서양 문화가 유입되어 일어난 문화 변동 이전의 전통 문화에서 유행하던 개념과 범주들을 활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뚜렸이 보여 준다. 그러나 물론 문화가 정적이라는 견해는 전적으로 비현실적이다. 오늘날의 한국인의 사고 및 생활 방식은 약 400년 전에 이퇴계나 이율곡이 살아 있을 당시 유교철학이 전성기일 때 통용되던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러므로, 이율곡의 철학에서 끌어온 범주를 수단으로 하여 기독교를 타착화하려는 시도는 순수한 '토착화'나 '상황화'가 아니다. 필자가 앞에서 이율곡의 '성(誠)'개념으로 토착화한 윤성범의 '한국 신학'을 간단히 요약했을 때, 독자들은 당황했을 것이다.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오늘날 한국의 식자층들도 마찬가지로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같은 현대의 한국인들에게 유교 철학의 '성(誠)' 개념은 헬라 존재론의 '실체', '본질', '인격'고 마찬가지로 낯설고 어렵다는 것이며, 따라서 윤성범의 '성(誠)'의 '한국 신학'은 헬라 존재론의 용어로 형성된 서양 신학만큼이나 낯설고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윤성범의 '성(誠)'의 신학은 토착화가 목적하는 바를 전혀 이루지 못하고, 낯설고 어려운 신학을 또 다른 하나의 낯설고 어려운 신학으로 대치하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 비록 후자가 자기 나라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6) '토작화' 문제를 극복하려는 시도인 '상황화'


위에서 언급한 것이 바로 '토찬화'가 지닌 문제들 가운데 하나로서 신학자들로 하여금 '상황화'의 필요성을 깨닫게 한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전통 문화의 관점에서 재진술하기 보다는, 어떤 일정한 상황의 현대 문화의 관점에서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어떤 일정항 상황에서의 실존의 문제들 - 문화 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적 문제들 - 에 반응하여 기독교 신앙을 재진술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적 차원에서 볼 때 '상황화'는,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우리가 방금 토론한 바 있는 '토착화'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나름의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신학 전통이 이제 수립되고 있는 한국 같은 나라에서, 신학적 개념과 범주가 충분하게 안정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현대의 삶의 상황에 적절하게 만들기 위하여 주제와 개념과 범주를 삶의 상황이 변할 때마다 그에 따라 바꾸어야 한다면, 이런 '상황화'는 신학을 신학적 저널리즘이나 신학적 정치로 변질시키고 말 것이다.


7) 보편적 교회


너무 광범위한 토착화 또는 상황화는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정체의 보편적 성격을 위태롭게 할 수가 있다. 토착화나 상황화에 매우 열심인 사람들조차도 지리와 인종과 문화와 시간의 장벽을 초월하는 기독교의 세계주의, 온 세계와 온 역사에 걸친 하나님의 백성의 일체 의식을 인식해야만 한다. '토착화'되거나 '상황화'된 여러 나라의 신학들은, 모든 상호 불연속성 속에서도 사도들의 설교와 또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온 그리스도의 교회의 신학 전통 등과 또 서로간에 충분한 정도로 연속성을 나타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 '토착화된' 신학들을 기초로 하여 그리스도에 해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은 서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할 수가 없으며, '그리스도'는 그저 하나의 부호가 되어 버리고 만다. 하나님께서 또한 그 분의 성령을 통하여 서양에서도 그 분의 진리를 펼치고 밝혀오고 계셨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 점에서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지난 19세기 동안의 교회사가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편적 교회 곧 하나님의 백성의 전통에 들어오도록, 그래서 참된 의미에서 그 천통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도록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의식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정체의 보편적 성격을 보호하는 방법으로 기독교 신앙을 재진술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적법한 '토착화'나 '상황화'의 정도에 한계를 설정한다.



8) 혼합주의의 위험


기독교 신앙이 토착화되어야 할 적합한 형태를 석택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들을 조심해서 다루지 않으면, 또 토착화가 위에서 설정한 한계를 넘어 진행된다면, 그 즉시는 아니더라도 일정한 시간이 경과하면 쉽게 혼합주의로 전학할 수가 있다. 한국의 전통 문화는 샤머니즘, 불교, 유교, 도교 등의 혼합주의이며, 또 한국인의 정신은 혼합주의라고들 말한다. 따라서 이 민족적 특성 때문에 신학자들은 우리 나라에 기독교 신앙을 토착화하려고 할 때 혼합주의의 위험에 주의해야 한다.


Ⅳ. 결론


필자는 이제까지 우리 나라에 기독교 신앙을 '토착화'하거나 '상황화'해야 할 필요성을 힘차게 설명해 왔다. 하지만, 토착화나 상황화 프로그램에서 밝은 미래를 내다보기보다는 문제를 더 많이 지적했다. 그렇다! 조직적인 토착화 시도와 관련해 볼 때, 필자는 낙관적이기 보다는 비관적이다. 그것은 대체로 필자가 신학적으로 보수적이거나 또는 필자가 이미 너무 많이 서양화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조직적인' 토착화 시도와 관련해서 토론한 모든 문제점들을 감안할 때 내가 '자발적' 또는 '자연적' 토착화 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신앙을 한국의 문화 유산의 시각에서 완전히 다시 진술하려는 조직적인 시도로 말미암아 종종 초래되는 인위적이고 독단적이며 이질적인 성격들을 피하기 위하여, 필자는 '자발적인' 과정이 제길을 잘 가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학자로서, 필자는 한편으로 이교도적인 요소들이 그 과정에 스며들지 못하도록 불침번을 설 것이ꎁ蕡, 또 한펴으로는 성경의 계시를 번역할 수 있는 최성의 용어를 찾아 내기 위해여 의식적인 노력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의식적인' 노력이라고 해서 '조직적인'(systema-tic or programmatic)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단편적이면서 점진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한편으로 필자는 한국 계회 역시 세계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서양 교회의 전통적인 고백을 우리 한국 교회에 적법한 고백(그 고백과 사도들의 설교 간에 연속성이 있기에 적법하다고 본다)으로 계속 채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필자는 서양 교회의 전통적 고백 속에서 적법한 한계를 넘어 헬라나 서양의 문화적 요소들이 성경의 진리를 '토착화'시킨 것을 발견할 때에 그 고백들 가운데 일부를 비헬라화하거나 탈서양화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신약에 기록된 사도들의 선포가 오늘날 우리가 하는 선포의 모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약의 전승사적 연구는 사도들이 유대인들은 물론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해석하면서 사용한 대다수의 개념과 범주가 구약과 유대교에서 끌어낸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 주, 하나님의 아들, 아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나라, 제사, 죄 사함, 의인 됨, 영화 등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분명히 신약의 각 저자들의 신학들 속에는 일체성뿐 아니라 다양성도 많다. 그러나 그들의 다양성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청중의 문화적 차이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으로 나타내고자 애썼던 구약의 메세지에 대한 기대가 여러가지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그들이 나타내고 둁있는 커다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일체성이 보장되는 것이다.


분명히 요한복음의 '로고스'같은 개념은 헬라 철학과 많은 접촉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요한이 그리스도를 로고스로 설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를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대행자로 보는 구약과 유대교의 전통 및 그리스도 사건 자체에서 받은 영향에 근거한다. 진실로 기독교를 자신들의 문화적 유산에 토착화하려고 진지하게 모색하는 자들은 요한의 로고스 교리 가운데 구약과 유대교의 배경과 헬라의 배경이 매우 놀랍게 결합되어 있는 사실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바울이 갈라디아의 이방인에게까지도 유대교의 정수에 해당되는 개념인 '칭의'의 범주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해석한 사실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바울이 이방인 회심자들을 할례와 모세의 율법의 요구로부터 자유롭게 하려는 싸움은, 종종 토착화를 주창하는 자들이 그것을 토착화의 예로 간주하려 하지만, 사실 토착화 문제와는 직접적 관련이 없다). 그들은 또한 사도들의 교회가 그들의 메세지의 중심 요소들을 표현하기 위해 '에로스'와 '튀게'(행운이라는 뜻의 헬라어)같은 중요한 헬라 용어들을 일체 피하고 왜 '복음', '은혜', '사도', '아가페' 등과 같은 다소 새로운 용어들을 만들어 냈는가 하는 점도 주목을 해야 한다. 그들은 복음이 그 모체인 구약에서 떨어져 나와서 2,3세기의 영지주의자들에 의해 헬라의 관점에서 조직적으로 재해석되었을 때 복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기억해야만 한다. 특히, 힌두교, 불교 또는 유교 경전들을 '그리스도에 대한 준비'로 보고 그것들로 구약을 대체해야 한다고 주창하는 신학자들은 이 점을 꼭 기억해야 한다.


토착화나 상황화가 얼마나 좋고 또 얼마나 필요하든지 간에, 우리가 성경의 개념과 범주를 타종교의 개념과 범주로 대체하게 되면 우리 신학의 기독교적 정체성은 손상되거나 상실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이 지니고 있는 모든 유대적인 특성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에 하나의 그리스도의 보편적 교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특수주의는 꼭 보존되어야만 한다(기독교 요소와 한국의 전통 종교들의 요소를 혼합하여 만든 한국의 여러 가지 혼합 종교들이 이러한 사실을 항상 상기시키고 있다).


진실로 세계 도처에서 기독교 신앙이 토착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민족주의 정신보다 성령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 종족의 자존심보다 신앙의 진리에 대한 확고한 충성과 그 진리를 효과적으로 선포하고자 하는 순수한 관심에 의해 토착화 작업이 주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때만이 만국이 그 보화를 갖고 시온으로 순례해 올 것이라는 옛 선지자들의 종말론적 환상이 실제로 이루어 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2:2-4; 60:1 이하; 66:18 이하; 슥 8:20-23; 미 4:1 이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