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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과 수난주간의 신학적인 의미와 설교주제

운산
2017.03.16 14:19:42 (122.44.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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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과 수난주간의 신학적인 의미와 설교의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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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승중 (장신대 교수, 예배/설교학)



I. 들어가는 말

교회력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죽음, 부활, 그리고 재림 안에서 완성되어진 우리의 구원역사를 매년 재현하는 것”[1]이다. 교회력은 주후 4세기말에 이르러 거의 완성되었는데, 처음에는 부활절을 전후로 해서 사순절과 부활절, 그리고 오순절이 발전하게 되었으며, 4세기에 이르러 하나님을 증거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시작과 관련된 주현절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주현절은 4세기말에 성탄절과 나뉘어지고, 그 후에 마지막으로 대강절이 생겨나므로, 주후 4세기말에는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회력의 기본이 그 틀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초대교회 때부터 주후 4세기까지 이루어진 교회력은 초대교회의 삶과 믿음의 내용을 거의 반영하고 있으며, 그것은 곧 예수님의 오심과 그의 사역, 수난, 죽으심, 부활, 영으로 임하심, 그리고 그의 재림 등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렇게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회력을 따라 설교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가 있다. 즉 설교자가 교회력을 따라 설교한다면 교회의 설교는 교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바 은혜를 계속적으로 기억하게 만들어 주게 된다.[2] 왜냐하면 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사역, 수난, 죽으심, 부활, 영으로 임하심, 그리고 재림 안에서 완성된 우리의 구원역사를 매해 되새김으로 우리에게 구원사의 모든 과정을 계속해서 체험케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력은 우리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하는 “항구적인 은총의 수단”[3]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그래서 피우스 파쉬(Pius Parsch)는 교회력을 가리켜 “은총의 교회력”[4]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교회에는 초대교회때 부터의 이 귀한 믿음의 유산인 교회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다. 더 나아가서 한국의 개신 교회들은 교회력이 마치 로마카톨릭 교회가 만들어낸 것으로 간주하여 이에 대해 소홀히 하여 왔다. 그 결과 귀한 믿음의 유산 중의 하나를 잃어버리는 실수를 범하게 된 것이다. 다행히 작금에 이르러 한국 개신 교회 내에 교회력에 대한 중요성이 재인식되고 있다. 본 글은 초대교회 때부터 있어 왔으나 우리가 잠시 동안 잃어버렸던 교회력에 대한 본래적인 의미를 되찾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로 사순절과 고난주간의 역사적 발전과 그리고 그 신학적 의미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와 관련한 설교의 주제를 밝히고자 한다.



II. 몸 체

1. 사순절의 역사

우리가 교회력과 관련하여 초대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초대교회는 매주일을 부활을 위한 축제의 날로 삼고 예배를 계속하였다. 그들은 비록 오늘과 같은 완전한 교회력은 없었으나 주님의 부활에 초점을 맞춘 매주일의 예배는 “작은 부활절”(little Easter)로서 교회력의 기초를 이루고 있었다.[5] 특별히 이들이 맞는 주일은 언제나 부활과 연관을 지었기에 기쁨과 감사와 승리의 축제가 예배의 전반적인 분위기였다.[6] 비록 그들은 심한 박해에 시달리는 현실에 있으면서도 날마다 주의 날을 기다리고, 이 날에 모이면 그의 부활을 축하하면서 기쁨과 소망을 가진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이렇게 매주일 예배(weekly Easter)를 주님의 부활에 모든 신앙의 초점을 모은 초대교회는 자연히 주님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 주(“big Easter”)[7]에 연례부활절을 지키게 되었고, 이 연례부활절을 교회력의 중심으로 축하하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부활절 때에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 영원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기리고 감사하면서 세례식을 베풀었다. 유월절(Pascha)이 출애굽 하여 홍해를 건넌 뒤에 노예상태로부터 완전한 자유함을 얻은 사건의 기념이었듯이, 초대교회는 세례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명으로 태어나 하나님 안에서 참 자유함을 얻는 사건으로 보았던 것이다.[8]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4-5)

그래서 터툴리안은 “부활절은 특히 세례를 베푸는 데 의미있는 날이다”[9]고 하였고, 또한 히폴리투스는 기록하기를 “세례 받을 사람들은 성주간 금요일과 토요일에 금식을 하고, 토요일 저녁에는 철야기도를 드리도록 했다. 그리고 부활주일에 새벽에 닭이 울 무렵, 즉 예수께서 부활하신 시간 무렵에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일어나신 것처럼 몸을 물 속에 잠갔다가 일어남으로써 세례를 받았다”[10]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성 바질(St. Basil of Caesarea)은 “부활절은 세례 받기에 가장 적합한 날이다. 이 날은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다. 세례는 우리 속에 부활의 씨를 심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서 부활하신 날에 세례를 받음으로 부활의 은총을 받자”[11]고 설교하였다. 그러므로 4세기말에 이르러 부활절은 교회에서 거룩한 세례를 받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절기가 되었던 것이다.[12]

결국 초대교회는 세례와 깊은 관계가 있는 부활절을 맞이하기 위하여 자연스럽게 준비하는 기간을 갖게 되었는데, 그 기간이 바로 사순절이다. 즉 그들은 그토록 귀중한 부활절을 맞이하기 위하여 그 전에 십자가의 수난을 명상하고 금식하며 회개하는 가운데 세례를 준비하고, 새로이 세례 받는 교인들과 함께 감격의 부활주일을 맞이하였던 것이다.[13] 이것이 바로 사순절의 그 역사적인 배경이다.



2. 사순절의 신학적 의미

1) 세례 받을 자들의 준비기간으로서의 사순절
우리가 사순절을 이해하려고 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순절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을 명상하고 회개하는 기간으로 시작되었다기 보다는 앞서 말한 대로 세례지원자들을 위한 마지막 준비단계로써 시작이 되었다는 점이다.[14] 즉 초대교회 당시에는 세례지원자들은 사순절 기간동안 일상 생활에서부터 떨어져 상당히 어려운 준비를 거친 후 부활주일 전날 밤에서 새벽때나(Easter Vigil), 부활주일 아침에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15]

이렇게 부활주일에 세례를 받기 위하여 준비하는 기간으로 시작된 사순절은 참회의 수요일(또는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부터 시작이 된다. 사순절 시작의 날로서 참회의 수요일이 확정된 것은 주후 6세기의 Gregory I 교황때 부터이다.[16] 부활절 날짜에 따라 결정이 되는 이 날은 2월 4일부터 3월 11일 사이에 온다. 이 날 사람들은 회개를 상징하는 베옷을 입고 그 위에 재를 뿌린다. 베옷을 입고 재를 뿌리는 것은 모두 성경에서는 회개를 상징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교회는 신자들의 머리 위에 재를 뿌리며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임을 기억하라”(창 3:19)고 말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렇게 참회의 수요일부터 시작하는 사순절은 처음 1세기에는 단 40시간으로 지켰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무덤 속에서 40시간동안 있었던 것과 일치시키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3세기에 이르러서는 부활주일 전 한 주간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지키다가, 나중에 30일간으로 연장되었으며, 마침내 주후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처음으로 “사십일”로 정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기록은 주후 330년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편지에도 나타나있다.[17] 주후 348년 예루살렘의 시릴(Cyril)의 [교리문답 강의](Catechetical Lectures of Cyril of Jerusalem)에도 40일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 있다. 예루살렘의 주교였던 시릴(Cyril)은 이때 세례 받는 이들을 가르치면서 “당신들은 오랫동안 은총의 기간과 참회를 위한 40일을 보내야 합니다”[18]라고 하여 사순절의 원래 의미를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리고 기록들에 의하면 이 사순절 기간에 초대교회에서는 부활절 때 세례를 받기 위하여 훈련받고 있는 세례후보자들에게 특별히 금식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후에 이 금식은 교회의 모든 경건한 백성들에게도 요구되었다. 이미 언급한 바대로 주후 3세기의 히폴리투스(Hippolytus)의 기록에 의하면 부활주일에 세례를 받을 사람들은 금요일과 토요일 그리고 부활주일 전야를 온전히 금식하도록 하였다.[19] 그리고 4세기에 이르러 부활절에 이르기 전 사순절 기간동안 모든 교인들이 세례 받을 사람들과 함께 금식에 동참하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즉 어거스틴의 시대에 사순절은 세례 받을 자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주님의 수난에 접하고 머무르는 준비의 기간이 된 것이다.[20] 이 점에 대해서 알란 멕아더(Allan McArthur)는 이렇게 말한다.

“40일간의 금식은 세례 받기 위하여 준비하던 세례후보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게 해당되는 것이었다. 물론 실제에 있어서 전 교회가 40일간의 금식을 하였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적어도 훈련받고 있던 세례후보자들과 보다 경건한 사람들은 이 40일간의 사순절을 금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21]

그러므로 이 40일간의 사순절 기간은 무엇보다도 먼저 초대교회가 성례전적인 삶속에서 교회공동체의 자기정체를 확실히 하는 기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세례를 맞이하기 위하여 엄숙하고 거룩하게 자신을 준비하신 것처럼(광야에서의 40일간의 금식기도를 통한 당신의 공생애의 준비), 매해 부활주일을 맞이하기 위하여 저들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똑같은 모습으로 준비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사순절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는 세례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례 안에서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4).




2) 개인적인 경건과 회개의 사순절

원래 이렇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의 기간, 특별히 부활주일에 세례 받을 사람들의 훈련기간이요, 준비기간으로 시작되었던 사순절은 어거스틴 때에 이르러서는 세례와 상관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수난에 접하고 머무르는 준비의 기간으로 발전되어 갔다. 즉 사순절은 세례 받는 이들의 준비기간이라는 본래의 의미에서 더 나아가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 및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서 보이는 자기 희생적(Gods Self-giving) 사랑을 기억하는 절기로 발전되어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순절은 시간이 흐를수록 엄숙한 예배와 그리스도인들의 경건한 생활을 강조하게 되었고, 기독교인들이 자신을 부정하고 참회하는 기간으로 지키게 되었다.

그런데 본래 부활주일 아침에 세례 받기 위한 자들의 준비기간으로 시작되었던 사순절의 의미가 시간이 흐를수록 이렇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자기를 부정하고 참회하는 기간으로 변화되어 간 데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한가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성인세례(Adult Baptism)의 사라져감이었다.[22] 즉 기독교가 국교가 된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고, 그들은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유아세례를 받게 하였다. 그리하여 5세기와 특별히 6세기에 이르러 기독교인 부모들의 아이들을 위한 유아세례(Infant Baptism)가 대대적으로 행하여졌고, 결과적으로 사순절 기간동안 성인세례를 받기 위하여 준비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압도적으로 줄어갔다. 결국 사순절의 세례와 관련한 의미는 점점 사라져 갔고, 반면에 참회 적인 차원의 사순절의 의미가 더욱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었다.[23] 그래서 토마스 탈리(Thomas Talley)는 이 변화를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하고 있다.

“사순절의 역사는 세례를 위한 준비로서의 의미에서 성목요일에 교회 앞에 공식적인 화해를 요청하는 사람들의 공적인 참회의 의미로 그 강조점이 변화되어 감을 보여준다. 유아세례의 증가는 사순절의 주요 관심을 세례로부터 참회자의 화해로 향하게 하였다”[24]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새로운 단어를 접하게 된다. 즉 그것은 “참회자의 화해”(the reconciliation of penitents)라는 말이다. 이 말은 교회력과 관련하여 살펴볼 때 특별히 고난주간 중의 하루인 성목요일(Maundy Thursday)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단어이다. 복음서에 의하면(특별히 요한복음 13장) 예수님께서는 이 날 당신의 제자들에게 성찬식과 세족식을 베풀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요한 13:34)을 주셨다. 우리는 성목요일을 Maunday Thursday라고도 하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계명(mandatum novum: A New Covenant)을 주신 것을 뜻하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날을 화해와 용서의 날로 정하여 지키게 되었는데, 특별히 그 동안 교회 앞에 죄를 짓고 출교(Ex-Communication)당한 사람들이 이 날 온 회중앞에서 자신의 지난날의 잘못과 죄를 고백하고(public penitence), 회중들이 그들을 받아들이는 날로서의 화해의식(reconciliation)을 거행하였던 것이다.[25] 그러므로 공중 회개 자들의 화해는 수난주간에 행하여졌던 아주 중요한 의식이었으며, 이를 흔히 “참회자의 화해”(reconciliation of penitents)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순절의 절정에 해당하는 수난주간에 있었던 이 “참회자의 화해”는 세례의 의미가 점점 사라져 감에 따라 사순절 절기 동안 그 의미가 더욱 강화되어 갔으며, 결국 사순절은 회개와 참회의 의미가 강한 절기로 그 의미가 변화되어 갔던 것이다.[26]



3. 사순절의 메시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대로 사순절은 두 가지의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절기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근본적으로 사순절은 세례 지원자들을 위한 마지막 준비단계로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사순절은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의 여행 및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서 보이는 사랑의 자기 희생적 성질을 기억하는 절기이다. 즉 참회의 수요일(Ash Wednesday)로부터 시작하여 작은 부활주일인 매주일(The Lords Day)을 제외한 40일간 계속되는 사순절(주일을 포함하면 실제적인 기간은 46일이 됨)은 세례와 회개를 통한 참된 돌이킴(True Conversion)의 기간이다. 즉 사순절은 회개(Repentance), 기도(Prayer), 화해(Reconciliation), 금식(Fasting), 그리고 우리의 세례 계약(Our Baptismal Covenant)을 통한 신앙성장을 위한 계절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옛사람이 죽지 아니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상기시켜 준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서 일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먼저 죽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그와 함께 죽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순절은 우리가 죽음 안에서 살 수 있다는 역설을 가르친다.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 받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길, 부활을 향한 길은 우리의 옛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나아가는 길이다. 죽음 안에서 우리는 살게 되는 것이다.”[27] 그래서 바울은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5)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사순절은 믿음 안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특별한 시간이요, 주님께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이요, 우리의 과거의 모든 실패와 죄악들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져 가는 시간”[28]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에서는 이런 사순절의 근본적인 의미와 관련하여 그 동안 너무 한편으로 치우친 메시지가 선포되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바로 사순절이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개인적인 신앙점검과 회개는 강조되었으나, 본래 사순절이 나타나게 된 근본원인인 세례를 통한 거듭남의 의미와 세례를 통한 그리스도와 하나됨의 의미가 강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미국의 대부분의 개신 교회들은 사순절 기간동안 세례의 의미를 재 강조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의 자기정체성을 계속해서 확인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즉 사순절은 여전히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세례를 위한 준비기간이요,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른 이들과의 화해를 위한 기간이요, 또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기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이 기간동안 자신의 세례를 재확인(reaffirmation)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 자기정체성을 다시 한번 분명히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부활주일 전 날밤(Easter Vigil)에 모여서 밤을 지새우며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세례를 베풀며, 이미 세례 받은 자들을 향해서는 “당신의 세례를 기억하시오!” (“Remember your baptism!”)라고 선언하면서 종려나무 가지에 물을 적셔 흩뿌리는 예식을 하기도 한다(Renewal of Baptism). 결국 오늘 설교자들은 사순절이 우리가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계절이라기 보다는 우리로 하여금 세례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God-with-us)의 신비 속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계절임을 계속해서 선포해야 할 것이다.[29]



4. 사순절의 절정으로서의 수난주간의 역사

4세기에 이르러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함께 기념하고 감사하는 가운데 통합적인 축제(Unitive Festival)로서의 부활절기(Pascha)를 지키던 초대교회는 이제 수난주간(Holy Week)과 부활절을 분리하여 기념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리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당시 예루살렘의 주교였던 시릴(Cyril)의 주도하에 일어났다.[30]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사건이나 장소에서 각각 따로 분리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훨씬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더욱이 예루살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사역, 즉 십자가에서의 수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구속사역이 완성된 곳이어서 많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순례자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마지막 그 발자취를 따라 순례의 여행을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교회는 전세계로부터 밀려오는 순례자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주간 있었던 가장 귀한 구속의 사역, 십자가의 사역을 중심으로 한 시간과 장소에서 예배드리며 주님의 오심을 기념할 필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성서자체가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한 주간의 행적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지라, 그들은 마지막 주간, 즉 유월절 주간동안에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 시간과 장소에 따라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 그리고 죽으심을 기념하는 예배와 행사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순절의 절정으로서의 수난주간(고난주간)이며, 이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그 당시 모습이 주후 384년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스페인의 수녀 이제리아(Egeria)의 기록에 그 모습이 그대로 전해내려 오고 있다.[31]

이 예루살렘에서의 수난주간 행사는 점차로 전세계로 퍼져 나갔고, 성주간의 의식들은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사역과 죽음의 극적인 순간들을 기념하는 것들로 발전되어 나갔다. 예수님의 죽음 이전과 이후에 일어난 사건의 실제현장인 예루살렘에서 이런 예배들이 발전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특별히 부활절 직전에 오는 이 성주간은 우리 주님의 고난에 대한 집중적인 추모의 주간으로 지켜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이 주간동안에 이루어진 행사를 역사적으로 찾아보고, 오늘 한국교회의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을 설교의 분문들과 주제와 관련하여 알아보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작업일 것이다.



5. 고난주간의 행사

1) 종려주일/수난주일(Palm Sunday/Passion Sunday)

이 날에 교회는 예배 도중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서 행진하고 몇 명이 복음서 중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장면을 극적으로 읽었다.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행진하는 것은 4세기 예루살렘 관습에서 발견되는데, 그 때에 감람산으로부터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노래를 부르며, 종려주일 오후에 주님의 무덤교회로 행진하며 가는 관습이 그 기원을 이루고 있다. 이 날은 주로 마태복음에 나타난 수난 설화(26, 27장)를 중심으로 읽으면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명상하였다. 그러므로 이 날의 주제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승리의 입성(Triumphal Entry)이며, 또 하나는 주님의 수난(The Passion of Our Lord)이다. 그래서 흔히 이 날을 가리켜 “대조의 날 또는 아이러니의 날”(Day of Contrast/Irony) 이라고 부른다.



2) 전반부 3일(Three Minor Days)

교회는 전통적으로 고난주간의 전반부 3일이(월,화,수) 후반부 3일(목,금,토)에 비하여 조금은 덜 중요한 날들이라 하여 특별한 행사를 가지지는 않았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월요일에는 예수님의 성전 일소하신 사건에 대하여 기억하며, 화요일에는 예수님의 감람산에서의 설교를 들었다. 이 때에는 주로 마가복음 14, 15장의 수난 설화를 읽었다. 그리고 수요일은 전통적으로 유다의 배반에 그 초점을 맞추었다. 교회는 이 날 전통적으로 누가복음의 수난설화(22, 23장)를 읽었으며, 유다의 배반에 초점을 맞춘 결과 금식하며, 또한 동시에 구제를 위한 헌금을 하였다. 사실 이 구제헌금(Almsgiving)은 현대교회가 점점 더 잃어가고 있는 모습인데, 오늘 한국교회는 이 기간동안 교인들로 하여금 금식을 선포하고, 그것으로서 구제를 하는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IMF시대에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책임을 한국교회가 솔선 수범하여 행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한국교회가 수난주간을 진정 의미 있게 보내는 모습이 될 것이다.



3) 성목요일(Holy/Maundy Thursday)

이스터 트리둠(Easter Triduum:주님께서 체포되어 수난 당하신 3일을 지칭하는 말)으로 알려져 있는 3일 중 첫날인 성목요일 저녁에, 교회는 우리 주님께서 수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념하는 성만찬(고전 11:23-26)을 베풀었으며, 때로는 세족식(요한 13:1-5)도 거행하였다. 이 두 가지 행사는 모두가 다 서로간에 종으로서 섬길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두 가지의 행사는 진실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희생과 섬김을 따라 본받는 삶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이 날을 Maundy Thursday라고도 하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계명(mandatum novum: A New Commandment, 요한 13:34)을 주신 것을 뜻하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날을 화해와 용서의 날로 정하여 지키게 되었는데, 특별히 이날 죄를 짓고 출교(Ex-Communication)를 당한 사람들이 온 회중 앞에서 자신의 잘못과 죄를 고백하고(Public penitence), 회중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날로서의 의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Reconciliation). 그러므로 “공중 회개자들의 화해”는 성목요일의 세 번째 중요한 행사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하여 오늘 한국교회는 이미 권징을 잃어버린 지 오래인지라 초대교회 때부터 있어왔던 이런 아름다운 전통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소개할 것은, 교회의 예배 역사를 보면 후에 이 날에는 테네브레(Tanebrae)라고 하는 예배가 행하여졌다. 이 예배는 7개, 혹은 12개의 촛불을 정해진 구약 또는 신약의 말씀(주로 수난설화)을 읽으면서 촛불을 하나 하나 차례로 꺼 가는 예배이다. 이 예배는 목요일 밤 이후에 점점 더 깊어만 가는 어두움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감람산에서의 배신, 예수님의 체포, 그리고 재판에서의 저주 등을 통해서 더욱 더 어두움의 세계로 들어감을 상징하는 예배이다. 이 예배의 마지막에는 물론 축도가 없으며, 회중들은 어두운 가운데서 조용히 돌아가게 된다. 아직 한국교회에는 생소한 예배이지만, 예배 인도자들이 잘 계획하여 진행한다면, 예수님의 수난설화를 읽는 가운데, 그리고 점점 더 빛이 사라져 가는 모습 속에서 주님의 수난을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4) 성금요일(Good Friday)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금요일로 알려진 이 날 요한의 수난설화(18, 19장)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을 회상하였는데, 그러므로 이 날 드리는 예배의 중요한 성격은 회개(Penitential service)였다. 그러나 이 날은 역설적으로 십자가의 좋은 소식(복음)을 축하하는 날이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를 이야기하는 십자가의 복음(Good News)을 전하는 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구원의 복된 소식이 주어졌으니, 이 날은 주님께서 죽으신 슬픈 날이기도 하지만, 모든 죄인들에게는 구원의 복된 소식이 들려진 좋은 날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서구인들은 이 날을 가리켜 성금요일(Good Friday)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날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며, 또한 전 세계의 고통받는 자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였다. 그러므로 성금요일에는 한국교회가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금식기도의 날로 선포하여 금식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고통받고 있는 한국민족을 위한 중보기도를 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5) 성토요일(Holy Saturday)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날에 역시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수난과 죽으심을 강조하며 묵상하였다. 특별히 이 날은 성금요일과 함께 전통적으로 금식을 하는 날이었고, 전 교인들은 이 금식에 동참할 것을 요구받았다. 또한 금요일과 함께 이 날은 피정의 날이었다. 즉 성금요일과 이 날에 교인들은 세상에서의 삶을 떠나 조용히 주님의 수난과 죽으심을 묵상하는 가운데 영적 수련을 쌓았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날은 부활주일 새벽 또는 아침 예배 시간에 세례를 받을 사람들을 위한 최종적인 세례교육의 날이었다.



6. 고난주간의 설교

교회력의 어떤 절기에 해당하는 때에라도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회상하는 중요한 순간이다. 우리의 예배를 통하여 과거의 사건이 오늘의 사건으로 다가오게 된다. 초대교회는 부활절을 하나의 통합적인 축제로서 지켰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만을 축하하고 기념한 것이 아니라, 그의 고난, 죽음 그리고 승리를 다 함께 축하하고 기념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사건들은 함께 기념되어 졌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위의 사건들--그리스도의 고난, 죽음, 그리고 승리 등--은 여러 가지 주제를 지닌 체 발전하였다. 그 결과 여러 예식들이 전 주간에 걸쳐 나타나게 되었으며, 각각의 예식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승리와 우리의 승리”의 회상(anamnesis)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앞서 밝힌 대로 스페인의 수녀 이제리아(Egeria)가 4세기에 수난주간 동안 예루살렘에서 행해지고 있던 바로 그 예식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녀가 고난주간 동안 예루살렘 교회가 드리던 각각의 예배에서 사용되어진 본문 말씀에 대해서는 자세히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여러 다른 자료들에 의해서 고난주간 동안 교회가 읽고 설교하였던 말씀들을 찾아볼 수 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수난주간 동안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말씀을 읽고 설교를 하되 수난주일과 성목요일 그리고 성금요일에는 보다 길고, 형식을 갖춘 설교(sermon)를 하였고,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그리고 토요일에는 짧은 형태의 단편설교(homily)를 하였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설교자들도 수난주간 동안의 예배를 위한 설교 준비를 할 때에 위의 형태를 따라서 설교를 준비하면 좋을 것이다. 즉 만일에 교회에서 수난주간 동안 성목요일이나 혹은 성금요일에 예배를 드린다면(주로 저녁시간) 설교자는 주일 낮예배 때의 설교와 같은 완전한 설교(full sermon)을 준비하여야 할 것이며, 그 외의 날들(월,화,수,토)에는 새벽 기도회 시간을 이용하여 수난과 관련된 말씀들을 읽고 묵상하는 짧은 설교(homily)를 준비함이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전통적으로 수난주간 동안 읽고 설교한 본문들은 무엇인가?



1) 종려주일/수난주일(Palm/Passion Sunday)

앞서서 이미 지적한대로 이 날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과 수난이라는 두 가지이다. 그래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날 예수 그리스도의 입성을 말해주고 있는 본문들(마태 21:1-11, 마가 11:1-10, 누가 19:28-40)과 복음서에 있는 수난설화(마태 26:14-27:66, 마가 14:1-15:47, 누가 22:14-23:56)를 읽고 설교하였다. 그리고 서신서에서는 예수님의 겸손과 찬양의 노래인 빌립보 2:5-11이 읽혀졌다. 이 날 읽혀진 구약의 말씀은 전통적으로 이사야 50장에 나오는 고난의 종의 노래(사 50:4-9)이며, 시편 말씀 중에는 시편 22편, 31:9-16, 118:1-2, 19-29 등이다.

이 날 교회의 전통가운데 읽혀지고 설교되어진 또 하나의 중요한 내용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일곱 말씀(가상 칠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상 칠언은 고난주간 내내 새벽기도회 시간에 한 말씀씩 묵상하고 설교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2) 전반부 3일(Three Minor Days)

교회는 월요일에 전통적으로 마리아의 예수님께 기름부음에 대한 복음서의 말씀(요한 12:1-11, 마가 14:1-9, 마태 26:1-5)을 읽었는데, 설교자는 이 날 마리아의 헌신에 대해 비난을 가하고 있는 유다를 비교해 보는 가운데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화요일에는 메시야의 교훈의 말씀(요한 12:20-36)이 읽혀졌다. 수요일에는 전통적으로 유다의 배신에 대한 말씀(요한 13:21-35)을 읽었다. 설교자는 월요일과 수요일의 말씀 속에 등장하는 유다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그가 왜 예수님을 배신하게 되었을까--탐욕? 메시야에 대한 실망? 진리 앞에서의 굳어진 마음?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를 함께 묵상하는 가운데, 오늘 우리 속에도 잠재해 있을지 모르는 신앙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에 구약의 말씀과 관련하여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날들 동안 이사야의 고난의 종의 노래들을 읽고 설교하였다. 이 고난의 종의 노래는 4개가 있는데, 그 중에 3노래(사 42:1-9, 49:1-7, 50:4-9)를 월요일부터 차례로 읽어 나갔고, 네 번째 종의 노래(사 52:13-53:12)는 성금요일에 읽혀졌다. 만일에 설교자가 매일 새벽기도회 시간에 가상 칠언을 차례로 설교하지 않는다고 하면, 이 종의 노래들은 좋은 설교본문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자는 점점 더 깊어만 가는 종의 고난을 매일 새벽 하나씩 묵상해 감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을 더욱 깊이 묵상할 수 있을 것이다. 월요일에는 종의 인내를, 화요일에는 종의 절망을 그리고 수요일에는 종의 고통을 묵상하는 가운데 점점 더 깊어만 가는 종의 고난을 함께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날들 동안 읽혀지는 시편말씀은 시편 36:5-11(월), 시편 71:1-14(화) 그리고 시편 70(수) 등이다.



3) 성 목요일(Holy/Maundy Thursday)

전통적으로 이 날 읽혀진 말씀은 바울의 성만찬 제정의 말씀(고전 11:20-29)과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말씀인 요한복음 13:1-17, 31-35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이미 앞에서 소개하였다. 구약의 말씀은 출애굽기 12:1-14인데, 이는 유월절 규례에 대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구약의 출애굽 사건과 연결하여 묵상할 수 있는 귀한 말씀이다. 그리고 이 날 읽혀진 시편의 말씀은 시편 116:1-2, 12-19이다. 이 날의 설교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성례전적인 행위를 통한 “참여”(Participation)이다. 회중들은 성만찬에 참여함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한다. 또한 세족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섬김에 참여하게 된다. 즉 죄의 씻음과 함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함이 이 날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것이다.




4) 성 금요일(Good Friday)

성금요일은 수난주간의 중심이요, 절정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날 정오에,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그의 고난이 절정에 다다른 시간에(마태 27:45, 마가 25:33, 누가 23:44) 복음서의 그 부분을 읽으면서 3시간 동안 예배(이것을 흔히 The Three Hours라고 부른다)를 드렸다. 그러나 낮에 예배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아침 일찍 혹은 저녁에도 간단한 예배를 드렸다. 이 때에는 주로 아침에는 베드로의 제자도에 대한 말씀(요한 13:36-38)을 읽고 묵상하였고, 저녁에는 예수님의 죽음과 우리의 죽음과의 관계를 주제로 하여 설교하였다(요한 19:38-42). 세시간의 예배(The Three Hours)는 교회의 전통에서 아주 유명한 예배인데, 이 때에는 주로 예수님의 가장 칠언을 중심으로 그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예배를 드렸다.

이 날에는 주로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마지막 순간들을 묵상하는 것이 교회의 전통이었는데, 거기에는 많은 주제들이 나타나 있다. 예를 들어 빌라도의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성금요일 설교의 중요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 외에도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의 명패가 히브리, 라틴, 그리고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것도 좋은 설교의 주제가 될 수 있다(요한 19:17-22).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권능이 모든 세계에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종교의 언어(the language of religion)인 히브리어, 제국의 언어(the language of empire)인 라틴어, 문화의 언어(the language of culture)인 헬라어로 그 분의 명패가 기록되었다는 것을 통해서 설교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종교와 나라들과 그리고 문화적, 지적인 모든 세계에 있어서 진정한 주님 되심을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이 날 읽혀질 수 있는 말씀들은 이사야의 네 번째 종의 노래(사 52:13-53:12)와 이삭을 제물로 바친 아브라함의 이야기(창 22:1-18), 시편 22편과 40:1-14, 그리고 히브리 10:16-25 등을 꼽을 수 있다.



5) 성토요일(Holy Saturday)

이 날에 교회에서 읽혀질 말씀들은 욥기 14:1-14, 예레미야 애가 3:1-9, 19-24, 시편 31:1-4, 15-16, 베드로 전서 4:1-6, 그리고 마태 27:57-66, 요한 19:38-42 등을 들 수 있다. 사실 이 날은 어두움의 날이다. 더 이상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날이다.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이 온 인류를 뒤덮은 날이다. 그러나 바로 이 때가 새벽이 가장 가까운 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날 설교자들은 어두움을 헤치고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부활의 새벽을 기다릴 수 있도록 오히려 소망을 전할 수 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토요일 밤부터 주일 새벽까지 함께 모여서 밤이 새도록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부활의 새벽을 맞이하였는데, 그 예배를 부활주일 철야예배(Easter Vigil)라고 부른다. 그들은 밤이 가장 깊은 때가 곧 새벽이 오는 때임을 알고, 밤을 새워가며 말씀을 읽으면서 부활을 새벽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수난주간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정연한 연속으로 상세하게 비취 주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설교자들은 우리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여러 말씀들을 통하여 깊이 묵상하고 전함으로 오늘 현대교회 속에서 너무나도 “값싼 은혜”로 전락해 가고 있는 십자가의 수난과 구속의 은총을 다시 한번 새롭게 발견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III. 나가는 말

앞서도 밝혔거니와 교회력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사역, 고난, 죽음, 부활, 영으로 임하심, 그리고 재림 안에서 완성되어진 우리의 구원역사를 매년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안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재현하는 교회력을 따라 설교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설교자들은 교회력을 따라 설교함으로 교회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받은 바 은혜를 계속적으로 경험하게 만들어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임스 화이트(James F. White)의 말대로 교회력은 교회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하는 “항구적인 은총의 수단”[32]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이 은총의 교회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축이라고 할 수 있는 부활절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시작된 사순절은 십자가의 수난을 명상하고 회개하는 가운데 세례를 준비하는 기간이다. 다시 말해서 사순절은 교회가 성례전적 삶 속에서 교회공동체의 자기정체를 확실히 하는 기간인 것이다. 이 기간은 교회가 십자가의 길을 걷는 기간이요, 부활을 향한 길을 걷는 기간이다. 우리의 옛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삶의 길로 나아가는 기간이다. 즉 사순절은 믿음 안에서 교회공동체가 새로운 시작을 위한 특별한 준비를 하는 기간이요, 주님께 다시 한번 돌아갈 수 있는 기간이요, 우리의 과거의 모든 실패와 죄악들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져 가는 기간인 것이다[33].

그리고 그 사순절의 절정으로서의 수난주간 동안 교회는 새벽이 가장 가까운 때임을 알고 어두움을 헤치고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부활의 새벽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그 무덤에서 나올 때

오 때로 그 일로 주께 영광 영광 영광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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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orace T. Allen, Jr. A Handbook for the Lectionary (Philadelphia: The Geneva Press, 1980), p. 25.

[2]. James F. White. Introduction to Christian Worship. rev. ed. (Nashville: Abingdon Press, 1990), p. 73.

[3]. Ibid., p. 74.

[4]. 그는 교회력에 관한 책을 쓰면서 책의 제목을 “은총의 교회력”(The Churchs Year of Grace)이라고 하였다. Pius Parsch. The Churchs Year of Grace (Collegeville, Minn.: Liturgical Press, 1964-1965), 5 vols.

[5]. A. Allan McArthur, The Evolution of the Christian Year (Greenwich: Teabury Press, 1953), p. 13.

[6]. Ibid., p. 20.

[7]. Presbyterian Church(U. S. A.), Liturgical Year (Louisville: The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2), p. 6.

[8]. Seung Joong Joo, "The Christian Year and Lectionary Preaching: A Liturgical Contextualization for the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Tong Hap)" (Th. D. diss. Boston University, 1997), p. 34.

[9]. James F. White, Introduction to Christian Worship. rev. ed. (Nashville: Abingdon Press, 1990), p. 59에서 재인용.

[10]. Lucien Deiss, C.S.Sp. ed. "The Apostolic Tradition of Hippolytus of Rome", in Spring Time of Liturgy, Matthew J. OConnell. trans. (Collegeville: The Liturgical Press, 1979), p. 140.

[11]. Edward Yarnold, The Awe-Inspiring Rites of Initiation: Baptismal Homilies of the Fourth Century (London: St. Pauls Publications, 1971), p. 136.

[12]. Thomas J. Talley, The Origins of the Liturgical Year (New York: Pueblo Publishing Company, 1986), p. 36.

[13]. 초대교회의 중요한 문서들 가운데 하나인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Didache)에 의하면 부활주일에 세례 받을 사람들에게 “하루나 이틀 전에 단식할 것”을 명하였고, 심지어는 세례를 베푸는 자도 미리 단식할 것을 말하고 있다. Michael W. Holmes, ed. & rev. "The Didache" (The Teaching of the Twelve Apostles) in The Apostolic Fathers, J.B. Lightfoot and J.R. Harmer, trans.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9), p. 153.

[14]. Seung Joong Joo, p. 39.

[15]. James F. White, p. 61.

[16]. George M Gibson, The Story of the Christian Year (Nashville: Abingdon-Cokesbury Press, 1965), p. 91-92.

[17]. 그는 유럽 여행 도중 사순절 뿐 아니라 성주간(Holy Week)이 온전히 경건하게 온전히 지켜지는 것을 보고 이집트로 돌아오자 마자 자기 교인들에게 “그들이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좀 더 엄격한 금식을 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George M. Gibson, The Story of the Christian Year (Nashville: Abingdon-Cokesbury Press, 1965), p. 91에서 재인용.

[18]. Cyril of Jerusalem, Cyril of Jerusalem and Nemesius of Emesa. trans. by William Teller.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55), p. 284.

[19]. Lucien Deiss, C.S.Sp, ed. "The Apostolic Tradition of Hippolytus of Rome," in Spring Time of the Liturgy, Matthew J. OConnell, trans. (Collegeville: The Liturgical Press, 1979), p. 140.

[20]. James F. White, p. 61.

[21]. A. Allan McArthur, p. 125.

[22]. Seung Joong Joo, p. 43.

[23]. Lizette Larson-Miller, "Lent" in The New Dictionary of Sacramental Worship (Collegeville: The Liturgical Press, 1990), p. 682.

[24]. Thomas J. Talley, p. 224.

[25]. Kenneth Stevenson은 그의 책에서 성목요일에 행해진 “참회자의 화해”의식의 일부를 소개하고 있다. Jerusalem Revisited: The Liturgical Meaning of Holy Week (Washington, D.C.: The Pastoral Press, 1988), pp. 39-40.

[26]. Thomas J. Talley, p. 171.

[27]. Presbyterian Church (U.S.A), p. 31.

[28]. Hoyt L. Hickman, The New Handbook of the Christian Year (Nashville: Abingdon Press, 1992), p. 106.

[29]. 참고로 사순절의 본래적인 의미인 세례와 관련한 메시지를 선포하는데 있어서 설교자들이 중요하게 다룰 수 있는 말씀은 로마서 6:1-11, 8:1-11 등이다.

[30]. James F. White, p. 62.

[31]. John Wilkinson. trans. Egerias Travels to the Holy Land. rev. ed. (Westminster, England: Aris & Phillips, 1981).

[32]. James F. White. Introduction to Christian Worship. rev. ed. (Nashville: Abingdon Press, 1990), p. 74.

[33]. Hoyt L. Hickman, The New Handbook of the Christian Year (Nashville: Abingdon Press, 1992), p. 106.

[34]. 표준 찬송가 136장 1,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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