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동산은 실존(實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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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5-17)


성경의 가장 근본적 성격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우선하여 신자가 정말 확신해야할 내용이 있다. 성경은 절대적 진리(absolute truth)이자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s)을 기록한 책이라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확신해야 한다는 말은 의외로 많은 신자가 그런 인식이 부족할 뿐 아니라 신앙 성숙을 좌우하는 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신자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은 잘 의심하지 않는다. 도리어 너무 잘 믿어서 탈이다. 그러다보니 성경을 대할 때마다 도덕성과 종교성과 영성에만 비추어 해석하고 적용하려 드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의로운 계명, 경건한 종교 행위나 교리, 심오한 영적 의미만 추구하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아주 중요하고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는 것이 아주 깊이 있게 잘 믿는 것 같이 생각하는 것은 문제다. 자칫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다. 신앙이 머릿속의 관념으로만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이 책상 앞에 써서 붙여놓고도 거의 실천 하지 않는 구호 같은 취급을 받아 생명력이 떨어지는 신앙이 될 수 있다.

말하자면 경건을 추구하는 데만 초점을 모으기에 조금 덜 경건해도 아무 문제 삼을 것이 없어지는 것이다. 모순되는 말 같지만 신자의 실상이다. 즉 죄만 짓지 않으면 조금 덜 경건해도 어쨌든 경건한 축에 끼인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아주 경건한 것은 목사, 선교사 같은 전임사역자들의 몫이고 일반신자는 덜 경건해도 아무 하자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단순히 죄만 짓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측면은 필연적으로 부족해진다. 거기다 선을 행하고 하나님 일에 헌신하는 것은 형편이 더 나아지면 하겠다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 실천하고 있지 않는 것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까닭이 곧 그렇게 하려는 소원과 계획은 분명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끝까지 그런 핑계만 대다가 생을 마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알아도 짐짓 외면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처음에는 경건을 추구하려 했는데 결과는 조금 덜 경건해도 아무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신앙이 되었다. 관념 속에서만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서 영적 의미만 찾으려 하기에 살아 역사하는 힘이 수반되지 않는다. 자칫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드러나기 힘들게 된다. 요컨대 그렇게 추구하는 경건은 가짜 경건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성경이 절대적 진리를 넘어 역사적 사실이라고 확신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에게 진리이자 사실이 된다. 성경에 기록된 일들이 바로 지금 이곳의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으며 또 그 진행 과정과 결과도 똑 같아질 수 있다는 뜻이다.

필연적으로 얼마나 더 경건한지 덜 경건한지를 따지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신앙이 형성된다. 조금 덜 경건해도 별로 문제가 없다고 안심할 수 없다. 성경과 똑 같은 일이 바로 자신에게 지금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영적 의미만 논하고 있을 수 있는가? 정말 그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며 또 그래도 따르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하나님의 징계나 심판을 무서워하는 두려움(fear)은, 물론 그것도 포함하지만, 아니다. 정말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오묘한 은혜를 실제 말씀 그대로 본인의 삶과 인생 속에서 체험함으로써 그분께만 찬양과 경배를 돌릴 수밖에 없는 그런 경이감(wonder)이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면 자연히 신자의 무릎은 굽혀지며 머리도 숙여진다. 그리고 그분을 더욱 깊이 알게 되면 그 자리에 엎드려만 있지 않고 일어나서 그분과 함께 어디든지 기꺼이 걸어갈 수 있게 된다.    

창세기는 설화(說話)인가?

하나님이 비진리나 거짓을 말할 리는 결코 없는데도 너무나 지당한 이야기를 하는 까닭이 있다. 기독교 외부에서나 일부 자유주의적 기독교 신학자들은 창세기 1-11장까지를 전설이나 설화로 취급한다.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상상으로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에서 시작되는 유대족장이야기 즉, 12장부터 역사적 사실과 부합된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담, 이브, 에덴동산, 선악과, 가인과 아벨, 노아 홍수, 바벨탑 등의 기록이 모두 한갓 지어낸 소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11장까지는 그 사실여부를 믿기보다는 단지 그 안에 내포된 도덕적, 신학적, 영적 의미만 찾아내어 적용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결국 창조와 타락도 사실이 아니라 픽션(fiction)이라는 것이다.

비유컨대 본문 기사를 아예 이런 정도로 여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맥도날드 가게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모든 햄버그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빅맥(Big Mac)만은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맥도날드 햄버그는 인간이 만든 것이 분명한 것처럼 에덴동산도 전혀 있을 법하지도 않는 이야기를 인간이 꾸며내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기독교의 경전을 함부로 비하할 수 없으니 그 이야기가 내포하는 교훈은 찾아서 적용해야 한다고는 생각한다. 어떤 이는 인간은 운동 열심히 하고 몸에 해로운 식품을 먹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다른 이는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이 건강에 가장 해로우니 정서를 잘 다스리는 것이 우선이라고 여긴다. 말하자면 성경에서 얻는 영적 교훈도 사람마다 자기가 믿는 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성경, 특별히 창세기 초반부는 절대적 진리나 사실이 아니고 설화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11장까지 창세기에서 얻게 되는 결론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는 신자이기에 죄를 짓지 말고 선하게 살자는 정도다. 창조와 타락 기사가 모든 인간의 존재와 삶과 인생의 근간과 방향을 좌우하며 그 영원한 운명을 가름 짖는 절대적 진리임은 결코 실감하지 못한다. 이를테면 창조를 기껏 진화를 부인하는 이론 정도로만 취급한다.

창조와 타락의 기사가 성경이라는 책속에 문자로 남아있을 수 없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 중에서도 가장 살아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다. 인간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그 마음의 생각과 뜻까지 감찰하게 한다. 하나님 앞에 우리 모두를 벌거벗겨 세우는 최고로 능력 있는 말씀이다. 결코 우리 신앙의 기초를 한갓 공상이나 상상 위에 세울 수는 없다.    

물론 12장부터만 사실로 인정해도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을 수는 있다. 당연히 창조도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창조가 단순히 객관적 진리일 뿐 자신과 아무 연관을 짓지 못한다. 창조와 타락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전혀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 그 이전에 본문 기사 같은 사건은, 당연히 그 후의 인간의 타락도, 아예 있지도 않은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신이 이 땅에 존재하게 된 기원을 불신자와 동일하게 부모가 낳아줬다는 생물학전 탄생에서만 찾는다. 하나님이 특별한 목적을 갖고 특별한 일을 시키려고 자신을 특별하게 직접 만드셨다는 인식이 없다. 그러니까 성경보다는 사회에서 인정하는 인본주의적 윤리기준에만 따라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만이 신앙의 목표가 된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이 사실이라는 확고한 인식이 없으면 관념 속의 경건만 추구하는 신앙으로 흐를 수밖에 없고 또 성경대로 절대 순종할 수도 없다. 창세기 초반부도 사실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믿음으로 사실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인가? 그럼 그것도 일종의 관념 안에만 머무는 믿음이 된다.

대신에 창조 당시의 상황을 역으로 추적하면 얼마든지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다. 소설 쓰는 것처럼 상상으로만 추적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충분히 발생 가능한지 그 개연성을 따져야 한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최고의 확률만 따라 가야 한다. 비이성적이고 비현실적인 가정은 배제하고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적 구조를 성경 기록에서 추출해내야 한다.  

진짜로 창조를 믿는가?

가장 먼저 아담과 이브는 실존 인물이었지 창세기 설화 속의 가공인물이 결코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의 족보를 거꾸로 따져 올라가보라. 누가 뭐래도 결국은 최초의 부모 한 쌍으로 모이게 된다. 아무리 그 족보가 거대한 피라미드 모양이라 해도 꼭지는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 최초의 남녀가 바로 아담과 이브다.

실제로 아담과 이브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를 뜻하는 보통명사다. 아담은 특별히 사람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에덴동산의 설화를 지어내어 그 주인공 이름을 아담과 이브로 붙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반면에 남자와 여자라는 보통 명사의 뜻이라고 해서 특정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뜻도 아니다. 그들의 고유명사식 이름 즉, 그들이 서로 어떻게 불렀는지는 모르지만 최초의 특정 남녀는 분명히 있었지 않는가 말이다.

성경은 그래서 ‘아담’이라는 동일한 히브리 원어임에도 18절까지는 보통명사인 ‘사람’으로 번역했다. 최초의 남자라는 특정 인물보다는 사람이라는 종(種)에 대한 창조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19절에 와서야 비로소 고유명사의 형태를 취해 ‘아담’이라고 명명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2:19) 특정한 업무를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아서 시행하는 특정한 한 개인이 된 것이다. 에덴동산의 관리인이라는 확실한 정체성이 생겼다. 자연히 아담이 자신의 고유 이름도 된 것이다.  

또 에덴동산도 파라다이스를 동경하는 자가 지어낸 가상의 장소가 아니다. 최초 인간 두 사람이 살았던 곳이 바로 에덴이다. 어쨌든 그 두 사람이 생활하는 거주지는 분명히 있었을 것 아닌가? 인간이 새처럼 공중에 날아다니며 살지는, 새도 보금자리는 있음, 않았을 것이다. 방금 창조된 두 인간이 계속 떠돌이 생활을 했을 리도 없지 않는가 말이다.

그렇지만 역으로 따지면 에덴은 필연적으로 파라다이스일 수밖에 없다. 아직 주거할 집, 입을 옷, 사용할 도구 등을 만들기 전이었다. 당장의 큰 노력 없이도 자연 안에서 먹고 살 수 있어야 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쾌적한 기후에 맹수도 없어야 했다. 곳곳에 과일 나무가 보기에 탐스럽고 향기도 넘쳐서 자연스레 따먹을 수 있어야 했다. 전혀 공해가 발생하지 않았고 병균도 없었을 것이다.

다른 말로 처음 두 사람이 살았던 곳이 파라다이스가 아니었다면 아예 생존조차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헤라클레스 같은 전사(戰士)에다 그 손에 칼, 창, 활을 쥐어주어서 창조하지 않는 한 각종 과일나무로 가득 찬 곳에서 아담은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기독교 신자들마저 아담과 이브와 에덴동산의 실존 여부조차 의심한다. 아예  추적해보려 하지 않는다. 그저 하나님만 잘 믿으면 된다는 정도다. 이는 마치 학생이 무슨 과목을 어떻게 공부할 지 계획과 열의도 없이 그저 공부해야지 하면서 책상에 앉아 아무 책이나 손에 집히는 대로 끄집어내 읽는 것과 같다.    

물론 에덴동산의 구체적 위치나 그 모습은 어느 누구도 정확히 설명할 수는 결코 없다. 그러나 최초의 남자(아담)와 여자(이브)가 실존한 것이나, 또 그들이 살았던 장소(에덴)가 파라다이스 같은 곳이었다는 것만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지 않는가?  전지전능하고 영원히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이 엄연한 사실이듯이 말이다.  

벌거벗은 채 창조된 아담

동일한 맥락에서 창세기를 접근해보면 아담은 벌거벗은 어른으로 이 땅에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예컨대 영화 터미네이터(terminator)처럼 번갯불과 함께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혹은 텔레비전 시리즈 스타트랙(Star Track)처럼 빈 공간에 3 D입체 영상처럼 나타나듯이, 순간적으로 완전 나체의 성인남자가 출현한 것이다. 물론 그 구체적인 모습은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무에서 유로 창조된 것은 분명하니까 반드시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지구상에 나타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너무나 신기하고 경이롭지, 아니 아주 당연하지 않는가? 그런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다. 단순히 육신의 부모로부터 생물학적으로 이 땅에 출현한 것 같아도 그런 생식 방식을 만드신 이가 바로 하나님이다. 또 그런 하나님이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고 지금도 놀라운 은총과 권능으로 나를 보호하고 인도하고 계신다.

인간으로 나체로 태어나게 한 것이 하나님이 옷을 만들 줄 모르거나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이 전혀 아니지 않는가? 아담에게 고급한 지정의를 주어서 이 땅을 다스릴 책임을 맡겼다.  이제 곧 그는 동식물을 통치하는 가운데 옷도 만들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에덴동산 자체가 당분간은 옷이 필요 없을 정도로 쾌적한 환경이었다. 죄로 타락하여 자연환경도 왜곡되기 시작하면서 옷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성경은 분명 최초의 남녀 둘은 벌거벗고 생활했다고(2:25) 기록하고 있다. 어떤 이단이 주장하는 것처럼 선악과 사건을 성적 타락과 연결시킬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 셈으로 불신 세상더러 성경의 사실성에 대해 공격하도록 빌미를 주는 것이다. 창세기 초반부도 올바른 지성과 합리적 논리로 접근하면 진리요 사실이라는 것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오히려 일부러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데서 무리가 발생하여 이단이 파생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초기 인간들은 성경대로 수명이 아주 길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아이들을 많이 낳아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아담과 이브가 요즘처럼 둘만, 그것도 아들만 낳고 죽었다면 그 당대에 인구 번식은 중지될 것 아닌가? 물론 시간으로 따져 나이 계산법이 정확하게 어떠했는지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보다 훨씬 수명이 길었던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쾌적한 환경에, 공해도 없고, 스트레스 받을 일도 분명히 적었을 테니까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또 최초 인간들은 오누이끼리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이 또한 누가 뭐래도 최초에는 아들딸을 많이 낳아 그들끼리 결혼하지 않고는 도무지 후손이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그런 결혼을 했어도 유전적인 부작용이 전혀 생기지 않도록 하나님이 인간의 DNA 안에 안전장치를 다 마련해 놓았을 것이다.    

참으로 신기하지 않는가? 모든 동식물은, 단성 생식을 하는 극히 일부 특수한 종만 빼고는, 모두가 자웅(雌雄)의 교접만으로 번식한다. 단 하나의 예외가 없다. 과연 진화로서 모든 생물에 통용되는 통일된 하나의 생식 방식만 형성될 수 있을까? 왜 여러 방식의 생식이 나타나지 않았는가? 또 왜 종과 종 사이에는 아예 교접이 되지도 않으며 억지로 되어도 후손이 절대 생기지 않는가? 진화론자로선 이해도 설명도 할 수 없는 난제일 수밖에 없다. 종과 종 사이에 교접이 되면 진화가 더 빨라질 것인데도 말이다.  

아담과 이브는 나자마자 어른이었음도 너무나 정확한 사실이다. 닭이 달걀보다 먼저인 것과 같은 이치다. 달걀은 어미닭의 도움 없이는 절대 부화할 수 없다. 그러나 닭은 스스로 달걀을 만들고 부화도 시킨다. 인간이 신생아 상태로 창조되었다면 당장에 기지도 못하고 엄마 젖도 없는데 어떻게 생존할 수 있겠는가?

결국 아담과 이브는 현대인과 동일한 모습으로, 어쩌면 훨씬 더 뛰어난 지능을 부여 받았고, 육신적으로도 더 강건하고 수명이 훨씬 길었음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창조가 사실이며 또 최초의 인간은 그래야만 이 땅에 번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만큼 이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아담의 입장에 서보라.  

상기에 언급한 사실적 구조에 맞추어 창조 직후의 아담의 상태를 추정해보자. 다시 강조하지만 소설 같은 가상, 환상, 조작은 전혀 개입시키지 말고 그에게 필수적으로 발생했어야만 할 상황만 추적해보자는 것이다. 벌거벗은 어른의 모습으로 창조된 직후에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틀림없이 방금 긴 잠이나 최면에서 깨어난 것 같지 않았을까? ‘짠’하고 의식이 드는 순간 ‘짠’하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너무나 경이로웠지 않겠는가?

훈훈하고 상쾌한 공기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고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키는 순간 머리가 맑아지고 힘이 솟아났을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온갖 과일나무와 화초가 만발해 있으며 나무들의 그림자는 따사한 햇빛을 피하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자기가 벌거벗었다는 인식이, 아니 그런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단지 내가 왜 여기 이런 모습으로 혼자 와 있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창조되는 순간 온전한 지정의에 따라 스스로 지각, 비교, 검토, 판단, 결정하는 자의식은 분명 갖고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비록 하나님이 그 코에 당신의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었어도(2:7) 아직까지는 하나님의 실체와 마주치거나 대화를 나눈 단계는 아닐 것이다. 단지 그는 동산의 이 곳 저 곳을 마음대로 다니며 모든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만지기도 하면서 유심히 관찰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덧 허기와 갈증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졸졸 흐르는 너무나 맑고 깨끗한 시냇물을 보니까 마시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또 형형색색의 과일에서 나오는 향긋한 냄새를 맡자 자꾸만 따먹고 싶었을 것이다. 시냇물을 마시고 과일을 따먹으니까 갈증과 허기가 말끔히 가시고 곧 이어서 졸음이 왔을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시냇가 잔디에 누워서 기분 좋게 한참 낮잠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아담이 동산 구석구석을 다 돌아보고 또 그곳에서의 생활에 서서히 익숙해지자 자신의 기원에 대해 깊이 묵상했을 것이다. 동산의 온갖 과일과 화초와 시냇물과 따뜻한 햇볕 등은 어떻게 그런 상태로 있게 되었는가? 누가 만들어 놓았는가? 분명히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며, 또 주위 사방에 자기보다 더 지성적 존재는 아무리 봐도 없다.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자기와는 도무지 비교도 안 되는 너무나 엄청난 능력과 지성을 가진 존재가 틀림없이 있다고 말이다. 그분을 아직 뵙지는 못했어도 그분에 대한 존경과 경외와 감사와 찬양이 절로 생기지 않았겠는가?    

여기까지의 추정은 오직 객관 타당한 논리에 따른 것이다. 진화가 아니라 창조라면 최초인간 아담에게 필연적으로 일어났을 일이다. 다른 가능성은 아무리 가정하려 해도 없다. 여기에 추가로 생각해야할 부분이 하나 남았다. 정작 더 중요한 사실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목적과 정교한 계획에 따라 우주 만물을 질서 있게 창조하였다. 그 모든 것을 인간의 생존을 위해 먼저 마련한 후에 그것들을 다스리며 자신과 교제할 인간을 마지막에 창조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뿐 아니라 초기의 인간과 구약시대의 선지자들까지도 어떤 방식이 되었든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해야만 했다는 의미다. 필요하다면 어떤 매개체를 통해서라도 당신을 인간의 눈에 보이시고 귀로 들리게 하셨을 것이다.

말하자면 성경이나 체계적인 신학교육도 없었기에 그런 방식 말고는 없지 않는가 말이다. 만약 그런 교통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보기도 전에 아담과 이브로선 당장에 번성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요컨대 선악과 금령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알게 해주신 것이라는 뜻이다.  

사실이 믿음보다 앞선다.

많은 신자들이 믿음으로 창세기가 사실임을 받아들인다고들 말한다. 이는 아주 잘못된 진술이다. 자칫 우리 스스로 우리의 믿음을 부인하는 의미도 될 수 있다. 사실임을 믿는다는 표현 자체에 어폐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일 경우는 구태여 믿을 필요가 없다. 그냥 사실이라고 선언하면 끝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어떤 추가 설명도 없이 단 한 마디로 시작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구태여 창조를 믿는다고 꼭 말로 표현해야 할 자는 신자가 아니라 불신자인 셈이다.  

자식이 자기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께서 내 아버지 되심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법은 절대 없지 않는가? 아들은 그냥 아버지라고 부르고, 아버지 또한 아들이라고 부르면 끝이다. 남들이 뭐라고 해도 그 부자 관계는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 영원불변의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아담과 이브, 에덴동산과 선악과 사건을 신자이기에 믿음으로 사실이라고 받아들여선 안 된다. 엄연한 사실이니까 믿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믿는다고 사실이 아닌 것이 사실이 되거나, 믿지 않는다고 사실이 거짓으로 바뀌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신자가 정작 관심을 두어야할 문제는 창세기 초반부의 사실성 여부가 결코 아니다. 아니 그런 것을 따진다는 자체가 벌써 우스꽝스런 일이다. 그 대신에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사실이 지금 나에게는 어떤 사실로 다가올 것인가이다.

우리 모두는 아담이 타락하는 바람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원죄 하에 태어났다. 마땅히 아담의 실패를 반추 삼아야 한다. 아니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와 타락 이전의 상태로 돌아왔기에 지금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선악과 금령을 받고 있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본문의 기사가 아득한 옛날의 아담에 관한 이야기로 머물러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기록은 사실로서 모든 세대 모든 신자에게도 사실이 된다는 원리를 잊어선 안 된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런 형편 하의 나에게도 말이다. 바꿔 말해 본문을 이렇게 해석 적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 OOO를 만드시고 이끌어서 지금 이 자리 이 모습으로 두사 나에게 맡겨준 모든 사람과 공동체를 당신의 뜻대로 거룩하고 아름답게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다. 또 여호와 하나님이 나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네가 임의로 판단 결정하여 행하되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당신의 통치원리를 성경에 기록했으며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완전하게 드러내었음을 절대 잊지 말라. 만약 십자가를 놓치는 순간에는 너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에덴은 신자에겐 상상 속의 장소가 절대 아니다. 아담과 이브도 우리와 아무 연관 없이 원숭이와 맞서는 창조 이론상의 인물도 결코 아니다. 신자라면 자기가 현재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에덴이다. 또 하나님 앞에 항상 타락 전의 아담과 이브의 상태로 서야 하며 주위 모든 사람에게, 특별히 같은 성도끼린 서로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럼 없게 살아야 한다.

또 그렇게 하도록, 아니 얼마든지 그럴 수 있도록 예수님이 직접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을 부어주셨다. 한 마디로 신자가 한 번 얻은 구원을 잃어버리지는 않지만 십자가를 잠시라도 잊으면 그만큼 자신의 영과 혼과 육이 죽음에 가까이 가게 됨은 정녕 사실이라는 것이다. 창세기 초반부 기록이 하나님의 계시 이전에 엄연한 사실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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